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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5 (수)

“돈 없는 대학들이 세계 경쟁?… 영양실조 선수, 월드컵 뛰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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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 유치’ 포스텍 김성근 총장

경북 포항의 포스텍(포항공대)이 10년간 1조2000억원의 투자 약정(기부금 모금 예정 2000억원 포함)을 받았다. 국내 대학 역사상 최대 규모다. 포스텍은 국내외 석학을 초빙하고 연구 환경을 개선해 세계적 대학으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제2의 건학’ 프로젝트다.

조선일보

2일 오후 경북 포항에 있는 포스텍 대학본관에서 김성근 총장이 본지와 인터뷰하는 모습. 김 총장은 "투자금 1조2000억원으로 포스텍을 살려 지방 소멸 위기를 막고 국가 미래 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다"고 했다. /김동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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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총장은 2일 포항 포스텍에서 본지와 만나 “한국 대학들은 16년간 이어진 등록금 동결과 투자 부족 등으로 ‘영양실조’에 걸려 있다”며 “투자금 1조2000억원으로 포스텍을 살려 지방 소멸 위기를 막고 국가 미래 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다”고 했다. 포스텍은 1조2000억원 중 우수 교수 초빙에 1036억원, 교원 경쟁력 강화에 1124억원, 외국 학생 유치 및 국제화에 1180억원, 연구 시설 건립과 리모델링에 5377억원 등을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울대 교수에서 포스텍 총장이 됐는데.

“서울대에 34년 있었다. 포스텍은 내실이 있다. 그런데 수도권 집중화로 겪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우수한 교수님들이 배우자 직장, 자녀 교육 문제로 수도권으로 많이 빠져나가고 있다. 지방 붕괴가 눈앞이라는 걸 여기 와서 절감했다. 대학 살리는 것이 지역을 살리는 핵심이다. 젊은 인구는 좋은 대학과 일자리가 있어야 유입된다. 포항엔 포스텍과 포스코 같은 좋은 대학과 기업이 있다. 이런 포항이 지방 소멸을 막지 못하면 다른 지역은 더 힘들다. 6·25 때 포항 학도병이 낙동강 저지선을 구축한 것처럼 지금은 포스텍이 지방 붕괴를 막는 최후 저지선이다.”

-포스텍은 1조2000억원 투자를 유치한 뒤 ‘인재 확보’를 제1사업으로 내걸었다.

“지금 이름만 들어도 놀랄 만한 교수들과 접촉 중이다. 세계적 교수를 모셔오면 해외 교수들 레이더망에 포스텍이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 교수들도 ‘서울에 꼭 가야 하느냐, 나도 포스텍에 가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도권에서 교수가 오고 학생이 오면 연쇄반응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번 투자 유치에 놀라는 대학이 많은데.

“정말 큰 금액이다. 10억달러에 해당하는 돈이다. 미국 대학에서도 단일 규모로 10억달러 기부는 전례가 드물다. 하버드대의 단일 최대 기부금도 5억달러 정도일 것이다. 잠이 안 온다. 이 돈을 받고 망치면 나는 대역죄인이 된다. 국가 미래를 위해선 과학기술과 교육에 투자해야 한다. 교육 말고 우리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나. 문·이과, 전공 구분 없는 융합 인재가 중요하다. 인문·사회과학에도 투자해야 한다. 그래야 이공계가 영감을 받을 수 있다. 하버드대의 경우 일반화학 수업 듣는 300명 중에 전공자는 30여 명뿐이다. 나머지는 공학 하는 학생, 음악 하는 학생도 있다. 장벽을 깨야 한다. 자기 전공에만 매달린 학생이 융합 인재를 어떻게 이기나.”

-지금 한국 대학의 문제는 무엇인가.

“국립대는 정부 교부금, 사립대는 학생 등록금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대학 등록금은 16년간 동결된 상태다.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오히려 내려가고 있다. 우리 대학들은 사실상 영양실조 상태다. 연간 대학 등록금이 영어 유치원보다 싸다는 것이 말이 되나. 이런 대학에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라고 요구하는 것은 영양실조에 걸린 축구 선수를 월드컵에 내보내는 것과 뭐가 다른가.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투자 없이 대학 경쟁력 상승을 바라는 것은 기적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세계 주요국은 미래를 위해 천문학적 돈을 대학에 투입하고 있다. 미국 대학은 쌓아놓은 기금이 수십조원이고, 중국·일본·싱가포르 등은 국가가 대학 투자를 주도한다. 일본만 해도 작년 100조원의 특별 펀드를 마련해 운용 수익으로 매년 3조원 이상을 대학에 넣으려 한다.”

-재정 부족이 대학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은.

“교수님들을 새로 모실 때 연구 기반을 옮기는 데 필요한 초기 정착비를 드린다. 2억5000만~3억원 정도다. 서울대나 카이스트도 비슷하게 준다. 우리 대학 상황에선 엄청난 투자다. 그런데 미국의 괜찮은 대학은 조교수 정착 비용으로만 200만달러(약 26억원)를 제공한다. 3억 대 26억인데 경쟁이 되겠나. 정착비 3억원도 대한민국의 대학 90% 이상은 꿈도 못 꾼다. 대다수 대학은 조교수한테 연봉 5000만원 주기도 힘든데 포스텍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할 것이다. 1986년 포스텍이 생겼을 때는 건물과 시설이 최고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낙후됐다. 재단 전입금이 600억원 수준인데 건물 하나 지으려면 몇백억원이 들어간다. 재단이 비교적 탄탄한 포스텍도 이런데 다른 사립대는 어떻겠나.”

-외국 대학은 어떤가.

“중국의 경우 같은 학과 교수라도 (성과에 따라) 월급 차이가 엄청 난다. 퀄리티(자질) 평가가 철저하다. 15년 전 얘기지만 나보다 어린 중국 학자인데 화학반응 동역학에서 두각을 보였다. 그러자 중국 정부가 1000만달러(약 130억원) 시설을 지어준다고 약속하고 데려갔다. 베이징대나 칭화대 교수는 미국 교수 부럽지 않은 연봉과 대우를 받는다. 요즘 물리학 교수를 데려오려면 연봉 25만달러(약 3억3000만원)에 가능하지만, AI(인공지능) 교수는 100만달러(약 13억원)를 줘도 모시기가 어렵다. 그런데 우리 대학은 AI나 물리학이나 비슷하게 줘야 한다. 교수 성과급 도입도 쉽지 않다. 대학은 인재 양성소다. 좋은 교수를 모시는 게 가장 중요하다.”

-우리 대학 교육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포스텍에는 애플 아카데미가 있다. 애플이 세계에 개발자 양성소를 두는데 아시아에는 포스텍이 유일하다. 여기선 강의식이 아니라 문제 중심의 토론형 공부를 한다. 강의 듣고, 받아 적고, 시험 준비하는 것은 옛날 방식이다. AI가 인간 능력의 많은 부분을 대체하는 시대엔 창의성과 남이 모르는 걸 찾아내는 능력이 중요하다. 물리학을 전공하면서도 양자 물질과 반도체 강의를 들어야 한다. 화학과 학생이지만 2차 전지도 공부해야 한다. 강의실이 아니라 워크숍 스타일로 바꿔야 한다. 대입에서도 진취적 학생을 뽑아야 한다. 수능 성적 이런 건 필요하지 않다. 우리 대학도 각자 정체성과 특징을 키워야 한다. 지금은 선택 기준이 성적뿐이다. 대학 DNA와 학생 DNA가 맞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 점수 1~2점으로 당락이 갈리는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포스텍이 시도하는 교육 프로그램이 있나.

“학부생 대상으로 ‘경로 찾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작년엔 3학년 전체를 CES(세계 최대 IT 박람회)와 노벨위크(노벨상 시상식 주간 행사)에 데려갔다. 올해는 신입생 한 명에게 1000만원씩 주고 알아서 쓰게 했다. 외국어 연수를 받든, 창업을 하든, 학교 밖에서 어떤 도전이든 해보라는 것이다. 강의실을 넘어 사회 변화를 체감해야 한다. CES에 다녀온 학생들은 다들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하더라. 왜 미분 방정식을 배우는지 CES에 가보고 알았다고 했다. 현장이 중요하다. 청춘 4년을 허비하지 말고 의미를 찾아야 한다. 올해 2학년 올라가는 학생은 750만원, 3학년은 500만원, 4학년은 250만원씩 받는다.”

-요즘 의대 열풍이 심각한데.

“개탄스럽다. 의대 열풍은 저절로 고쳐질 것이다. 너무 쏠리다 보면 어느 순간 답이 아니라는 순간이 온다. 이공계는 의대와 별개로 발전을 추구하는 게 맞는다. 포스텍에도 의대가 생긴다면 우수한 의사를 유치해 연구 중심 대학이 되도록 지원할 것이다.”

☞김성근 총장은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물리학 석사, 화학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9~2022년 서울대 화학부 교수를 지내며 자연과학대 학장을 역임했다. 작년 9월 포스텍 제9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2006년 교육부가 선정한 ‘국가 석학’이다.

[최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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