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박돈규기자의 2사만루] 장애인 조정 국가대표 하재헌 예비역 중사
2015년 북한 목함지뢰 도발로 두 다리를 잃은 하재헌 예비역 중사는 두 팔로 희망을 밀고 간다. 재활하며 조정을 배웠고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그가 지난 18일 미사리 조정 경기장에서 힘껏 노를 젓고 있다. 하재헌은 “과거를 원망해 뭐 하냐”며 “내겐 아직 두 팔이 남아 있다”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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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漕艇) 선수는 '뒤로' 나아간다. 바람과 물살을 몸으로 읽는다. 앞을 보지 않는 스포츠가 또 있을까. 조정은 결승선을 등진 채 노를 저어 2㎞를 가야 한다. 수상 마라톤인 셈이다. 단거리에서 겨루는 카누와는 사뭇 다르다.
하재헌(25) 예비역 중사는 미사리 조정 경기장에서 두 팔을 힘껏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마다 노에 그려진 태극마크가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2015년 북한 목함지뢰 도발로 두 다리를 잃었지만 그는 드러눕거나 숨지 않았다. 의족을 착용하고 더 큰 꿈을 향해 걸어나갔다. "조정 선수로 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하고 싶습니다. 저를 보면서 용기를 내십시오"라며 지난 1월 전역했다. 4월 1일 페이스북에는 이렇게 썼다.
"오늘부터 이천에서 합숙하고 강원도 화천으로 갑니다. 약 6개월ㅋㅋ. 재입대하는 것 같아요. 패럴림픽 메달리스트가 되기 위한 발걸음!"
장애인 조정 국가대표로 뽑혔다는 소식은 만우절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재헌 선수가 사용하는 노의 길이는 250㎝. 두 팔의 연장(延長)이다. 추석 전에 인터뷰 약속을 잡았는데 '북한은 두 다리를 빼앗고 정부는 명예를 빼앗고'라는 뉴스가 터져 나왔다. 국가보훈처가 국방부의 전상(戰傷·적과 교전이나 그것에 준하는 작전 수행 중 입은 상이) 판정을 뒤집고 그에게 공상(公傷·교육이나 훈련 중 입은 상이) 판정을 내린 것이다. 세상이 시끄러웠다.
지난 18일 만난 하재헌은 "전국 장애인 체육대회(10월 15~19일 서울)를 앞두고 훈련에 집중하기 힘든 상태"라고 했다. 반바지 아래로 로봇 다리 같은 의족이 보였다. "보훈처 판정은 어이없다"며 그가 말을 이었다. "저를 뒤따라오던 병사들이 목함지뢰를 밟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됐을까요. 직업군인이던 저보다 훨씬 심한 푸대접을 받았을 거예요. 일을 당하고 보니 이것은 하재헌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군인 모두의 명예가 걸린 싸움이에요."
2015년 말 서울 중앙보훈병원에서 퇴원하는 하재헌 중사. /박상훈 기자 |
전신 마취 수술만 19번
2015년 8월 4일. 육군 1사단 전진부대 소속 하재헌 하사는 새벽 4시에 기상해 수색 작전 준비를 하고 7시에 경기도 파주 비무장지대(DMZ)로 향했다. 일상적인 순찰이었다. DMZ 철책 통문을 김정원 하사가 열었고 그에 이어 하 하사가 들어가는 순간 지뢰가 폭발했다.
―고통스럽겠지만 그날 상황이 궁금합니다.
"북한 애들이 야간에 와서 목함지뢰를 매설한 거예요. 저희는 '적(敵) GP'라고 불러요. 거기서 사건 현장이 직선거리로 300m쯤 됩니다. 산길이라 뛰면 5분 정도 걸리겠지요. 김 하사가 진입 신호를 보냈어요. 수색팀 중 제가 두 번째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요?
"딱 발을 내디뎠는데 먼 폭발음이 들렸어요. 다음 순간 제가 땅에 앉아 있더라고요. 앞이 뿌옇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양쪽 고막이 파열돼 귀에서 삐~ 소리가 들렸고요."
―통증은.
"처음에는 없었어요. 몇 초쯤 지났을까. 타는 냄새가 났고 극심한 통증이 올라왔습니다. 연기가 사라지니 제 다리가 보였어요."
―어떤 상태였나요.
"두 다리가 터졌는데 근육이 끊어지진 않았습니다. 바로 앞 원형 철조망에 제 발과 군화가 걸쳐 있었어요. 김정원 하사가 응급처치하고 저를 끌고 나가다가 통문 남측에 매설된 북한 목함지뢰를 또 밟았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다리만 다친 줄 알아요. 엉덩이와 등 부분이 더 심했습니다. 지뢰 파편과 화상으로 엉덩이 절반이 없어요."
―후송돼 절단 수술을 받았는데.
"다리에는 뼈만 남아 있어서 그걸 잘라내고 봉합하는 수술이었습니다. '얘는 수술하다 죽을 수 있다'고 의사들이 말했지요. 오른다리는 무릎 위까지, 왼다리는 정강이까지 절단했습니다. 그날부터 전신 마취 수술만 19번 했어요."
하재헌 선수(SH공사 장애인 조정팀)가 의족을 착용하고 서 있다. 키는 목함지뢰 사고 전과 같다. 그는 “배를 타면서 내게 잠재된 승부욕을 알게 됐다”며 “금메달 수확의 쾌감보다는 은메달 딸 때 분노가 훨씬 더 크다”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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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있었나요?
“전부 기억해요. 국군수도병원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분당서울대병원으로 다시 옮겨졌어요. 아프다는 생각밖에 없었지요. 부모님 걱정을 했고요. 아버지·어머니가 연락을 받고 부산에서 올라오는 중이었어요. 사단 간호장교에게 휴대폰을 빌렸지요.”
―통화할 때 첫마디가 뭐였습니까.
“엄마, 저 많이 안 다쳤어요. 이렇게 전화도 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하늘을 원망했을 텐데.
“안 했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그래 봐야 기분은 한도 끝도 없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겁니다.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내가 아니라면 뒤에 오던 병사들이 지뢰를 밟았을 테니 그나마 다행이다’라고요. 과거를 원망해 뭐 해요. 되돌릴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죠. 아직 두 팔이 남아 있잖아요.”
―혹시 종교가 있나요.
“없어요. 저는 아무도 안 믿어요.”
“북한을 왜 숨기려 하나”
하재헌은 치료와 재활 등 당장 닥칠 일만 생각했다. 두 달 만에 의족을 끼고 일어났다. 빨리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당시 국방부의 바람이었다. 그해 12월 걸어서 퇴원할 때 “아기가 첫 걸음마를 시작하는 기분”이라고 그는 말했다.
―재활 기간 중에 뭐가 가장 힘들었나요.
“마음가짐요. 우울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병원에서 부모님이 나누는 대화를 자는 척하며 들었어요. 자주 우셨고 세상을 원망하셨지요. 그럴수록 웃고 장난치며 ‘어떻게든 버티고 이겨내야겠다’ 마음먹었어요.”
―조정을 접한 계기는.
“장애인체육회 지도자와 임명웅 감독님(SH공사 장애인 조정팀)이 찾아와 ‘하지 절단 환자가 할 수 있는 유산소운동’이라며 로잉머신(노를 젓는 운동을 모방해 만든 기구)을 권하셨어요. 2016년 5월입니다. 저는 상체로만 잡아당겨야 해 되게 지루했어요. 그해 가을에 ‘배 한번 타보자’며 조정 경기장으로 데려가셨지요. 의족 차면 바닥만 보고 걷다시피 해요. 1㎝도 안 되는 턱이나 작은 돌멩이에만 걸려도 넘어지거든요. 그런데 배를 타니까 탁 트인 경치와 하늘도 보이고 마음이 편한 겁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나요.
“처음엔 재활하면서 균형 감각을 익히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당시 보직을 의무병과로 바꿔 수도병원에서 근무하며 보상 업무를 맡았어요. 군에서 다친 인원들 상해보상 신청해주고 전역 절차 도와주는 일이었지요. 스트레스가 많았습니다. 몸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서류 작업에 지쳐갔고 그럴수록 조정에 더 끌렸어요. 2018년부터 시합에도 나갔지요.”
―세부 종목은?
“‘PR1 싱글’이라고 불러요. 장애인 조정은 신체 등급으로 나누는데, PR1 싱글은 가장 중증(重症)으로 허리 이하는 안 쓰고 팔 힘만으로 노를 저어야 해요. 혼자 탑니다. 작년에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를 땄어요.”
―초보자가 출전하자마자 우승하니 선수들이 놀랐겠네요.
“충격받아 조정을 그만두신 분이 몇 있어요. 하하하.”
―사고 이후 악몽을 꾸기도 하나요.
“초기에만 그랬고 지금은 괜찮아요. 장애인이 됐지만 정신적으로는 충분히 회복됐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어요.”
―전역하고 국가유공자 신청을 했는데 전상이 아닌 공상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의 신청을 했고 인정이 안 되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혔는데.
“보훈처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을 대우해주는 곳이잖아요. 상처를 받아 찾아온 사람에게 다시 상처를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해놓고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거니까. 전상이든 공상이든 대우는 월 5만원 차이예요. 누가 그 돈 더 받자고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이겠어요. 명예 회복을 위해 싸울 겁니다.”
―논란이 일자 대통령이 다행히 재검토를 지시했습니다만.
“(정색하며) 다행이 아니라 당연한 거죠. ‘지뢰는 어뢰와 다르다’(정진 보훈심사위원장)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예요. 천안함을 타격한 어뢰와 제 다리를 앗아간 지뢰는 물론 다른 무기입니다. 하지만 도발한 사실은 똑같잖아요. 그 어뢰나 지뢰나 ‘국적’은 북한이에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왜 부사관에 지원했을까. 4년 동안 뭘 한 거지’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군대에서 전투체육을 하다 다쳐 공상 판정을 받기도 합니다. 보훈처는 왜 공상이라고 봤을까요.
“저도 그게 너무 궁금해요. 담당자는 ‘북한 소행은 맞지만 다른 수색작전과 동일하게 봐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저는 ‘북한 소행은 맞지만’이라는 대목이 이해가 안 돼요. 북한 소행이면 적의 도발이고 그렇다면 전상이지 왜 공상입니까.”
―북한이 저지른 짓을 감추고 싶어서일 수도 있는데.
“왜 그걸 숨깁니까. 북한을 자극하고 싶지 않아서라면 말이 안 되죠. 국가유공자를 가지고 왜 정치를 하나요?”
지난 1월 경기도 파주 ‘평화의 발’ 앞에서 열린 전역식. 평화의 발은 목함지뢰로 다리를 잃은 하재헌(사진)·김정원 중사의 희생을 기리는 조형물이다./이진한 기자 |
조정은 균형이 중요한 스포츠
약간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이 GP와 지뢰를 철거하고 9·19 군사합의도 맺었다. 하재헌은 “그런 남북 관계 때문에 이번 일이 일어났다는 의심이 든다”고 했다.
―정치에 관심이 있었나요.
“전혀요. 그런데 이번 일을 당하고 보니 납득이 안 돼요. 저희가 DMZ 작전 들어갈 때 왜 실탄을 다 장전할까요. 멧돼지 잡으러 거기 들어가나요?”
―설마요.
“북한이 엄연히 적이기 때문입니다. 공격을 받을 수 있으니 그렇게 하는 거예요.”
―공상 판정 받고 ‘억울하다’며 국민청원(1주일 만에 2만여명 동의)을 올렸는데.
“답답해서 개인적으로 아는 천안함 생존자 형님과 김정원 중사에게 물어봤어요. 둘이 같은 말을 했습니다. ‘공상으로 끝나면 앞으로 전례가 될 거다.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두 다리의 값어치에 대한 문제겠지요.
“그럼요. 군인은 명예를 먹고 삽니다. 다리를 잃었지만 국가를 지켜냈다는 자부심, 저한테는 그거 하나 남았어요.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근거예요. 절대 빼앗기지 않을 겁니다.”
―환상통(幻想痛)이라는 게 있다면서요?
“다리가 없는데 발가락이 아프거나 간지럽다고 느껴요. 그럼 절단 부위를 주물러요. 진통제도 먹고요.”
―조정을 익히고 달라진 게 있다면.
“군대에서는 100 사이즈를 입었는데 상체만 이용해 타다 보니 덩치가 커졌어요. 이젠 110을 입지요. 조정은 출발선부터 결승선까지 균형이 가장 중요합니다. 좌우 밸런스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배 위에서 한계에 부딪히면 어떻게 극복하나요.
“하재헌과의 싸움이죠. 2㎞(약 10분 30초) 동안 모든 체력을 쏟아부어요. 정말 힘들 땐 이를 악물고 ‘이런 것쯤은 버틸 수 있다’는 주문을 외지요.”
―마라톤 선수에겐 ‘러너스하이(runner’s high)’라는 쾌감이 있다는데.
“저는 그 좋은 걸 못 느낀 채 경기가 끝나버려요(웃음).”
―가깝거나 먼 목표가 있는지요.
“이번 체전에서 1등 해야죠. 내년에 일본 도쿄 패럴림픽 출전이 가까운 목표입니다. 멀게는 2024년 프랑스 파리 패럴림픽에서 메달을 딸 거예요.”
―꿈 없이 방황하는 청년이 많은데 조언을 한다면.
“뭘 하고 싶은지 찾아야 해요. 이것저것 해봐야죠. 목표를 현실적으로 잡아야 하고요. 저도 조정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용기를 내세요.”
―며칠 뒤면 국군의 날입니다.
“건강이 제일이지요. 군에 계신 분들, 작전 나가시는 분들, 제 소식 듣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 풀릴 겁니다.”
―응원하는 국민이 많은데.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재헌은 잊어도 좋아요. 북한 소행이라는 것만 기억해주세요.”
인터뷰를 마치고 오후 훈련이 시작됐다. 조정 국가대표는 의족을 하나씩 벗고 배에 올랐다. 상체를 의자에 꽉 묶었다. 물 위에서는 표정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두 팔로 희망을 밀고 가는 사람처럼 그는 부지런히 노를 저었다.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가을날이었다.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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