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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0.02%…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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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찾아오지 않는다,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꼴찌였던 레스터 시티, 프리미어리그 우승

- 돈으로 이기는 세상? 아니더라

선수단 총 연봉은 맨유의 4분의 1… 0.02% 우승확률을 현실로 만들어

- 우승 뒤엔 '라바마 삼총사'

루저라고 조롱받던 라니에리 감독, 라커룸서 록음악 '파이어' 틀고

선수들 마음속의 불꽃 피워내… 바디·마레즈 등 설움 딛고 펄펄

- 지금 영국은 레스터 신드롬

빵·커피·옷에 레스터 색깔 푸른색

노동절 휴일이었던 2일(현지 시각) 저녁 영국 레스터(Leicester) 시민들의 눈은 일제히 TV를 향했다. 화면에선 토트넘과 첼시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36라운드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레스터 시티가 이날 리그 우승의 영광을 안기 위해선 2위 토트넘이 첼시와 비기거나 패해야 했다.

토트넘은 해리 케인과 손흥민의 연속 골로 전반을 2―0으로 앞섰다. 첼시는 후반 13분 팀 케이힐이 한 골을 만회했다. 레스터 시티 팬들이 간절히 첼시의 동점골을 바라던 후반 38분 에덴 아자르가 오른발로 감아 찬 슈팅이 그림처럼 골망에 꽂혔다. 그 순간 잉글랜드 중부의 인구 30만 도시 레스터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2대2로 경기가 끝나면서 레스터 시티는 1884년 창단 이후 132년 만에 정상에 등극했다. 꼬마 팬부터 80대 노인까지 모든 레스터 시티 팬이 처음 맛보는 1부 리그 우승의 감격이었다.

지난 시즌 꼴찌를 달리다 1부 리그에 간신히 턱걸이한 레스터 시티의 올 시즌 목표는 프리미어리그 잔류였다. 팀이 선수들에 지급하는 총연봉은 800억원으로 첼시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4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는 팀이 가질 수 있는 현실적 목표였다. 레스터 시티 주전 라인업 11명의 이적료(팀 끼리 주고받는 돈)총합(400억원)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2009년 레알 마드리드로 갈때 기록한 이적료 (1300억원)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클라우디오 라니에리(65·이탈리아) 감독은 "다른 팀이 수영장을 갖춘 빌라에 산다면 우리는 지하실에 산다"고 했다.

하지만 레스터 시티는 거짓말처럼 초반부터 치고 나가더니 23라운드부터는 계속 선두를 유지하다 우승을 확정했다. 자본이 넘치는 프리미어리그에서 '흙수저' 팀이 보여준 반란에 세계 팬들은 열광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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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터 시티 우승의 주역으로 이른바 '라·바·마(라니에리·바디·마레즈)' 3총사가 손꼽힌다. 올 시즌을 앞두고 레스터 시티의 지휘봉을 잡은 라니에리는 감독 인생 30년 만에 15번째 팀에서 처음 1부 리그 우승의 감격을 맛봤다. 그는 첼시와 인터밀란, AS로마, 유벤투스 등 수많은 명문 클럽을 이끌었지만 정상 정복에는 실패했다. '우승 청부사'로 불리는 주제 무리뉴 전 감독은 라니에리를 '루저'(패배자)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라니에리는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가장 효율적인 길을 찾았다. 그는 "레스터 시티는 포레스트 검프 같은 팀"이라고 했다. 쉬지 않고 뛰는 영화 주인공 검프처럼 많이 뛰고 헌신적인 선수들을 중용해 수비를 안정시켰고, 긴 패스로 한 방의 역습을 노리는 작전을 썼다. 그는 성공하고 싶은 선수들의 열정을 깨우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리그 첫 경기 때는 라커룸에서 록밴드 카사비안의 '파이어'를 틀었다. 훈련 시작 때는 선수들에게 종소리를 뜻하는 "딜리딩 딜리동(dilly-ding, dilly-dong)"이란 말을 마음속으로 외치게 했다고 한다. 라니에리는 "선수들이 마음속으로 종을 울리며 내면에서 타오르는 불을 찾길 원했다"고 했다. 이런 조련 속에 올 시즌 22골을 기록하며 불을 뿜은 선수가 제이미 바디(29·잉글랜드)였다. 동료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토트넘-첼시전을 관전한 바디는 "프리미어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게 된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프랑스 7부 리그에서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한 리야드 마레즈(25)도 레스터 시티에서 팔자가 바뀌었다. 2014년 이적료 7억원에 레스터 시티로 온 그는 올 시즌 17골 11도움을 기록하며 불과 2년 만에 빅 클럽들이 500억원이 넘는 이적료를 앞세워 러브콜을 보내는 스타가 됐다.

맨유 유스 출신이지만 1군 데뷔를 하지 못하고 맨유를 떠났던 미드필더 대니얼 드링크워터는 레스터 시티에서의 활약으로 잉글랜드 대표팀에 승선했다. 전설적인 골키퍼 피터 슈마이켈의 아들인 캐스퍼 슈마이켈은 골문을 든든히 지키며 비로소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적 같은 우승에 각계의 찬사가 쏟아졌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트위터를 통해 '정말 놀랍고 가치 있는 우승'이라고 했고, 팝 스타이자 토트넘 팬인 아델은 '역대 최고의 스토리'라고 썼다. 북아일랜드의 골프 스타 로리 매킬로이는 '북아일랜드의 유로 2016 우승 확률은 1/500이다. 참고로 레스터 시티의 우승 확률은 1/5000이었다'는 글을 남겼다.

[장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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