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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더 나은 미래] "나와 비슷한 아이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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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비전 64년… 3명의 시대적 증인 이야기를 듣다

최초의 월드비전 결연 수혜자였어요

미국서 공부할 때 1000달러때문에 도중 하차할 뻔

그때 월드비전이 보내준 1000달러 수표, 평생 빚으로

전쟁의 포성이 울려퍼지던 1950년, 월드비전의 창립자 고(故) 밥 피어스(Bob Pierce) 목사는 종군기자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가혹한 시대, 밥 피어스 목사는 "고독과 절망 속에서 도움을 찾아 창백한 손을 뻗는 전쟁 고아들을 돕겠다"고 결심했다. 월드비전 탄생의 역사적 순간이다.

그 후 64년. 한국은 도움을 받는 국가에서 도움의 손길을 전하는 공여국(供與國)으로 성장했다. 월드비전을 통해 나눔을 실천하는 후원자도 53만 명을 넘어섰다. 더나은미래는 3명의 시대적 증인을 통해, 월드비전을 통한 나눔의 선순환 이야기를 들어봤다. / 편집자

조선일보

◇절박한 삶의 순간마다 함께 해준 월드비전

"1950년대 동두천은 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됐죠. 집들은 미군 부대에서 버린 폐 나무 박스를 부숴서 얼추 형태만 만든 것이었고, 교실이 없어 수십 명이 운동장에서 수업을 받았습니다."

오성삼(68) 인천송도고 교장이 입을 열었다.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장과 전국교육대학원장협의회장을 역임한 오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친을 잃은 뒤 안흥보육원에서 생활했다.

"제가 최초의 월드비전 결연 수혜자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구스타프 부부라는 분들로부터 노트나 연필 등의 선물과 편지를 받곤 했습니다. 미국 유학 때 상봉을 했는데,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나요. 저처럼 그 분들도 제 편지들을 차곡차곡 정리해두셨더군요."

오 교장은 '피어스 장학금'을 받아 대학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또 영양부족으로 늑막염을 앓았을 때는 월드비전 아동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1985년 미국 유학 시절이에요. 등록금 면제를 받으며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갑자기 법이 바뀌어 1000달러를 내야 했어요. 월드비전 본부에 편지를 썼죠. '징검다리를 놔주십시오, 훗날 한국에 돌아가면 반드시 갚겠습니다'라고. 월드비전이 1000달러 수표를 보내줬어요." 오씨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마음의 빚으로 여기고 살아간다"고 말했다.

유학을 마친 뒤 교직 생활을 시작한 오씨는 1995년 월드비전에 7000달러를 기부한 것을 시작으로 13명 아동을 정기후원하고 있다. 재직 중인 인천송도고등학교는 학생회와의 협의를 통해 '한 학급당 한 명의 아동과 결연 맺기'를 도입, 총 40개 학급이 매달 3만원씩 정기후원을 진행한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는 단어가 있어요. 물을 마실 때마다 물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하라는 뜻이죠. 저희가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것들을 돌려주기 위해 제3세계에 대한 관심과 후원을 더욱 많이 가졌으면 하는 것이 작은 바람입니다."

조선일보

한평생 저를 도와준 미국 부모님을 얻은 것도

옛 월드비전 선명회 합창단원일 때입니다

'내가 아버지한테 받은 건 나눔의 씨앗이었구나' 깨달아

◇삶의 여정 함께해 준 '미국 아버지', 나눔의 씨앗 심어줘

"1960년에 전쟁 고아 40여명으로 합창단이 꾸려졌어요.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부터 캐나다, 유럽, 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온 세계를 돌며 노래했지요. 한평생 저를 도와준 '미국 부모님'을 얻은 것도, 그 선명회(옛 월드비전) 합창단 미국 공연 때입니다." 오지영(61)씨가 말문을 열었다.

"공연을 마친 후, 캐씨(Kathy)라는 또래 아이가 오더니 내 손을 잡아끌고 자기 아버지한테 데리고 갔어요. 그 분이 나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내 아버지가 되어주겠다고 하셨어요."

전쟁이 끝날 무렵, 핏덩이 채로 거리에 버려져 대구 성락원 시설에서 생활해왔던 오씨는 "세상 어디에도 내 혈육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무서울 때가 많았다"고 했다. "미래가 늘 두려웠죠. 그런데 어느 날 '가족'이 생긴 거예요."

맺어진 인연은 평생 계속됐다. 월드비전 미국지부에서 근무했던 양아버지가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고, 미국 집에도 초대됐다.

"부모님은 몇번이나 미국에서 같이 살자고 했는데, 그땐 내가 너무 내성적이었어요."

쑥스럽고 멋쩍은 마음, 감사한 마음, 다 표현해내지 못한 마음들은 편지에 담겼다. '보내주신 돈으로 아주 예쁜 스웨터를 샀어요', '저희 나라엔 봄이 왔어요. 아버지도 봄을 좋아하셔요?', 바다 건너에서 온 어린 소녀의 '수다스런' 편지에, 미국 아버지는 매번 '사랑한다'며 마음 가득한 답장을 전해왔다.

39세, 젊은 나이에 오씨의 아버지가 되어준 핸리 카크씨의 나이는 올해로 89세. 9세이었던 소녀는 그사이 바다 건너 또 다른 아이들의 엄마가 됐다. 베트남, 인도, 에티오피아까지 1999년부터 후원하기 시작한 아이들만 4명. 베트남에서 입양한 '첫 딸'은 그새 성인으로 성장했고, 12년간 후원해 온 인도의 '둘째 딸'도 어엿한 숙녀로 성장해 곧 후원이 종결된다.

"몇년 전 제가 후원했던 아이를 직접 만난 후 깨닫게 됐어요. 아, 내가 아버지한테 받은 건 나눔의 씨앗이었구나. 앞으로 내가 받은 사랑 이상으로 나누고 갈겁니다."

길러준 어머니 뒤엔 후원해준 푸른 눈 아버지

제가 돕는 아이들도 엇나가지 않고 잘 커서

다시 누군가를 돕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와 비슷한아이들에게 '희망의 증거' 되고파

"제가 후원하는 아이들 편지를 받으면, 꼭 그 나이 때의 내가 생각납니다. 만나게 된다면 내 얘기를 해주고 싶어요. 나도 그런 과정을 다 거쳐왔다고. 네 마음을 이해한다고. 너는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요."

배효동(63·전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씨는 3세 때 부모를 잃고 둘째형과 함께 대구 희락원(지금의 경북유치원)에 맡겨졌다. "100여명 아이들이 함께 생활했어요. 희락원 어머니께서 사랑으로 키워주셨죠. 그렇지만 동시에 지독하게 가난했던 시절이었어요. 모두가 늘 배고팠습니다."

그를 '길러준 어머니' 뒤엔 '후원해준 아버지'가 있었다.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지원해준 것도, 해마다 생일과 크리스마스 선물을 챙겨준 것도, 바다 건너 살고 있다는 '푸른 눈 아버지'밥 피어스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밥 피어스 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났어요. 다가갔더니 꼭 안아주시는데 수염이 까슬까슬했어요. 아주 따뜻했던 기억이 납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엔, 둘째 형이 부모의 자리를 메웠다. 한 명 있던 피붙이 형은 동생의 뒷바라지를 위해 월남전 파병도 자처했다. '무조건 성공해서 형에게도 보답하고 다른 이들도 돕겠다'는 일념으로 매달린 공부. 법대에 들어가고, 한국주택공사에 입사해 1급 자리까지 올랐다.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 많은 이들의 도움이 그의 삶을 채웠다. 그런 그가 다시 새로운 '나눔의 릴레이'를 시작했다. 지난 2002년, 월드비전을 통해 한국과 몽골의 두 아들을 후원하기 시작한 것.

"몇년 전까지만 해도 제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게 상처였고, 남들에게 밝히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 삶 자체가 '희망의 증거'더라고요. 제가 돕는 아이들도 엇나가지 않고 잘 커서, 다시 누군가를 돕는 사람들로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주선영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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