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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표준계약서 정착 단계, 영화노조의 다음 걸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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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노동환경이 좋은 영화를 만든다 ②]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안병호 위원장 인터뷰

영화노조, 창립 전부터 임금체불 문제 제보 받고 구제 등 대응 나서

2012년 노사정 이행 협약 맺어 '표준근로계약' 필요성 끌어내

일한 만큼 임금 받고 노동시간 줄고 주휴일 고정… 실업급여 수령도 가능

탄력적 근로시간제라는 변수, 미조직된 노동자들, 이행 점검과 산업 안전 조처 미비는 숙제

CBS노컷뉴스 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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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촬영 중인 현장의 모습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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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 이 영화는 근로기준법을 바탕으로 한 표준근로계약서를 썼다는 이유로 더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표준근로계약서는 장시간 노동-저임금-임금 체불의 악순환을 겪던 영화 스태프들의 열악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은 끝에 도입돼 '정착되는 중'이다. CBS노컷뉴스는 '표준근로계약서'가 탄생해 자리 잡기까지를 돌아보고, 어떤 변화를 불러왔으며, 앞으로 더 어떤 것이 필요한지 살펴봤다. [편집자 주]

지난 2014년 2월에 개봉한 영화 '관능의 법칙'은 표준근로계약서(이하 표준계약서)를 선도적으로 도입한 상업영화로, 같은 해 12월에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은 제작비 100억 이상의 블록버스터 중에서는 첫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표준계약서가 업계에서 본격적으로 통용된 시기를 그때로 잡아도, 벌써 5년이 지났다.

잦은 임금 체불, 저임금, 충분한 휴식이 보장되지 않는 장시간 노동은 영화계의 오랜 문제였고, 이를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는 훨씬 더 전부터 있었다. 주에 며칠 혹은 하루에 몇 시간 일하는지, 최소한 얼마의 식사 시간과 휴식 시간이 주어지는지, 예상치 못한 각종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보호 장치는 존재하는지 등을 담은 표준계약서는 영화계 각 주체의 논의와 합의 끝에 하나의 제도로 명문화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노사정 이행 협약에 참여한 단체 수가 늘어난 것은, 그만큼 영화계 노동 환경 개선이 시급한 과제라는 것에 동의하고 힘을 보태는 이들이 늘어났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하고 때론 양보한 덕분에 표준계약서라는 제도가 차츰 정착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근로기준법을 바탕으로 한 표준근로계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발 빠르게 적극적으로 요구한 단체가 있다. 바로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위원장 안병호, 이하 영화노조)이다.

CBS노컷뉴스는 지난 5일 오전, 서울 충무로에 위치한 영화노조 사무실에서 안병호 위원장을 만나 표준계약서를 도입한 현재 상황, 남은 과제, 앞으로 준비 중인 것은 무엇인지 두루 물었다.

◇ 일한 만큼 돈을 받고, 제때 쉬며, 실업급여 쓸 수 있어

영화는 기획부터 개봉까지 적게는 수 개월, 길게는 수 년이 걸리는 작업이다. 시작과 끝이 있는 하나의 프로젝트로 여겨졌기에, 참여자들은 노동자라기보다 프리랜서로 취급받았다. 각 분야(제작·연출·촬영·조명·미술·분장·소품·의상·그립·동시녹음 등) 팀 단위로 맺는 턴키 계약이 관행이었고, 팀에게 배정된 금액을 팀원들끼리 나눠 갖는 구조였다.

제작사와 개별 노동자가 함께 쓰는 표준계약서는 가장 먼저 '노동의 값'을 계약금이 아닌 '임금'으로 바꾸었다. 영화노조 홈페이지에 게시된 '2017년 영화산업 노사 근로 표준계약서' 제6조를 보면 프리 프로덕션(사전 작업)-프로덕션(촬영 작업)-포스트 프로덕션(후반 작업)의 시간급과 통상 주급액(시간급X48)을 적는 란과 계좌번호란이 마련돼 있다.

임금은 "시간급, 통상 주급액, 시간 외 근로수당(연장근로수당, 야간근로수당, 휴일근로수당), 주휴일 및 유급휴일수당, 미사용 연차 휴가근로수당, 교육수당, 기타 임시로 지급되는 금품 등으로 구성된다"고 명시돼 있고, 수당이 어떤 기준으로 지급되는지도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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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오전, 서울 중구 충무로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안병호 위원장을 만났다. (사진=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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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호 위원장은 "그전에는 턴키 계약으로 하다 보니, 제작사는 '이 프로젝트가 얼마짜리니까 얼마를 떼어 줄 수 있어'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일하는 사람들도 나의 정확한 임금이 얼마인지 몰랐다. 운영하다 남는 돈을 나한테 주나, 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은 내가 일한 만큼 비례해서 임금이 계산된다는 거다. 법에 따라 연장 근로를 하면 초과 수당을 받고, 야간 촬영 때는 야간 수당을 받고, 휴일에 근로하면 휴일 수당을 받는다. 일한대로 임금이 커질 수 있다는 걸 (스태프들도) 경험했다"고 말했다.

'2018 영화 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스태프 825명 참여)에 따르면 최저임금 이상을 받는다는 응답은 2018년 90.1%였다. 같은 응답이 2014년 64.8%, 2016년 75.9%, 2017년 54.3%였던 것과 비교하면 큰 폭으로 오른 것이다.

직급별 임금도 과거보다 올랐다. 표준계약서를 쓴 영화가 개봉하기 시작한 2014년 감독급/기사 연봉은 2785만 원, 팀장(or 퍼스트)은 1728만 원, 세컨드는 1380만 원, 써드는 854만 원, 수습은 566만 원이었다. 4년 후인 2018년 감독급/기사 연봉은 5252만 원, 팀장(or 퍼스트)은 3153만 원, 세컨드는 2085만 원, 써드는 1607만 원, 수습은 923만 원이다.

가장 낮은 직급인 수습은 여전히 연봉 1천만 원이 안 되는 수준이긴 하지만, 2014년·2016년·2017년·2018년 조사 결과를 보면 직급과 무관하게 평균 수입은 올라가는 추세였다.

언제 쉴지('주휴일')도 미리 정한다. 안 위원장은 "상황에 따라서 근로자 대표와 합의해 주휴일 변경도 가능하지만, 변경하지 않고 일정을 진행하는 게 (양쪽 다) 더 수월한 면이 있다. 정해진 시간만큼 합리적으로 일하는 관성도 생기고. 그래서 저희는 주휴일 변경하지 않는 것, 이 부분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시간 노동은 줄었다. 영화노조가 '12 ON 12 OFF'(12시간 일하고 12시간 쉬자!) 캠페인을 시작했던 2015년 6월만 해도, '12시간 노동-12시간 휴식은 이처럼 소리쳐 주장해야 하는 것이었다. 표준계약서를 통해 근로기준법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퍼지면서 상황은 달라졌고, 특히 지난해 7월 1일 근로기준법 개정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영화 및 영상업이 근로기준법 제59조 '근로시간 및 휴게시간' 특례업종에서 빠졌고, '근로자 대표와 서면 합의'로 가능했던 주 40시간+연장 12시간+α의 연장근로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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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노조 사무실 앞에 붙어 있는 안내판 (사진=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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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위원장은 "12시간 이상 찍지 않고, 찍는다고 해도 스태프의 허락을 얻는다는 거다. 예전엔 감독이 '야, 찍어!'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찍었는데, 이제 현장 노동자 대표와 합의해야 한다. 이게 되면서 하루 20시간, 24시간 찍으며 밤새우던 일이 지금은 확 줄었다. 적어도 언제 끝날지 예상할 수 있게 됐고"라고 말했다.

안 위원장은 '4대 보험 가입'과 '실업급여 혜택'도 주요 성과로 들었다. '2018 영화 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4대 보험 가입률은 89.7%로 전년(86.5%)보다 3.2%포인트 올랐다.

그는 "예를 들어 미술팀은 프리 프로덕션 때부터 일하다 보니까 한 작품에 거의 8개월~1년 이상을 쓴다. 반드시 휴지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때 신청해서 실업급여 받으며 구직 활동을 할 수 있다"면서 "예전에는 (일이 없어서) 쉴 때 알바를 하거나 적게 쓰거나 갖고 있던 물건을 팔았다"면서 웃었다.

인식의 변화도 생겨났다. 과거 감독·기사급만을 '예술인' 혹은 '전문직'으로 보고, 스태프를 '거쳐 가는 것'으로 여겼던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안 위원장은 "스태프는 예술인이 되기 위한 과정에 있다고 본 거다. '조수 스태프'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필요하긴 하지만, 스태프라는 '과정'을 마쳐야 '예술인'이 될 수 있다는 식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지금은 스태프들도 꼭 필요한 롤이라는 걸 안다. 각 부서에서 할 일이 있고, 그걸 맡아서 하는 스태프들이 없으면 영화가 진행되지 않는다"며 "'근로기준법은 지켜야 한다'고 인식이 발전된 부분도 있다"고 부연했다.

◇ 표준계약서 쓴다고 끝이 아니다… 계속 주시해야 할 것들

영화계는 비교적 표준계약서가 정착됐다는 게 중론이지만, 아직 과제는 남아있다. 표준계약서를 쓰더라도 교묘한 조항이 포함돼 있다면 노동자들이 불이익을 볼 여지가 있다는 게 첫 번째다. 안 위원장은 가장 대표적인 예로 일부 사용자 단체가 주장한 '유연한 근로시간제'를 들었다.

안 위원장은 "특례 업종에서 영화업이 빠져서 노동시간이 단축되는 흐름에서, 정부가 갑자기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들고나왔다. 그러다 보니 몇몇 제작사 중심으로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포함해 '유연한 근로시간제를 넣을 수 있다'는 조항을 넣은 것이다. 저희가 확인해 그 내용을 빼고 계약한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영화노조는 한국영화 사측 교섭단(PGK-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한국영화제작가협회)과 진행한 '산업별 통일 교섭' 형태도 지난해부터 '제작사별 개별 교섭'으로 바꾸었다. 표준계약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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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촬영 중인 현장의 모습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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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측 교섭단에 위임하는 제작사 수가 지속해서 줄어든 점, PGK와 제협에서 '노조법상 사용자 단체 권한'을 갖기 위한 움직임이 더딘 점, PGK와 제협 구성원의 영화 제작 편수보다 비구성원의 제작사나 PGK-제협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제작사의 제작 편수가 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판단한 결과다.

안 위원장은 "사측 교섭단이 노조법에서 얘기하는 사용자 단체로 규율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서 (교섭 내용을 이행하게 할) 강제력이 부족하다. (사측 교섭단에) 위임한 제작사 중 작업을 안 하는 곳도 있어서, 작년부터 저희는 개별 제작사와 교섭을 시작해 현재 '연중 상시 교섭 중'이다"라고 밝혔다. 개별 제작사 간 직접 교섭의 이점은, 현장 스태프와 접촉면이 생긴다는 거다.

아직 표준계약서가 자리 잡지 못한 분야에 관한 언급도 빼놓지 않았다. 안 위원장은 "후반 작업 업체는 5인 미만의 영세 사업장이 많은데, 더 많은 일을 가져와야 회사가 유지되는 상황이고, 회사 대 제작사로 계약을 맺다 보니 '더 싸게' 이런 방향으로만 가서 출혈 경쟁이 일어나고 있다"며 "최근에는 영화인 신문고를 통해 후반 작업을 하시는 분들에게서 '권리 찾기' 움직임이 보인다. 회사에 소속된 분들이라 조직이 힘든 건 사실"이라고 전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노조'를 향한 부정적인 시선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도 '현재 진행형'이다. 영화계는 그나마 다른 분야보다 노조에 긍정적이라고 여겨지지만, 일부 제작사에서는 '노조 때문에 몇 년간 준비한 프로젝트가 방해받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강해 노조원을 스태프로 쓰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이 안 위원장의 설명이다.

안 위원장은 "스태프들은 계약을 해야 고용이 일어난 게 증명된다. 예를 들어 스태프가 계약서를 쓰기 전에 자기 권리 주장을 세게 해서 제작사와 마찰이 있다고 치면, 제작사는 '같이 일 못 하겠다'는 뜻을 감독급 스태프를 통해서 전달하게 한다. 그럼 기록이 남지 않으니까 부당해고를 증명할 게 없다"고 토로했다.

또 중요한 것은 '실제 이행 여부 확인'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도 실행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안 위원장은 "표준계약서를 쓰고 난 후 점검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작성 여부만 유선상으로 확인하는 정도여서, 실제로 잘 지켜지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저희도 조합원이 문제를 제기해야 현장 상황이 어떤지 비로소 알게 된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영화노조가 올해 집중하는 이슈는 '산업 안전'이다. 안 위원장은 "전 산업에서 '안전'이 이슈가 되고 있는데, 산재 처리를 비롯해 산업 안전에 대한 어떤 기준도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영화노조는 고용노동부 의뢰로 '영화산업 안전 가이드라인' 마련을 위한 실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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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호 위원장이 CBS노컷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안 위원장 뒤 왼쪽 상단에 '탄력근로제 개악저지'라고 쓰인 손팻말이 보인다. (사진=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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