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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는 오늘도 시댁에 ‘사표’를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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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웹툰·영화·책 등 잇단 조명

둘째 출산 직전 "셋째는 언제" 물어

'B급며느리' ‘며느라기’ 신조어도

고부갈등 넘어 남녀평등에 무게

2018 키워드로 떠오른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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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며느리’에 3개월 차 새댁 민지영. [사진 MBC]


며느리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시댁과 갈등 때문에 힘들다고 단순히 토로하는 수준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직접 한 번 보라고 권하는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당사자 한쪽의 말을 듣는 것보다 양쪽의 모습을 동시에 지켜보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다.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면 문제의 실체가 더 잘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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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며느리’에 만삭의 임산부 박세미 등 며느리의 고충이 드러난다. [사진 MBC]


12일 첫 방송한 MBC 교양프로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에 대한 뜨거운 반응도 이 때문이다. 3부작 파일럿으로 만들어진 이 프로의 포맷은 단순하다. 부부 세 쌍을 관찰 카메라 형식으로 지켜보고, 패널들은 스튜디오에서 이를 보며 얘기를 나눈다. 시청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첫 시댁 방문에 “예쁘게 하고 오라”는 신신당부에 미용실까지 들렀다가 가는 배우 민지영, 남편이 출장 간 사이 만삭의 몸으로 홀로 시댁에 가서 전을 부치며 “셋째는 언제 낳을 거냐”소리를 듣는 승무원 출신 박세미, 시어머니와 함께 식당을 운영하며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맞대야 하는 워킹맘 김단빈 등등. 출연자들은 ‘아들의 부인’이라는 동등한 가족 구성원인데도 일상적이고 동시다발적으로 폭력적인 경험에 시달리는 모습이 드러났다. 패널로 참여한 김지윤 좋은연애연구소 소장은 술상 앞에 둘러앉은 남성, 부엌을 떠나지 못하는 여성을 보고는 “전형적으로 여성은 과대기능, 남성은 과소기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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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극장가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B급 며느리’. [에스와이코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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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의 제작에는 지난해 페이스북·인스타그램에 연재를 시작해 올초 책으로도 나온 웹툰 ‘며느라기’와 신세대 며느리의 적나라한 고부갈등 극복기를 담아 올초 극장가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B급 며느리’(감독 선호빈)가 큰 영향을 미쳤다. 박지아 PD는 “26세 여자 후배가 추천해줘서 웹툰을 봤는데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젊은 여성이 맞벌이 직장인인 며느리 심경을 다룬 만화에 공감하는 게 놀라웠단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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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며느라기’의 명대사.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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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며느라기’라는 단어가 널리 쓰였으면 좋겠다”는 수신지 작가의 바람대로다. 작가는 ‘며느라기’를 사춘기·갱년기처럼 며느리가 되면 겪게 되는, 시댁에 예쁨 받고 칭찬 받고 싶어하는 시기로 정의한다. 웹툰 주인공 민사린은 시어머니가 시집살이를 독하게 시키지 않아도, 회사일 못지않게 시댁에서도 완벽한 며느리가 되고 싶어 스스로를 다그칠수록 스트레스가 커진다. 누군가는 1~2년이면 지나가지만, 누군가는 평생이 될 수도 있는 이런 기간 동안 겪는 복잡미묘한 기분과 상황이 예리하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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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며느라기’의 명대사.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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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백 MBC 콘텐츠협력 2부장은 선호빈 감독과 아내 김진영씨 부부의 실제 경험이 담긴 ‘B급 며느리’에 공감을 표했다. 이 부장은 “평범한 가족처럼 보여도 일상을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함께 생각해볼 문제가 쏟아져 나온다”며 “지난 몇십년간 고부갈등을 다루는 프로그램은 수백편이 있었지만, 며느리가 중심이 된 적은 없었다. 한국 사회의 가족관계에 얽힌 서열과 남녀평등 등 다양한 문제를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에 등장한 민지영의 남편인 쇼호스트 김형균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때는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몰랐다. 남편과 아들로서 중간 매개체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나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출연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아내 박세미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개그맨 김재욱에게 방송 직후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이는 특정 사람이 아닌 구조의 문제”라며 온라인 등에 토론이 이어지는 모양새도 긍정적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다양한 콘텐트에서 며느리라는 단어가 천편일률적으로 묘사되지 않는 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다”며 “새로운 유형이 등장할 때마다 대중이 이를 바라보고 인지하는 시각도 변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생활형 페미니즘은 2016년 11월 출간된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70만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 한층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전업주부였던 김영주씨가 이혼 선언 이후 변화상을 담은 『며느리 사표』, 기자 출신 최윤아씨가 퇴사 후 돈 벌지 않고 살아본 경험을 쓴 『남편은 내가 집에서 논다고 말했다』등 자기고백적 에세이 출간이 이어지며 더욱 다양한 층위의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며느리 사표』의 작가 김영주(53)씨는 “지금은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있지만 우리 때는 며느리로서 고충을 함께 나눌 공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삶도 있구나 하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며 “그것이 답안이 될 순 없지만 거기서 힌트를 얻은 여성이 행복해야 가족이 행복하고, 사회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 아들이 “나도 나중에 결혼할 때 ‘며느리 사표’부터 쓰게 할 거야”라고 하는 바람에 반가우면서도 멍했다고 고백했다. 언젠가 자신도 며느리 입장이 아닌 시어머니 입장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미국에서 시작돼 한국으로 이어진 ‘미투’ 운동이나 대중문화에서 확산되고 있는 페미니즘 열풍의 근본적인 이유는 같다. 변화하고 있는 여성의 역할과 지위에 따라 그에 맞는 이해방식과 체제가 재정립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구 교수는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세대나 1인가구 증가 등 사회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생활 속 학습을 통한 실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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