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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식의 야구노트] '열정의 강속구' 박찬호와 '냉정의 변화구' 류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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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 12월. LA 다저스 입단을 앞둔 류현진(32)과 서울의 한 일식당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KBO리그 선수 출신 선수가 사상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하는 터라 즐거운 인터뷰가 이어졌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은 "류 선수가 갖지 못한 것 중 무엇을 가장 갖고 싶은가?"였다.

"스피드."

류현진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보통 이럴 때 선수들은 '적응'을 걱정한다. 그러나 그는 메이저리그 적응을 숙제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무기와 스타일을 믿었다. 다만 스피드를 욕심냈을 뿐이다.

빅리그 7번째 시즌을 맞는 류현진은 24일 현재 평균자책점 메이저리그 전체 1위(1.52)에 올라 있다. 시속 100마일(161㎞)의 강속구 던지는 투수들이 많고,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150㎞인 메이저리그에서 류현진은 '스피드 없이' 최고의 피칭을 하고 있다. 올 시즌 류현진의 포심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145.6㎞)이다.

류현진의 공은 빠르지 않다. 그러나 어느 투수의 공보다 강하다. 그 이유는 투구의 정확성과 효율성, 구종의 다양성과 유사성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국인 1호 메이저리거 박찬호(46)는 류현진의 피칭을 "대단한 배짱"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했다.

선수 시절 박찬호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정상급 스피드를 뿜어냈다. 그러나 그는 류현진과 김병현(40)의 심장을 부러워했다. 특히 류현진에 대해서 박찬호는 "빅리그에서 나보다 더 많은 승리를 기록할 투수"라고 했다.

박찬호는 아시아인 메이저리그 최다승(124승) 기록 보유자다. 박찬호가 미국에 간 때(21세)보다 여섯 살 늦은 나이에 빅리그에 입성한 류현진이 언젠가 124승 기록을 깰 것으로 기대한다. 류현진은 메이저리그 통산 46승을 기록 중이다.

20년 가까운 시간차를 두고 박찬호와 류현진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긍지와 환희를 주고 있다.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한국인 투수'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둘은 다른 점이 훨씬 더 많다. 그걸 비교하는 것이 박찬호의 피칭을 추억하며 류현진의 피칭을 즐기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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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올림픽 예선전에서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박찬호와 류현진.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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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강속구 #커브 #슬러브 #볼넷 #IMF #약물의 시대 #허리 부상

박찬호는 한양대 2학년을 중퇴하고 1994년 미국으로 떠났다. 시속 160㎞의 강속구를 던지는 한국인 유망주를 다저스가 알아본 것이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진출이었다.

박찬호는 탁월한 '원자재'였다. 강력한 패스트볼과 낙폭 큰 커브를 갖추고 있었다. 왼 다리를 높이 들어올렸다가 뻗는 '하이 키킹'이 인상적이었다. 94년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통산 17번째로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빅리그에 데뷔한 선수였다. 그러나 이내 마이너리그로 내려간 뒤 2년 동안 투구폼을 바꾸고, 미국 문화에 적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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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다저스 입단 후 박찬호의 투구폼. 하이 키킹 동작이 인상적이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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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풀타임 선발로 성장한 박찬호의 피칭은 불꽃 같았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체격(185㎝)이 작은 편이었던 박찬호는 거인들보다 더 빠른 공을 던졌다. 중력을 거슬러 솟아오르는 '라이징 패스트볼'이 비과학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야구 팬들은 박찬호의 공이 분명 떠오르는 걸 봤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IMF 구제금융 시절, 절망에 빠진 한국인들은 박찬호의 뜨거운 강속구를 보며 희망을 가졌다. 도전한다면, 포기하지 않는다면 한국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꾸었다. 박찬호의 경기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멈추고 TV 앞에 모였다. 이 장면은 흡사 60~70년대 김일의 프로레슬링을 보는 광경 같다고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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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는 마운드에 올라 심판과 관중에게 깍듯이 인사하는 걸로 유명했다. 미국인 시선에서는 아주 새로운 장면이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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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의 피칭 스타일도 한국인의 마음을 흔들었다. 마운드에 올라 심판에게 깍듯이 절을 하며 경기를 시작하는 것부터 그랬다. 경기 중 박찬호는 마치 전쟁을 치르는 군인 같았다. 그의 기합 소리가 그라운드에 크게 울려퍼졌다. 박찬호는 삼진을 잡으면 환호했고, 홈런을 맞으면 괴로워 했다. 팬들은 그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꼈다.

박찬호는 제구력이 썩 좋은 투수가 아니었다. 메이저리그 17년 동안 1993이닝을 던지며 1715삼진/910볼넷을 기록했다. 잘 던지다가도 볼넷을 내줄 때면 박찬호는 모자를 벗고 땀을 닦았다. 그리고 힘겨운 숨을 토해냈다. 그의 사투를 보는 팬들도 손에 땀을 쥐었다.

2002년 텍사스 이적 전·후로 박찬호는 허리와 햄스트링 부상에 시달렸다. 그 여파로 그의 구종에도 변화가 생겼다. 커브와 슬라이더의 중간 형태인 '슬러브'를 던지기도 했고, 투심패스트볼도 배웠다. 팬들도 박찬호의 여정을 따라 야구를 배우던 시절이었다.

박찬호에게는 문화·언어의 장벽도 상당히 높았다. 김치를 먹은 다음날 땀을 흘리면 마늘 냄새가 배어나왔다. 이 냄새를 싫어하는 동료와 박찬호가 다투기도 했다. 동료들 눈치를 보느라 가족이 싸준 도시락을 열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야구장 밖에서도 전쟁은 쉬지 않았다.

박찬호는 2010년 10월 4일 마지막 등판 경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했다. 나이와 경력을 보면 진작 은퇴 생활을 즐길법 했지만 그는 플로리다 원정경기에서 "얍"하는 기합소리를 계속 내질렀다. 사력을 다해 구원 3이닝 무안타 무실점을 기록했다. 이날 박찬호는 노모 히데오의 아시아 투수 최다승(123승)을 경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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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는 전쟁에 나간 군인처럼 싸웠다. 그의 피칭은 가슴을 뜨겁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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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는 "내 평균자책점, 탈삼진 기록이 노모에 미치지 못하더라. 딱 하나, 승리는 내가 노력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은퇴 전에 꼭 그걸 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끝까지 목표를 정해 달렸던 그의 마지막도 투사 같았다.

박찬호의 전성기는 빅리그 선수들이 경기력 향상을 위해 금지약물을 복용했던 시기였다는 게 훗날 밝혀졌다. 약물의 도움 없이 약물에 취한 선수들을 상대한 박찬호의 업적은 더욱 큰 가치를 갖고 있다.

2011년 일본 오릭스를 거쳐 2012년 박찬호가 선수 생활 종착지로 선택한 팀은 고향팀 한화 이글스였다. 국가대표팀에서 여러 번 류현진을 봐왔던 박찬호는 "한화 이글스에서는 내가 아니라 류현진이 대장"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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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은 지난해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 1차전 선발로 나섰다. 그리고 올해는 박찬호에 이어 18년 만에 개막전 선발로 등판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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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 #제구력 #체인지업 #커터 #무볼넷 #저성장 #100마일 시대 #어깨 수술

류현진은 2012년 취재진에게 "메이저리그에 꼭 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평소 그답지 않게 아주 강한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이번에도 다저스가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박찬호와 달리 KBO리그에서 7년 동안 검증받은 '완제품' 류현진을 수입(6년 3600만 달러·430억원)했다.

류현진은 한화 시절의 자신의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했다. 2013년 스프링캠프 러닝 훈련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었다고, 그리고 꼴찌로 들어왔다고 미국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햄버거를 끊겠다고 했는데 담배도 끊어야 할 것"이라는 기자의 조롱도 있었다.

류현진이 불펜피칭을 하지 않는 건 미국인 눈에는 상당히 이상한 일이었다. 선발 투수는 등판일 사이에 한 번씩 불펜 마운드에 올라 던진다. 구위를 점검하고 제구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그러나 류현진은 한국에서부터 불펜피칭을 하지 않았다. 제구에 자신 있으니 에너지를 아끼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러 우려와 비판이 있었지만 류현진은 식성도 훈련법도 자신의 루틴대로 했다. 그리고 직구와 체인지업 투 피치만으로 2013년과 2014년 연속으로 14승을 거뒀다. 2014년 클레이턴 커쇼는 "류현진은 자다 일어나서 바로 공을 던져도 스트라이크를 던진다"고 말했다. 얼마 전 데이브 로버츠 감독은 "제구가 되면 류현진은 달에서도 잘 던질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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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의 승리를 축하하는 클레이턴 커쇼. 이제 류현진이 에이스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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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이 빠르지 않는 공으로도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의 성적을 올리는 건 냉정함과 안정성 덕분이다. 올 시즌 9경기에서 59와3분의1이닝을 던진 류현진은 볼넷을 4개밖에 내주지 않았다. 삼진/볼넷 비율은 14.75(59삼진/4볼넷)로 메이저리그 전체 선수 1위다.

류현진은 초구 스트라이크를 자신있게 찔러 넣어 볼카운트 주도권을 잡는다. 혹시 불리해지더라도 스크라이크존 가운데를 향해 과감하게 승부한다. "볼넷을 주느니 차라리 홈런 맞는 게 낫다"는 말이 류현진의 신념이다. 실제로 류현진은 안타나 홈런 맞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결과다.

지금 야구 팬들은 각자의 미디어(모바일)를 통해 류현진을 응원한다. 박찬호 피칭과 달리 냉정하고 정확한 류현진의 피칭에 감탄한다. 그의 투구가 위력적인 이유는 직구와 체인지업과 커터를 모두 완벽에 가깝게 구사, 타자를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팬들은 이제 '라이징 패스트볼'을 믿지 않는다. 대신 다양하고 데이터를 통해 류현진이 얼마나 멋진 투구를 하는지 평가한다. 류현진 투구의 회전수와 회전축, 수평·수직 이동, 익스텐션 등을 분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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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다저스 류현진은 아주 부드러우면서 폭발적인 피칭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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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도 부상을 피해가지 못했다. 2015년 왼 어깨 수술을 받았을 때 예전 기량을 회복할 확률이 10% 미만이라고 했다. 그러나 류현진도 박찬호처럼 일어났다. 재활기간 추가한 커터와 커브는 류현진을 훨씬 완성도 높은 투수로 만들었다.

팬들은 류현진의 피칭을 아주 편안하게 감상하고 있다. 그가 1회 시속 140㎞ 직구를 던져도, 3볼-0스트라이크에 몰려도 걱정하지 않는다. 류현진이 결국 극복해 낼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자신의 방법으로 싸워 이기는 모습을 여러 번 봤기 때문이다.

저성장 늪에 빠진,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한국에서 류현진의 피칭은 2019년의 희망처럼 보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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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10승 달성에 실패한 류현진을 박찬호가 위로하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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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은 오는 26일 오전 8시15분(한국시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의 PNC 파크에서 열리는 피츠버그와의 원정경기에 선발 등판한다. 승리투수가 된다면 올 시즌 10번째 등판에서 7승(1패) 고지에 오른다. 류현진은 박찬호의 시즌 최다승(2000년 18승)을 너머 20승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다.

최근 31이닝 연속 무실점(다저스 역사상 11위) 호투를 기록 중인 류현진이 피츠버그전에서 3이닝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면 박찬호가 갖고 있는 한국인 메이저리그 연속 무실점(33이닝) 기록을 경신한다. 박찬호는 다저스 시절이었던 2000년 9월 20일 애리조나전부터 이듬해 2001년 4월8일 샌프란시스코전까지 무실점을 기록한 바 있다.

긴 세월을 사이에 두고 둘은 서로 경쟁하며, 응원하고 있다. 박찬호가 걸어온 길은 류현진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박찬호의 열정적 피칭, 류현진의 냉정한 투구를 감상하는 것, 그리고 둘의 과거와 현재·미래를 함께하는 것은 이 시대 야구팬들에게 더없는 즐거움이다.

김식 야구팀장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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