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정리/우은식 기자 = <20일 단식>
구인회 회장은 타고난 강골이라 건강 하나는 걱정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속이 더부룩하면서 평소와 같지 않았다. 약국에서 약을 지어다가 먹고 병원도 다녔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요즘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가 보다.’
구인회 회장은 1940년대 당시 포목 사업에다 생선, 야채 사업까지 벌이고 있었는데 일본이 연일 전쟁을 일으키는 등 불안한 나날이 계속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것이 탈이 된 모양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평소 너무 많이 먹는 식습관 때문이라고도 했다.
구인회 회장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단식을 하면 위에 좋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렇게 구인회 회장은 장장 20일간 단식을 하기로 결정했다. 구 회장은 한번 마음을 먹으면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성미를 지녔다. 그래서 이번에도 꼭 성공할 것이라 굳게 다짐했다. 요즘처럼 단식원 같은 곳에 가서 하는 단식이 아니었다.
포목 가게를 지키면서, 즉 일도 하면서 하는 단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단식을 한 지 이틀이 지나자 눈앞이 노래졌다.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이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구인회 회장은 꾹 참고
견뎠다.
드디어 20일을 다 채웠을 때에는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단식이 끝난 뒤에는 위장병이 깨끗이 나았다. 그런데 구인회 회장이 나은 것은 단지 위장병뿐만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시국을 걱정하며 조급해 하던 마음까지 나았다.
구인회 회장은 단식 이후로 무서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단식을 하면서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세상에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울 것은 없으니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귀중한 수확이었다.
<구인회의 장남, 구자경>
“이제 그만큼 돈 벌었으면 장남 고생 좀 덜 시켜도 되지 않아?”
구인회 회장의 장남 구자경이 기름에 절은 작업복을 입고 기계를 만지며 일하는 모습을 보고, 마침 락희화학의 공장을 방문했던 구인회 회장의 친구가 말했다. 이에 구인회 회장은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허허, 모르는 소리 하지 마. 대장간에서는 하찮은 호미 한 자루 만드는 데도 수많은 담금질로 무쇠를 단련하지 않아?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마찬가지야.”
구인회 회장의 말에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갑부 소리를 듣는 구인회 회장이 아들을 고생시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구인회 회장은 이런 사람이었다. 특히 구씨 집안의 장손으로서 자신의 뒤를 이을 자경에게만은 유달리 엄격했다.
구자경이 교사 일을 그만두고 락희화학으로 옮긴 때는 한국전쟁이 터지기 바로 직전인 1950년 4월이었다. 두 달여 후면 한국전쟁이 터질 줄도 모르고 자경이 락희화학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순전히 아버지 구인회 회장의 지시 때문이었다.
당시 럭키크림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일손이 턱없이 부족할 때 구인회 회장은 결국 장남까지 불러 돕게 한 것이었다. 구자경은 아버지의 뜻을 거절하고 계속 교사의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쪽을 택했다.
구자경은 그만큼 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랐다. 구자경이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부산이 아니라 서울이었다. 당시 서울화장품 연구소의 일을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구자경이 서울에 있을 때 한국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북한의 인민군들이 곧바로 서울까지 쳐들어왔다. 구자경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 처했다.
한편, 부산에서 한국전쟁을 맞은 구인회 회장은 서울에 보낸 장남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자경이를 보내지 않는 건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아우 구태회가 구인회 회장을 위로했다.
“영리한 애이니 어떻게든 살아남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구인회 회장은 아우의 한 마디에 왠지 아들이 이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이러한 구인회 회장의 마음이 서울에 있는 구자경한테 전해진 것일까. 구자경은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가기로 결심을 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내려가야 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뭐라고, 걸어서 부산까지 간다고? 곳곳에 북한군들이 우글거릴 텐데,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어?”
구자경의 말에 눈이 부엉이처럼 커진 사람은 구평회, 구두회 등 삼촌들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삼촌들은 구자경과 함께 집에서 꼭꼭 숨어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구자경이 걸어서 부산까지 간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구자경 역시 아버지 구인회를 빼닮아 한번 결심한 일은 어떻게든 행동에 옮기는 성미였다.
그렇게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대장정이 시작됐다. 구자경은 함께 내려가기로 한 일행 두 명과 함께 하루에 자그마치 백리 길을 걸으면서 부산으로, 부산으로 나아갔다. 이미 곳곳에 인민군들이 자리 잡고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구자경이 이런 지뢰밭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내려간 일행 덕분이었다. 일행 중에는 공산당 활동을 한 사람도 있어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 통에 다니는 길이 언제나 안전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바로 옆에서 포탄이 터져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 나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끔찍한 악몽 속에 있는 것 같았지만 구자경은 부산으로 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구자경도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 적이 있었다. 피난민들과 함께 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미군 제트기 한 대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피난민들을 인민군으로 오인한 모양인지 모두 죽일 태세였다. 구자경은 순간 기지를 발휘해 사람들에게 얼른 모자를 벗어 흔들라고 소리쳤다.
당시 인민군들은 머리를 빡빡 밀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미군은 구자경 일행이 인민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겨누었던 총을 거두어들였다. 이후로도 구자경은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가까스로 진주까지 도착했다. 서울을 떠난 지 보름이 지난 뒤였다.
그곳의 처가댁에 들린 후 구자경은 다시 부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산까지는 트럭을 얻어 타고 겨우 갈수 있었으나 마산부터 부산까지가 문제였다. 구자경은 다리도 아프고 지친 나머지 더 이상 걸을 힘도 없었다.
그런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우연히 마산역 앞을 지나다가 한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구자경이 교사였을 때 가르쳤던 학생의 어머니였다. 그녀의 도움을 받아 구자경은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편하게 갈 수 있었다. 구자경은 자신의 아버지처럼 복이 따르는 사람이었다.
드디어 구자경은 서울을 떠난 지 근 한 달여 만에 부산 집에 도착했다.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에 구인회 회장은 한걸음에 집으로 달려왔다.
“자경아!”
구인회 회장은 울먹이며 장남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아들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그 험한 길을 달려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구자경 역시 그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북받쳐 올라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구자경은 이후로도 회사의 험한 일을 도맡아 했다. 구인회 회장 역시 재벌의 장남이라 해서 특별히 대우해준다거나 인생을 안일하게 살도록 하지 않았다. 집안의 장손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강하게 키우고자 했다.
하지만 장남에게 이렇게 가혹했던 구인회 회장도 술만 거나하게 취하면 장남에 대한 사랑을 허물없이 드러냈다.
“허허, 뭐니 뭐니 해도 우리 맏이가 최고야. 두고 봐. 앞으로 큰일을 할 애니까!”
<질서를 잡아주는 아버지>
구인회의 사위 가운데 이재연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명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했고, 외국에서 유학한 뒤 한국은행에 근무하던 엘리트였다. 구인회의 아들 구자두와 친구였던 이재연은 구인회의 딸 구자혜를 소개받았다.
이재연은 이후 구자혜와 결혼해 구인회의 사위가 되었고, 이후 구인회 회장은 집안의 일은 물론 회사의 일까지 함께 의논할 정도로 사위를 무척이나 아꼈다. 사람들 입에서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구씨 집안에 장남이 둘이나 있다!”
당시 장남이었던 구자경이 부산에 근무하고 있는 사이 서울에 있던 구인회 회장이 늘 사위와 함께 다니는 바람에 이를 비꼬는 사람들이 만든 소문이었다. 이에 구인회 회장은 당장 구자경과 이재연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영문도 모르고 올라온 구자경은 그저 어리벙벙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세상에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우리 집에 장남이 둘이나 있다고 하지 않느냐!”
구인회 회장의 말에 구자경과 이재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제야 구인회 회장의 깊은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구인회 회장은 집안의 장남은 구자경 한 명 뿐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 주고 그들 사이의 질서를 바로 잡아주기 위해 두 사람을 불렀던 것이다.
구인회 회장은 이처럼 아들에게 엄하면서도 깊은 정을 주었다. 특히 장남인 구자경에게는 큰 뜻을 품었다. 다음 세대를 이어 또 다른 미래를 열어 갈 큰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랐고, 때문에 회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생산 현장을 지키게 했다.
그런데 하루는 부산으로부터 급한 소식이 왔다. 구자경이 병원에서 대장에 종양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를 듣자마자 구인회 회장은 구자경에게 당장 올라오라고 일렀다.
‘일을 가르친다고 내가 너무 자경이를 혹사시켰나? 너무 야단만 쳐 그 아이 마음에 병이 생겼나? 43세의 젊은 나이에 종양이라니….’
그리고 구인회 회장은 제일병원의 민병철 박사에게 구자경을 부탁했다.
“종양이라면 암이 아니오? 반드시 고쳐 주시오. 부탁합니다. 암이 아니라 다른 고약한 병이라 해도 어떻게든 고쳐 주셔야 합니다.”
조직 검사 끝에 다행히 암이 아니라는 진단이 나와 2주 만에 구자경은 퇴원을 할 수 있었다. 구인회 회장은 구자경에게 건강에 주의하라며 단단히 말해둔 뒤, 서울로 불러들여 락희화학의 전무로서 경영 전반을 맡게 했다.
이후 1970년, 구자경은 45세에 락희그룹의 제2대 총수가 돼 1995년 70세의 나이에 퇴임할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룹을 이끌었다. 덕분에 락희그룹(LG그룹)은 연 평균 22%의 고성장을 이뤘고 50개 사에 10만명의 직원이 일하는, 매출액 50조 원의 대기업으로 우뚝 섰다.
<계속>
eswoo@newsis.com
<저작권자ⓒ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