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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김창호에게 산은 무엇이었을까, 질문은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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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고 김창호 대장, 임일진, 유영직, 이재훈, 정준모를 기리며


한겨레

유영직씨.카트만두포스트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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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영준

사람들은 ‘왜 산에 가는가’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 이건 마치 ‘왜 사는가’라고 묻는 것 같아서 누구라도 대답이 곤궁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임마누엘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이 ‘왜’라는 질문은 성립될 수 없는 인과율의 모순을 지니고 있다. 질문에 앞서 나의 발걸음은 이미 산을 오르고 있으며, 나는 왜 사는가를 궁금해하기 전에 이미 세상에 태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보다 ‘어떻게’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어떻게 산을 오를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공교롭게도 나는 네팔 구르자히말에서 숨진 5명을 모두 알고 지내온 사람 중의 하나다. 장례 준비를 하며 영정사진을 찾기 위해 오래된 외장하드를 뒤지다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근 20여년 함께 산을 오르며 찍어놓은 그들의 사진 대부분은 뒷모습이었던 것. 그들은 늘 내 앞에 있었고, 먼저 로프를 묶고 앞장서 벽을 올랐기에 나는 그 뒤에 대고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 이미 간 길을 뒤따르지 않는 것, 그것이 그들이 선택한 ‘어떻게’에 대한 대답이었다.

사고 이후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터진 봇물처럼 기사를 쏟아냈다. 김창호 대장을 설명하는 기사에는 ‘8000미터 14좌를 무산소로 오른’이라는 수사가 가장 많았다. 대중의 관심이 늘 이런 데에 있는 것인지, 언론이 부나방처럼 실시간 검색어를 좇아 떠도는 것인지, 세상 일들이 순위와 잣대, 환금가치로 평가되듯 우리 사회에서 산에 오르는 이들이란 늘 높이와 숫자로만 설명되어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장 김창호가 가장 경멸했던 그것, 과정을 들여다보지 않는 성과주의, ‘어떻게’를 고민하지 않는 결과로만 포장된 채 그들은 어김없이 나타난 황색저널리즘에 마지막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한겨레

김창호 산악대장(왼쪽 두번째)을 포함한 '2018 코리안웨이 구르자히말 원정대' 한국인 대원들이 12일 네팔의 히말라야 산악지대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왼쪽부터 원정에 참가한 임일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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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일진은 영화 <알피니스트>를 만들며 처음 그 제목을 ‘너희의 산은 거짓이다’라고 지었었다. 그는 만년설산의 고봉에 올라 태극기와 후원사기를 들고 의지와 열정의 투혼을 만방에 떨친 용맹한 산악인으로 포장되는, 모두가 알고 있으나 아무도 이야기하지 못한 미디어에 비친 산악인들의 이면을 단 한마디라도 외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스스로 아웃사이더로 남았고 늘 변방을 서성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히말라야의 변두리까지 찾아갔다.

유영직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으나 누구도 우리 팀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 자유로움으로 살았다. 오른손 집게손가락 한 마디가 잘려 없었던 그를 보며 나는 자유를 먹고 살았던 그리스인 조르바를 떠올리곤 했다. 독신으로 살던 그의 빈 방에는 이제 헌 옷가지 몇 개 남아있을 뿐.

젊은 날 인도 난다데비와 네팔 안나푸르나4봉을 등반하며 히말라야의 꿈을 키웠던 정준모는 사업가로 일상의 산을 오르면서도 늘 크고 높은 곳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래서 후배들이 무언가에 엄두를 내는 것을 응원하고, 함께 하고자 했으며 그들의 오름짓을 통해 자신을 투영하고자 했다.

막내 이재훈은 선배들의 이런 디엔에이(DNA)를 닮아가던 중이었다. 출국 전 만난 자리에서 나는 그에게 최근 번역해 낸 히말라야 역사서 한권을 선물했는데 거기엔 대장 김창호의 추천사가 이렇게 적혀있다.

‘등산은 스스로 선택한 길, 절망의 벼랑 끝에 매달려 부르는 희망의 노래다… 세계 산악계에서 불가능에 뛰어들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한 미친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스토리, 그 얘기와 각각의 사진들에서 들려오는 메시지는 아름다운 사이렌의 노랫소리가 되어 산악 후세대를 유혹한다.’

쏟아져 나오는 뉴스는 이제 하루가 지나면 더 이상 뉴스가 아닐 것이며 대중들의 기억에는 이 다섯의 이름이 금세 잊혀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왜 거기에 갔는지 궁금하지 않다. 그리고 왜 유래 없는 돌풍이 불었고 그들이 왜 돌아오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도.

한겨레

김창호 대장


다만 그들이 가려했던 길이 어떠했는지 그들은 어떻게 거기서 살아 내려와 다시 또 구르자히말보다도 높고 험한 일상의 산을 오르려했는지, 어떻게 자신들의 의지와 신념을 세상에 전하려 했는지, 그들의 ‘실현할 수 있는 산’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움푹 패인 물음표로 남아 평생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해답을 찾으러 누군가는 또 사이렌의 노래처럼 바람 부는 산을 오를 것이고 아무 것도 없는 텅빈 정상에 설 것이다.

<마운틴저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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