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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원진레이온의 자살행렬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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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토요판] 뉴스분석 왜? 문송면의 죽음, 그뒤 25년

▶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 앞에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행렬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아픔이 알려진 건 1988년. 15살 소년 문송면군의 충격적인 수은중독사를 계기로 신경독성물질인 이황화탄소에 육체와 정신을 빼앗긴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조명됩니다. 문송면군의 형 근면씨와 당시 두 사건을 다룬 활동가와 기자의 인터뷰를 통해 두 사건의 25주년을 맞아 재구성했습니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지금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1988년 15살의 문송면군이
온도계 회사 취업 7개월 만에
수은 중독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황화탄소 중독이라는
원진레이온 문제가 조명되었다

원진레이온 사건 25년 흐르고
덕분에 녹색병원 설립됐지만
얼마 전에도 원진 노동자 자살
다른 이들도 우울증 약 먹어
산재사망률은 여전히 OECD 1위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88년, 한국은 서울올림픽을 치르며 고도성장을 구가하고 있었다. 87년 6월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 등 민주화를 쟁취하고, 7·8·9월 노동자대투쟁으로 노동기본권의 초석을 쌓은 이듬해였다. 그때 치명적인 독가스를 흡입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사회의 음지에 살고 있었다. 이들로 인해 한국 사회는 노동자의 직업병과 건강권에 대한 인식에서 한 단계 도약을 이뤘다.

귀신이 씌어서 아픈걸까봐 굿까지 했다

15살 소년 문송면군의 충격적인 죽음으로 88년의 격랑은 시작됐다. 충남 서산의 가난한 농부 집안의 4남2녀 셋째로 태어난 그는 1987년 말 중학교 3학년으로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문군이 다니던 중학교에 온도계·압력계 제조업체인 ‘협성계공’의 직원들이 직원 모집을 위해 내려왔다. 잠은 기숙사에서 재워주고 밤에는 야간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말에 문군의 귀가 흘깃했다.

졸업식도 하기 전에 문송면군은 ‘현장실습’ 명목으로 그해 12월5일 협성계공에 출근을 한다. 15살 소년이 맡은 첫 작업은 압력계 도장실에서 페인트칠을 하고 신나로 물건을 닦는 일이었다. 다른 부서로 넘어가 온도계에 수은을 주입했다. 이듬해 3월이면 서울 영등포공고에 들어갈 참이었다.

일찍이 상경해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형 문근면씨는 송면이를 자주 만나 보살폈다. 27일 근면씨가 당시를 회상했다.

“일한 지 한 달도 안 되었어요. 감기몸살 걸린 것처럼 송면이가 몸이 쑤시고 머리가 아프다고 했어요. 양평동의 개인병원 가서 치료했는데 차도가 없었죠.”

쇠약한 몸은 낫질 않았다. 두 달도 안 돼 휴직했다. 형제는 2월 중순 설을 쇠러 고향에 내려갔다. 송면이가 갑자기 눈을 뒤집고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지역의 종합병원에 입원했지만 의사는 원인을 모르겠다고 했다. 서울로 올라와 입원한 구로동 고려대부속병원의 의사도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병원비가 밀려 퇴원할 수밖에 없었어요. ‘귀신이 씌어서 그런 거다’고 해서 무당집에 가서 굿도 해보고, 좋다는 한약방에 찾아가 한약도 먹어봤죠. 그러던 3월쯤이었어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다는 병원인 서울대병원에 가봤습니다.”

운이 좋았던 걸까. 서울대병원 응급실에서 당직 주치의가 물었다.

“환자 직업이 뭐죠?”

“온도계 만드는 공장에서 한두 달 일했어요.”

이런 질문을 던진 의사는 처음이었다. ‘노동자병원’인 구로의원에서 당시 노동자 상담을 맡았던 김은혜씨(현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이사)는 27일 인터뷰에서 이런 풍경이 당시의 산업보건 실태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가 말했다.

“송면이가 두달 동안 병원 몇 군데를 전전했는데, 가장 기초적인 사항인 직업을 물어본 의사가 한 명도 없었던 거죠. 명백하게 수은중독 증상을 보였는데도요.”

서울대병원 소아과 박희순 교수가 송면이를 담당했다. 머리카락과 소변 검사 결과, 수은과 유기용제 수치가 기준치를 넘어서 있었다. 송면이가 다루던 수은과 신나에서 비롯된 것임이 틀림없었다. 사회초년생인 근면씨는 어떻게 할지 몰랐다. 근면씨가 말했다.

“회사에 찾아가니 면담도 안 해주고 사장님 얼굴도 못 봤어요. 시골에서 왔으니까 농약 중독 때문이다, 자기네와 상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근면씨는 박 교수의 소개로 구로의원을 찾아갔다. 김은혜씨가 상담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 근면씨는 구로의원과 노동단체의 지원을 받아 회사, 정부와 싸운다. 김씨가 말했다.

“서울대병원 진단서가 있는데도 회사는 산재요양 신청서에 날인을 안 해줬어요. 노동부에 신청서를 내려면 회사 쪽 날인이 필요하거든요. 사유서를 써서 날인 없이 제출했는데, 이번엔 노동부에서 서울대병원이 산재요양지정기관이 아니라고 신청서를 반려했죠.”

27일 김은혜 이사가 기자에게 서울대병원 진단서를 보여줬다. 문송면군의 주민등록번호 밑에 ‘1. 수은중독 2. 유기용제 중독’이 선명하게 적혀있다. 박희순 교수의 서명도 보였다.

회사 안전교육은 1년에 한 번 불조심 교육 뿐

김씨와 근면씨는 몇 번이고 노동부와 회사를 오갔다. 김씨는 당시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던 박석운씨(현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에게 공론화를 부탁했고, <동아일보> 등의 신문에 기사가 실리기 시작한다. 여론이 들끓자 6월20일 노동부와 회사는 산재요양 승인을 내준다. 송면군은 산재요양기관인 여의도성모병원으로 거처를 옮긴다.

7월2일이었다. 김은혜씨는 구로병원에 남아 상담일지와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새벽 2시 반에 전화가 왔어요. 근면이가 울면서 ‘선생님, 송면이가 죽었다’고… 마음 속에 이 난리가 없는 거야. 죽을 거라곤 생각 못했거든요. 멍해 있다가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어요. 여의도성모병원으로 다 모이라고.”

회사에 사망 보상을 요구하고 정부에 노동자 건강 대책을 요구하는 ‘장례 투쟁’이 전개됐다. 여의도성모병원에는 매일 집회가 열렸고, 야당정치인인 김대중, 김영삼이 찾아왔다. 이 과정에서 문송면 산재사건에 관여한 노동운동가, 보건의료인의 네트워크가 공고해졌다. 원진레이온 산업재해 노동자들도 문군의 문제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함을 직감하고 이들을 찾아갔다. 네트워크는 ‘문송면군 수은중독사건 대책위원회’에서 ‘고 문송면 산업재해노동자 장례위원회’로 그리고 ‘원진레이온 직업병대책위원회’로 발전되어 간다.

1988년 7월16일, 한겨레신문사 편집국에 전화가 걸려왔다. 공해문제연구소(환경운동연합 전신)로부터였다. 구리노동상담소에서 제보가 왔는데, 산업재해로 퇴직한 노동자가 특이한 증상을 호소하더라는 것이다. 젊은 나이인데 말을 더듬고 중풍에 걸린 듯 제대로 걷지 못한다는 소리를 옆 자리에서 들은 당시 안종주 의학 담당기자(현 한국석면환경연합회장)의 눈이 번쩍 뜨였다. 25일 안종주 회장이 말했다.

“‘이거 이황화탄소중독이구나!’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어요. 마침 두어 달 전에 서울대 보건대학원을 다니면서 논문을 읽었거든요.”

안 기자는 바로 구로의원에 전화해 산업의학사전을 뒤져보라고 했다. 증상이 일치했다. 노동자의 이름은 강희수(당시 44살), 그가 다니던 회사는 원진레이온이었다. 강희수씨는 비슷한 병에 걸린 뒤 자신과 함께 원진레이온에서 강제퇴직당한 사람이 더 있다고 했다.

7월17일 오전, 서울엔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안 기자는 강씨와 함께 신문사 차량에 올랐다. 맨처음 정근복(당시 49살)씨 집에 찾아갔다. 60대 노모와 아이가 있었고, 제대로 걷지 못하는 전씨는 방에 누워 있었다. 전씨는 취재에 응할 수 없다며 사진을 찍지 못하게 했다. 전씨는 자신의 병과 관련해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며칠 후에 회사에게 600만원을 받기로 돼 있었다. 게다가 전씨의 부인은 원진레이온의 한 부서에 채용돼 일하고 있었다. 안 기자가 설득했다.

“산재당한 사람을 600만원 주고 퇴사시켜 놓다니요? 600만원이 아니라 6000만원을 받아도 시원찮을 문제입니다.”

두 번째 찾아간 서용선(당시 46살)씨의 몰골은 더 처참했다. 초등학생인 아들이 아버지에게 라면을 떠먹여주는데, 불어터진 면발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반신불수와 다름없었다. 어머니는 동네 파출부를 갔다고 아들은 답했다.

“아무 취재할 게 없었어요. 그 양반이 말을 못했으니까. 사진만 찍고 돌아왔죠.”

돌아가는 자동차 안에서 안 기자는 강희수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강씨는 보행이 부자연스럽긴 했지만 그나마 건강 상태가 세 사람 중 가장 나았다.

“안전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아뇨.”

“이황화탄소가 어떤 물질인지 아십니까? 그 물질에 대해 위험교육을 받은 적이 있나요?”

“입사 20년 동안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 어떤 교육을 받았나요?”

“일년에 한번 불조심 교육을 받았습니다.”

일본에서 한국에서, 다시 중국으로 기계 수출

1988년 당시 원진레이온은 종업원 1500여명, 연간 매출액 455억원의 중견기업이었다. 경영부실로 1979년부터 산업은행이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경기 구리의 공장에서 펄프에 이황화탄소, 황화수소, 황산 등을 써서 인견사(실의 일종)를 만드는데, 유기용제인 이황화탄소에 노출되는 작업 공정에 500여명이 투입되고 있었다.

이황화탄소는 호흡기나 피부 접촉을 통해 인체에 유입돼 정신이상과 뇌경색, 다발성 신경염, 협심증, 신부전증 등을 일으킨다. 만성중독자는 걸음을 제대로 못 걷고 말을 못 하는 등 중풍처럼 보인다. 이번에 이황화탄소 중독증 환자가 처음 발견된 건 아니었다. 공장을 거쳐 간 노동자 다수가 증상을 호소했다.

회사는 증상을 호소하면 퇴사시키고 얼마간의 보상금을 주는 것으로 갈음했다. ‘독가스’ 중독 대열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안종주 회장은 “취재를 해보니 1986년 이후 12명이 이황화탄소중독을 앓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기사를 통해 이슈가 제기되고 조사가 이뤄지면 수십 명 정도 더 발견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처음 12명이던 몇 년 만에 수백명으로 나중에는 1000명 가까운 수에 이른다. 원진레이온은 국내 최대의 직업병 사건이자, 세계 최대의 이황화탄소중독 사건이다.

7월22일 <한겨레> 사회면에 관련 기사가 실리자, 노동부는 원진레이온에 대해 특별감독에 들어갔다. 이황화탄소는 기준치를 훌쩍 초과했고, 회사 간부들은 형사처벌을 받았다. 당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인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진상조사반을 꾸려 조사에 나섰다. 이 인연을 계기로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직후 원진레이온 산업재해 환자들이 버스를 대절해 봉하마을을 찾아와 참배했다.

원진레이온 독가스의 비극은 1990년대를 관통했다. 김봉환씨는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1991년 숨졌고, 같은해 권경용씨는 방에 연탄불을 피워놓은 채 극약을 먹고 자살했다. 1992년 고정자씨는 정밀검진을 받고 검사결과를 기다리다가 목욕탕 수도꼭지에 스카프로 목을 맨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원진레이온 사태는 1993년 회사가 폐업하고 이듬해 기계가 중국에 수출될 때까지 여러 논란을 낳았다. 이황화탄소를 뿜던 방사기계는 1961년 한일경제협정 직후 일본의 도레이레이온에서 중고로 들여왔다. 도레이레이온에서는 이황화탄소 중독증이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때라 좋은 기회로 여겼고, 당시 화신백화점 사장이던 박흥식은 30억엔에 합의하고 설비를 인수한다.

이 기계는 원진레이온 폐업으로 1994년 중국 단둥시 화학섬유공사에 50억원에 매각됐다. 몇 년 뒤,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이 공장을 방문했지만, 전면적인 공개를 거부해 제대로 보지 못했다. 지금 국내 관련업계에서는 인조견을 전량 수입하고,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자동화공정을 통해 이황화탄소 노출을 차단한다. 반면 노동환경이 열악한 인도나 베트남, 중국 등은 제대로 된 정보가 없다. 안종주 회장이 말했다. “일종의 공해수출이지요. 일본에서 한국으로 다시 중국으로.”

문송면군의 죽음에서부터 원진레이온 사태까지 1988년은 한국 사회에 광산노동자의 진폐증으로만 한정됐던 ‘직업병’이 도시노동자의 일상에도 침투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두 사건은 노동계가 추천한 전문가가 참여하는 직업병판정위원회의 설립, 직업병 인정기준 변경 등 법과 제도에 주목할 만한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원진레이온 사태는 1993년 11월 비영리공익법인인 원진재단의 설립과 전문치료기관인 녹색병원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노동안전, 산업보건 전문가들은 원진레이온을 직업병 해결의 모범사례로 꼽는다.

김은혜 이사는 “경제성장의 허구가 문송면과 원진레이온 사태를 통해 드러났다. 정부는 파이를 키워야 한다고 했지만, 노동자들은 방치됐다”고 말했다. 그럼 지금은 달라졌을까? 25년 전과 비교하면 산재발생률은 줄었지만, 산재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1위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산재위험도의 현격한 차이가 발생했으며, 삼성 백혈병 사건에서 보듯 대기업조차 비밀주의와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지금도 하나둘 목숨을 끊고 있다.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은 원진레이온 산재노동자들의 주요한 죽음의 원인 중 하나다. 18일 김기석(가명)씨에게서 비보가 들려왔다. 그는 이황화탄소중독으로 인해 1988년 직업병 판정을 받았다. 다리에 감각이 없어 통증약을 먹었다. 그의 원진레이온 동료가 말했다. “그래도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3년 전부터는 우울증과 불면증이 심해서 잠을 못 잔다고 했지요. 사실 나도 우울증 약을 먹고 있어요.”

노동단체와 보건의료단체는 1일까지 ‘문송면·원진노동자 산재사망 25주기 추모주간’으로 정하고 관련 행사를 열고 있다. 29일 오후 1시 서울 당산동 성문밖 교회에서는 문근면씨와 김은혜 이사가 1988년을 회상하는 토크콘서트가, 30일 오전 10시30분에는 경기 마석 모란공원에서는 두 사건의 피해자들을 기리는 추모제가 열린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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