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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근혜 ‘인혁당 두개의 판결’ 발언 논란
인혁당 사형집행 입회한 박정일 목사
1975년 군종참모때 현장 차출
8명중 누구도 기도요청 안했다
나는 새누리당 지지자지만
피해자들 애국자라 생각해
박후보, 유가족에 사과해야
1975년 4월8일 오후 5시 육군 제1교도소 군종실장 박 목사는 “본부로 올라오라”는 교도소장의 연락을 받았다. “내일 사형에 종교 담당으로 참관하게 됐다. 비밀 유지 때문에 육군교도소 인원이 차출됐다. 집에도 알려서는 안 된다”고 교도소장은 말했다.
새벽 4시30분 흰색 죄수복을 입은 첫번째 사형수가 들어왔다. 백열등이 환하게 켜진 방안으로 들어온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주위를 둘러본 그가 물었다. 법무관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사형을 집행한다는 판결문을 읽고 유언을 물었다.
“난 억울해. 하지만 언젠간 모든 일이 밝혀질 거요.” 사형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집행관은 사형수의 머리에 검은 복면을 씌웠다. 목에 밧줄도 감았다. 잠시 뒤 버튼을 누르자 사형수 발밑의 송판이 열렸다. 군의관이 다가가 숨진 것을 확인하고 주검을 치웠다. “한 사람당 30분씩 걸렸다”고 박 목사는 회고했다.
뒤이어 들어온 사형수들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기도를 요청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도 답하는 사형수는 없었다. 박 목사 역시 사형수들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저도 너무 긴장해서…. 마음속으로만 기도했지요.”
그 가운데서도 박 목사는 이수병씨를 잊지 못한다. “나는 유신체제에 반대한 것밖에 없고,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한 것밖에 없는데 왜 억울하게 죽어야 되느냐! 반드시 우리의 이번 억울한 희생은 정의가 밝힐 것이다!” 그렇게 외친 이씨가 교수대에 올라가는 모습을 박 목사는 뇌리에 새겼다.
8명의 사형집행이 끝난 아침 8시, 밖으로 나온 박 목사는 흰 봉투를 받았다. 특별근무수당으로 3만원이 들어 있었다. “죄책감이랄까…. 이런 일을 하고서 이런 걸 받아야 하는가 갈등을 느꼈죠.” 구치소 정문에서 유가족들이 거칠게 항의하고 있었다. 박 목사를 태운 지프차는 흐느끼는 유가족을 지나 구치소를 빠져나왔다. “그 뒤로 저는 사형제 반대론자가 됐지요.” 박 목사가 말했다.
15년간 군 복무한 박 목사는 1984년 소령으로 전역했다. “오랜 군 생활을 한 만큼 나는 보수층에 속해 있으며 새누리당 지지자”라고 스스로 소개했지만, 당시 형장에서 스러져간 이들에 대한 각별함을 박 목사는 간직하고 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들 역시 애국자입니다. 사건의 모든 책임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있습니다. 유신 독재는 잘못한 것입니다.”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의 인혁당 판결 관련 발언에 대해 박 목사는 한마디 했다. “일국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사람이면 진심으로 유가족에게 사과한다고 말해서 모두를 아우르고 상처를 싸매줘야 하는데,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안 됩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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