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기본조약에 서명하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
조기원 | 국제부장
“지난 수십년간 아니 수백년간 우리는 일본과 깊은 원한 속에 살아왔습니다. … 그러나 국민 여러분! 그렇다고 우리는 이 각박한 국제사회의 경쟁 속에서 지난날의 감정에만 집착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1965년 6월23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 기본조약 체결’에 대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한일회담 타결에 즈음한 특별담화문’이라는 제목의 이 발표에서 박 대통령은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느냐”고 호소했다.
이 담화에서 엿보이듯이 60년 전 한-일 국교 정상화를 맞은 한국은 그렇게 축하 분위기가 아니었다. 굴욕 외교라며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는 시위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1965년 6월23일치 동아일보에는 1면 해설 기사로 ‘(조약) 조인 완료 지금부터 시작이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관계가 일본과의 것이기 때문에 이 새로운 시작은 우리에게 홀가분한 것이 못 된다”며 “올해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조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과 같은) 을사년이라는 데서 다른 하나의 연상이 뭇사람의 머리를 스치는 것은 역시 피해망상이라고만 할 수 없는 면이 있지 않나 싶다”고 당시의 착잡한 분위기를 전했다.
60년이 흐른 뒤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많은 것이 변했다. 국교 정상화 이후에도 이른바 ‘왜색 문화’ 범람 우려로 막았던 일본 대중문화는 1998년 개방됐고, 이후 한국에서 일본 대중문화는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본에서도 2000년대 이후 드라마를 시작으로 케이(K)팝 등 한국 대중문화가 진출해 한류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적으로도 일본의 경제 규모 자체는 여전히 한국의 두배가 넘지만,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3만6024달러로 일본(3만2476달러)을 제쳤다.
그러나 1965년 양국이 과거사를 미봉하며 개인의 희생을 강요해 남긴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다. 국교 정상화 때 한·일은 일본이 한국에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차관을 제공한다는 경제 협력으로 청구권 문제 해결에 합의했으나, 개인 청구권이 이 합의로 없어질 수는 없었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이 강제동원 피해 배상 판결을 내려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렸으나, 일본은 2019년 수출규제 등으로 보복했다. 윤석열 정부는 2023년 일본 가해 기업 대신 한국 재단이 피해자와 유족에게 돈을 지급하는 ‘제3자 변제’로 대법원 판결을 사실상 뒤집고 문제를 또다시 미봉했다.
한겨레는 광복 80돌과 한-일 국교 정상화 60년을 맞아 한-일 관계를 돌아보는 기사를 통해, 국교 정상화 이후 한-일 관계의 이런 여러 측면을 되짚어봤다.
한-일 관계 관련해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미래 지향”이다. 미래 지향이라는 말은 과거를 잊거나 이야기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실제로는 그런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일본이 “전후(패전) 80주년”을 맞는 올해 이시바 시게루 정부는 10년 주기로 내왔던 내각 담화를 따로 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패전 50주년이었던 1995년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을 담은 ‘무라야마 담화’를 내고 60주년인 2005년 이를 계승한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했지만, 70주년이었던 2015년 더 이상 사과하지 않는 일본을 표방한 ‘아베 담화’로 후퇴했다. 일본의 조선 강제병합이 “상대국 국민의 긍지와 아이덴티티에 상처를 입혔다”고 저서 ‘보수 정치가 나의 정책 나의 천명’에서 지적했을 만큼 비교적 전향적인 역사 인식을 보인 이시바 총리도 담화를 내지 않고 아베 담화를 굳히려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결국, 한국 정부가 미래 지향을 위해서라도 과거사 직시를 지속적으로 사안별로 명확히 요구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일본이 니가타현 사도광산의 조선인 강제동원을 명확히 인정하지 않았는데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찬성해줬다. 결국 지난해 11월 열렸던 희생자 추도식 때도 일본은 조선인 강제노동 인정을 회피해 한국 쪽이 따로 추도식을 열어 행사가 파행됐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미래 지향은 과거를 풍화시키는 단어가 될 수밖에 없다.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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