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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우리 술이 라면·디저트 잇는 ‘K푸드’ 되려면

조선비즈 변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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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우리 술이 라면·디저트 잇는 ‘K푸드’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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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약과, 냉동만두 같은 한국 식품이 세계인의 식탁에 자연스럽게 오르는 시대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일부 교민 사회나 아시아 시장에 한정됐던 한국 식품이 지금은 미국·유럽 대형마트와 온라인몰에서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주류 시장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일본에는 ‘사케’, 중국은 ‘백주’라는 국가대표 술이 있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술이 무엇일지 생각하면 단번에 떠오르지 않는다. 한 주류 업계 관계자는 “해외 소비자는 한국 소주가 자몽 맛인 줄 안다”라고 말했다. 한 번쯤 경험해 볼만한 재미있는 술 정도라는 얘기다. 막걸리 역시 저가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술도 케이(K)푸드 반열에 오를 잠재력은 충분하다. 하지만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일본 사케 산업을 보면 어느 정도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아사히 주조가 만드는 프리미엄 사케 브랜드 ‘닷사이’는 2015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가 만찬주로 선택한 술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닷사이는 일본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필수로 구매하는 술이 됐다. 닷사이는 일본 내에서는 현대적인 이미지, 해외에서는 고급 사케의 표준이라는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프리미엄 사케가 대중화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사케가 명확한 기준에 따라 분류되고 라벨에 이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1992년부터 ‘특정명칭주’ 제도를 시행했다. 이전까지 특급·1급·2급으로 구분했던 제도를 폐지하고, 원료·정미율 등에 따라 긴조, 다이긴조, 준마이, 준마이긴조, 준마이다이긴조, 혼조조 등으로 세분화한 것이다. 현재는 이 분류 자체가 제품명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름만 보고도 어떤 술인지 유추할 수 있다. 해외 소비자들도 쉽게 살 수 있는 이유다.

아울러 특정명칭주로 분류되는 사케는 주요 정보를 라벨에 반드시 표기해야 한다. 쌀 품종, 정미율, 알코올 도수, 양조장 이름, 제조 일자 등을 명확하게 알리는 것이다. 이런 제도들은 일본 사케가 전 세계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고 고급화에 성공하는 토대가 됐다. 사케의 재료와 제조 특성에 대해 소비자들이 정보를 투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덕이다. 실제 일본 사케 수출액은 2010년 89억엔(약 840억원)에서 2023년 470억엔(약 4434억원)으로 5배 이상 증가했다.


한국의 경우 전통주 또는 지역 특산주라고 불리는 술은 많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술이 무엇이라고 대중에게 각인된 제품은 없다. 전통주란 무엇인지, 지역 특산주와 어떻게 구분되는지 등 근본적인 부분과 관련해 수년째 해묵은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구체적인 분류 기준이 없다 보니 양조장의 철학이 소비자에게 잘 전해지지 않는다. 좋은 재료와 정성스러운 양조 방식, 지역성과 같은 무형의 가치가 ‘병 안에만’ 머무르는 셈이다. 소비자가 병 디자인과 광고 문구만 보고도 술을 판단하게 해야 한다.

정부는 전통주 산업을 활성화하고자 수년에 걸쳐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진척은 더디다. 2011년 술 품질 인증제가 도입되긴 했지만 소비자 인지도 부족, 실익 부족으로 인한 업계의 반발 등으로 유명무실해졌다. 일본의 특정명칭주 제도처럼 법적 기준까지 세우진 못하더라도, 라벨을 통한 정보 공개와 신뢰 구축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주류 업계 관계자는 “탄산 막걸리가 유행하면 너도나도 탄산 막걸리를 내놓고, 과일 막걸리가 유행하면 비슷한 제품이 시장에 쏟아진다”라고 말했다. 유행은 빠르게 지나간다. 감성만으로 소비자에게 접근하는 전략 역시 한계가 있다.


한국 술을 적극적으로 브랜드화하고 세계 시장에 전략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 와인, 위스키, 사케처럼 한국 술의 위상이 세계에서 우뚝 서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변지희 기자(zhe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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