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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취재파일] "노벨상 집착은 한국 과학계의 비극"…'노벨화학상' 뷔트히리 교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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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들이 이제 차례로 발표됩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우리는 왜 노벨상을 못 받나?" 이런 아쉬운 말들이 이어지지 않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 과학계는 지금 어디쯤 와 있으며, 무엇을 더 익히고 보완해야 할까요? 노벨상을 받은 석학들은 우리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까요?

역도선수를 떠올리게 하는 큰 체구와 힘찬 악수, 호쾌한 웃음. 다소 거칠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대화를 부드럽게 끌어가는 유머와 위트. 2002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쿠르트 뷔트리히 교수의 첫인상이었습니다. 생체 내 고분자 단백질 구조를 핵자기공명 분광법을 통해 밝혀낸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그는, 여든이 넘은 고령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들떠 있었습니다.

"뭐라고요? 수의사이고, 병리학을 전공한 박사인데, 방송기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있다고요? 우리 자리를 바꿉시다. 내가 당신을 인터뷰해야겠군요. (웃음)" 30분만 가능하다던 인터뷰는 농담으로 시작해 3시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 "어릴 적 가진 호기심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 어릴 땐 운동선수로 활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유년시절은 보내셨나요?
= 스위스의 작은 시골마을(Aarberg)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생 때까진 숲과 강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고, 닭과 토끼 같은 동물도 많이 키웠죠. 자연 속에서 늘 자유롭게 뛰어놀았고, 자연스럽게 운동도 좋아하게 됐습니다. 스키, 축구, 육상, 수영 등 모든 종류의 운동을 다 즐겼죠. 스키 선수와 스포츠 강사로도 활동할 정도였습니다. 저의 아내도 운동선수였습니다. 돌아보면 젊었을 때는 운동밖에 안 했던 거 같네요. (웃음).

- 그렇게 운동을 좋아했던 '시골소년'이 세계적 과학자로, 그 '극적인 변화' 과정이 궁금합니다.
= 그런가요? 전 수의사를 하다가 방송기자로 근무하는 당신이 더 극적인 거 같은데요? (웃음) 말씀하신 대로, 저는 운동에 푹 빠져 있었죠. 제가 과학자가 된 것도 다 운동을 더 잘하려고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겁니다. (웃음). 믿기 힘들겠지만 실제로 그래요. 기록을 더 향상하고 싶었고, 그래서 '내 몸'에 대해 직접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어쩌다 보니 노벨상까지 받게 됐네요. (웃음)

사실 초등학생이었던 1950년대 스위스에선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이 드물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3% 정도만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나머지 대부분은 바로 학업을 이어가기보단 직업을 가졌죠. 저도 공부보단 운동을 즐기며 자유롭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께서 "고등학교 진학을 생각해보지 않을래?"라고 물어보셨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운동도 잘했지만, 공부도 제법 잘했나 봅니다. 한 기자 표정을 보니 믿기 어려운 거 같네요. (웃음) 부디 믿어주세요. (웃음) 믿었다고 가정하고, 당시 나를 포함해 7명이 고등학교에 진학했어요. 훗날 보니 그 7명 가운데 6명이 교수가 됐더군요. 80%가 대학 졸업장을 받는 오늘의 한국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죠.

- 대학에서도 체육을 전공하신 건가요?
= 네, 대학 때도 운동 코치가 꿈이었습니다. 과학자가 될 생각은 없었죠. 실제로 축구 코치와 중학교 체육교사를 할 수 있는 학위를 받았습니다. 스포츠는 내 삶의 일부였습니다. 지금도 기회가 된다면, 스위스로 돌아가 고등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물론, 나이가 좀 들긴 했지만요. (웃음) 어쨌든 전 운동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앞서 얘기했듯이, 더 좋은 기록을 내고 싶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산소 섭취량'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체내에 산소공급과 운반이 잘 돼야 더 잘 뛸 수 있으니까요.

마침 저는 그 무렵 기록 향상을 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내 몸 안에 산소를 더 많이 공급할 수 있을까? 그래야 기록이 나아질 텐데….' 늘 그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체내 산소 운반'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바로 '헤모글로빈'이었죠. 저의 운동 실력을 높이는 것이 목표였기에, 당연히 제 피를 뽑아 '헤모글로빈'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져 있더라고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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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해도, 갑자기 전혀 다른 전공을 공부하기가 바꾸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 맞습니다. 전공을 화학으로 바꾸려고 교수를 찾아갔더니, "운동선수가 공부하면 학문의 질 떨어진다."라며 거절했습니다. 좌절했죠. 그런데 운동을 잘했던 만큼 공부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혼자만 그렇게 믿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웃음)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다른 교수를 찾아갔고, 결국 화학을 공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진로를 바꿀 수 있었습니다.

- 자유롭게 사고를 전환하신 게 무척 인상적입니다. 그 힘은 어디서 왔을까요?
= 부모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회계사였지만, 두 분은 고등교육을 받지는 않은 분이셨죠. 그래서 숙제도 도와주시지 못했습니다. 대신, 간섭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도와주셨죠. 더 흥미로운 점은 두 분은 독일어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등 4개 국어를 구사하셨단 점입니다. 덕분에 저도 4개 국어를 쓸 수 있습니다.

- 한국어도 그 안에 들어가나요?
= 안 그래도 그 질문이 나올 줄 알고 인터뷰하러 오면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안타깝게도 언어는 그렇게 짧은 시간에 익숙해지지 않네요. (웃음) 다음에 올 땐 유창한 한국어로 할 수 있게…. (웃음) 어쨌든, 부모님께 배운 그런 자유로운 사고와 어학 실력은 세계 곳곳에서 연구하고, 궁극적으로는 노벨상까지 받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자유로운 사고와 어학 실력은 과학자에게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그 점을 꼭 강조하고 싶습니다.

뷔트리히는 교수는 스위스 아르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스키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베른대학교에서 화학과 물리학, 수학을 공부했다. 1964년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으로 건너가 U.C.버클리와 벨연구소(Bell Lab)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1969년 스위스로 돌아와 취리히 연방공과대학교(ETH)에서 생물물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ETH와 미국 스크립스연구소, 중국 상하이 과기대 등에서 대규모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대구경북과학기술원(디지스트) 뇌·인지과학전공 및 핵심단백질자원센터 석좌교수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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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과학계 핵심 이슈는 '단백질' 연구

- 평생 단백질 관련 연구에 매진해 오고 계십니다.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으신가요?
= 학창시절 스키를 타다가 다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근육감소증'이란 병이 생겨 허벅지 둘레가 10㎝나 줄었습니다, 이때부터 몸, 정확히는 '단백질'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단백질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물질이었기 때문이죠. '어떻게 하면 몸을 이전 상태로 돌릴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컸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숨 쉬고, 소화하고, 우리 몸의 모든 신진대사에도 단백질이 관여한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이처럼 과학 연구란 우리 삶과 동떨어져 있는 어려운 것이 아닌 것이죠. 결국, 일상을 개선하기 위한 질문, '빅 퀘스천(근본 질문)'을 가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단백질 연구를 하게 됐습니다.

- 단백질 연구는 우리 삶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줄까요?
= 한 기자 당신이 연구한 '광우병'이 좋은 예입니다. 광우병은 1980년대 발병해 인류에 엄청난 공포를 안겨줬습니다. 그런데 1995년에서야 발병 원인이 밝혀졌습니다. 바로, '단백질 연구'를 통해서였지요. 정확히는 '단백질의 구조'에 관한 연구인데, 뇌에 있는 정상 단백질이 변형돼 뭉쳐지는 것을 확인해낸 것입니다. 이후 우리는 매우 빠르게 광우병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골다공증'이나 '근육감소증' 같은 질환도 단백질 분석 기술을 통해 원인을 분석하고 치료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알츠하이머병과 파킨슨병, 인플루엔자 같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존율을 높이는 데 단백질 분석기술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가까이, 곁에 있습니다. 과학을 동반자라고 생각하고 즐기며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 하지만, 많은 사람은 '과학'을 어려워합니다. 즐기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 그렇죠. 하지만, 과학을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렵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이 따라오죠. 과학은 '재미있다.'라는 마음부터 가져야 합니다. 저를 보세요. 그렇지 않나요? 운동을 잘하려고 제 피를 뽑아서 연구하면서 여기까지 왔잖아요. (웃음) 저는 실제로 연구 중 알게 된 한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1968년부터 91년까지 23년 넘게 고민했습니다. 실험을 정확히는 실패를 무한대에 가깝게 하고 반복하고 나서야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텼을까요? 즐겼기 때문입니다. 즐겼기 때문에 그 긴 시간, 하나의 문제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과학을 즐기며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국가와 사회의 역할이고 또한 책임입니다. 즐기면 오래 생각할 수 있고, 답을 구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그렇게 즐기신 끝에 결국 노벨상 받았습니다. 당시 어떤 기분이셨나요?
= 음…. 그다지 그렇게 나쁜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웃음) 제법 괜찮은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웃음) 하지만, 제가 먼저 확실히 말하고 싶은 것은 제가 노벨상을 위해 연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건 틀림없습니다. 노벨상을 받기 위해 연구를 해야 한다면, 그건 끔찍한 일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이맘때쯤 가을이 되면 노벨상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노심초사하는 과학자들이 참 많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압도적인 다수는 결국 상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적어도 한 달가량은 우울하게 지냅니다. 과학은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즐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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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트리히 교수는 스위스와 미국에서 핵자기 공명 분광법의 연구를 맡아 단백질의 구조나 동역학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리하르트 에른스트 교수 등과 함께 최초의 2차원 NMR 실험 기법을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단백질을 구성하는 원자들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간편한 방법인 '핵 오버하우저 효과'를 완성하였다. 이후 핵자기공명(NMR) 분광법으로 단백질과 핵산의 3차원 구조를 규명해 노벨상을 받았다.

뷔트리히 교수와 15년째 공동연구 중인 장익수 디지스트 교수(뇌·인지과학전공 석좌교수 및 핵심단백질자원센터장)는 "뷔트리히 교수는 생명체가 가진 단백질의 실체와 입체구조를 연구하는데 핵심적인 실마리를 제공했다. 단백질의 3차원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게 했고 이를 통해 우리는 생명현상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그것이 노벨상 선정 이유였다."라고 설명했다. 장 교수는 또 "단백질 분석기술은 이후로도 꾸준히 발전해, 현재까지 약 130,000여 개의 새로운 단백질들의 3차원 구조가 밝혀졌다. 그렇게 구축한 단백질 구조 데이터베이스는 신약개발과 질병 원인, 치료법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 "노벨상을 받기 위해선 노벨상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 한국 과학계를 오랫동안 지켜봐 오셨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과학'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 제가 박사학위를 받았을 1962년으로 돌아가 보지요. 1962년 당시 한국, 그곳엔 사실 '과학'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안 된 시점이었습니다. 학문적 토대는 '폐허' 상태였습니다. 그로부터 10년 지나고 나서야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가 세워졌습니다. 당시 제가 설립에 대한 자문을 했기에 당시 한국 과학의 수준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스위스는 이미 10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상황이었습니다. 그것과 비교하면 한국의 과학 연구는 출발이 매우, 매우 늦은 거죠. 그런데도 한국의 현실은 "우리는 왜 노벨상을 왜 못 받나?"라고 조바심을 냅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요. 어쩌면 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노벨상만 바라보며 조바심을 내는 것은, 그것은 비극적인 일입니다. 조급해하지 말고 여유를 가지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 1971년 이전 스위스 출신 노벨상 수상자
1) 노벨화학상 :알프레트 베르너(1913년), 파울 카러(1937년), 레오폴드 루지치카(1939년) 2) 노벨생리의학상 : 에밀 테오도어 코허(1909년), 파울 헤르만 뮐러(1948년), 발터 헤스( 1949년), 다니엘 보베(1957년) 3) 노벨물리학상 : 샤를 에두아르 기욤(1920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921년), 타데우시 라이히슈타인(1950년), 펠릭스 블로흐(1952년). 지금까지 총 20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 배출(노벨문학상 2명, 평화상 3명 별도)

- 안타깝지만, 냉정한 지적입니다.
= 물론, 한국 과학은 '응용과학'을 중심으로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초기엔 섬유와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이 주를 이뤘지만 기계공학과 전자공학, 컴퓨터공학이 발전하며 자동차와 전자사업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기초과학'은 1980년대까지도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일부 과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했지만 일반화할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기초연구를 진행하는 대학도 없었다고 보면 됩니다.

당장 먹고 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발전에 집중하다 보니, 기초과학 대신 응용과학에 선택적으로 집중해 발전시켰다고 봅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그런 점에서 보면, 기초과학 연구가 제대로 시작된 것은 불과 20년 정도밖에 안 됩니다. 20년이란 짧은 시간 안에 기초연구를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는 없습니다.

- 좀 더 구체적으로 한국 과학에 대해 조언해 주신다면요?
= 앞서 말한 대로, 기초과학 연구를 시작한 지 20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한국 과학계는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연구는 대부분 한국어로 진행됐기 때문에 해외 과학자들의 도움을 받는 데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연구 성과가 영어로 돼 있지 않아 해외 과학자들의 평가조차 받을 수 없었던 거죠. 국내에서 최고 수준의 기초과학 연구를 할 수 있는 게 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인도에서는 이미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4명 나왔는데 (화학상 1명, 물리학상 2명, 생리의학상 1명), 이들 대부분은 영국이나 미국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과학자들은 참을성을 가지고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 1901년에서 1972년까지 미국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92명의 수상자 가운데 절반 이상인 48명이 노벨상 수상자 밑에서 연구를 했거나 지도를 받았다. 이처럼 우수한 과학자들은 함께 공동연구를 하며 스승과 제자, 동료 사이에 학문적 성과가 계승적으로 축적되어 노벨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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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 너무 조급합니다. 냉정하게 보자면, 대학원생들의 영어 수준은 기대 이하고, 과학적 전통도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와 국민은 '노벨상'이란 성과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황우석 박사 사건'도 본질은 거기에 있었다고 봅니다. 당시 나도 당시 한국에 있었는데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우수한 과학자가 노벨상 수상을 바라는 정부와 여론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노벨상에 대한 그런 조급증은 문제를 악화시킵니다.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과학자 한 명이 환상적인 연구 결과를 낸다고 해서 바로 다음 해에 노벨상을 받는 그런 일은, 단언하건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과학에서의 진보는 최소 수년, 혹은 십 년 이상 단위로 이뤄집니다. 한국 특유의 이른바 '빨리빨리' 문화가 사회를 역동적이고 재밌게 만들지만, 그것이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꾸준한 투자와 지원 외에 다른 지름길은 없습니다.

- 해외 유수 기초과학연구소도 이런 과정을 거쳤겠지요?
= 물론이죠. 3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세계 최고 수준의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한 세기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자연과학은 물론 생명과학, 심지어 인문학까지 80개 연구소가 공동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인력도 13,000명의 영구 고용직원과 4,700명의 과학자, 11,000명의 박사급 연구원·방문학자들이 있습니다.

제가 속한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도 1855년에 세워져 163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세계적 물리학자 아인슈타인과 파울리, 화학자 프리츠 하버 등이 ETH 출신이죠. 이들을 포함해 노벨상 수상자를 30명 배출했습니다. 한국의 이웃 일본도, 기초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이라고 평가받은 이화학연구소(RIKEN)도 1917년 세워져 2년 전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그곳도 설립 32년 뒤인 1947년에서야 첫 노벨상 수상자(유카와 히데키-노벨물리학상)가 나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한국은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기초과학에 투자해야 합니다.

- 결국 모든 건 '교육'으로 귀결합니다. 한국의 과학 교육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 한국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굉장히 똑똑하고 근면하며 결정적으로 성실합니다. 그런데 때론 그것이 문제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10살짜리 어린이가 자정까지 '성실하게' 사교육에 시달리는 것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호기심은 과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인데, 한국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사교육에 시달려 스스로 호기심을 개발할 시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시키는 것은 잘하는데, 시키지 않은 것 즉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은 어색해합니다. 어려워하기 전에 어색해합니다. 경험해본 적조차 없다는 거죠. 노벨상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발견해낸 것에 대한 격려'입니다. 학생들은 진로에 대해선 앞선 세대, 특히 부모님 말씀은 너무 맹목적으로 따라서는 안 됩니다. (웃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웃음) 또 너무 어린 나이에 돈을 벌어야 한다고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 이런 교육 문화가 과학 연구자들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데 영향을 줄까요?
= 그렇죠. 한국 연구자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식이 부족한 편입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은퇴가 가까운 노교수들에게 있습니다. 은퇴가 가까워 연구는 열심히 안 하는데, 정작 그들이 가지는 영향력과 자금력은 상대적으로 엄청 큽니다. 비정상적으로 클 때가 잦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력과 자금력으로 젊은 과학자들을 끌어들입니다. 그들은 연구를 열심히 안 하기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크고, 그래서 젊은 학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이죠.

여기서부터 문제는 시작됩니다. 젊은 학자, 학생들은 거기에 종속됩니다.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연구하며, 심지어 퇴근하기 전에 교수에게 5번씩 인사하는 경우도 봤습니다. 그런 분위기 안에서는 과거의 성공에만 의존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새로운 발견은 나오기 어렵습니다. 한국 과학계가 가야 할 길은 젊은 과학자들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뷔트리히 교수는 인터뷰 내내 '호기심'과 '인내'란 말을 반복했다. 자신도 호기심에서 시작한 연구가 단백질의 3차원 입체구조를 밝히는 연구법으로 이어졌고, 그것을 개발하고도 20년 뒤 노벨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개발한 방법은 이후 광우병을 유발하는 프라이온 단백질의 구조를 밝혀냈으며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 등 신약 개발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처럼 학문적 성과가 인정을 받고 실생활에 이어지기까지는 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 정부와 국민은 이런 학문적 분위기를 인정하고 기다려주길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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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망한 한국 과학자들과 공동연구"

- 한국 과학계와 오랜 인연을 맺고 계십니다. 카이스트, 연세대 등을 거쳐 지금은 대구경북과학기술원 '디지스트(총장 국양)'에 몸을 담고 계십니다. 세계 곳곳에서 많은 초청을 받으셨을 텐데 어떤 인연으로 디지스트에서 연구하고 계시나요?
= 2014년부터 디지스트 석좌교수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단백질 연구의 방향과 방법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 디지스트에 오게 된 것도 결국 '사람'입니다. 앞서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과거 학회에서 장익수 교수를 만났고, 그 뒤 오랜 시간 같이 연구해오고 있습니다. 그 인연으로 자연스럽게 그가 있는 디지스트에서 공동연구를 이어오게 된 것이죠. 새로 생긴 신설 연구·학교기관이지만 상당한 잠재력을 갖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기존의 것을 반복해서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디지스트에 온 것은 저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도 이렇게 제가 말한 것은을 직접 실천하고 삽니다. (웃음)

- 구체적으로 젊은 한국 과학자들과 어떤 연구를 하고 계신가요?
= 오늘 과학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생명과학 소재는 '단백질 자원(Protein Resource)'입니다. 세계 과학계에서도 가장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분야이기도 하죠. (※ 최근 노벨생리의학상과 노벨화학상 수상자들도 면역 단백질과 친환경적인 단백질을 연구) 저는 디지스트 핵심단백질자원센터 석좌연구원으로, 센터장인 장익수 교수와 이 단백질 연구를 함께 논의하고 있습니다. 디지스트 단백질 센터가 역사가 길지는 않지만 상당히 높은 수준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물리학자와 생물학자, 수의학자 등 다양한 전공자들이 각자의 전문적 관점에서 융합적으로 연구를 이어가는 게 큰 장점입니다.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젊은 학자들을 보면 참 뿌듯합니다. 최성균 선임연구원(수의학 박사), 강운범 선임연구원(생화학 박사), 유우경 교수(생물물리학 박사), 박송 연구원(생물학 박사), 반드시 꼭 이들의 이름을 써주기 바랍니다. (웃음) 기사가 나오면 번역해서 다 찾아볼 겁니다. 언젠가 이들이 노벨상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웃음)

디지스트 단백질 센터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시작해, 짧은 시간 엄청난 발전을 이뤄왔습니다. 한국 과학기술 발전의 전형을 보는 거 같습니다. 우수한 전문 인력, 연구 개발 및 생산 시설, 단백질 정보자원 빅데이터 구축, 단백질 고급 분석 및 관련 응용 기술의 4개 핵심요소가 선후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모두 수평한 위치에서 '심장'처럼 뛰고 있습니다.

단백질 발현과 정제기술, 단백질 고급 측정·분석, 단백질구조의 슈퍼컴퓨팅 디자인, 단백질 기능평가 기술 실용화 및 성과확산 연구개발들이 파이프라인처럼 연결돼 있습니다. 저는 센터에 수시로 이메일과 화상 미팅을 통해 연구 진행상황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매년 최소 2번 이상 한국을 찾아 전 연구원들과 직접 회의를 통해 성과 분석 및 연구개발 전략에 대한 토론 등을 진행합니다.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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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융합연구의 시대'라고 합니다. 교수님께선 어떤 새로운 융합을 시도하시나요?
= 저는 단백질 연구를 통한 신약 개발에 관심이 많습니다. 최근 이 연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슈퍼컴퓨터'입니다. 슈퍼컴퓨터로 단백질의 구조를 디자인해 신약을 개발해내는 것이죠. 제가 있는 디지스트 핵심단백질자원센터도 국내 대학과 연구기관을 통틀어 최고 사양의 슈퍼컴퓨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제가 시도 중인 것은 분자생물학과 컴퓨터 물리학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점에서 디지스트 핵심단백질자원센터는 세계적 수준의 역량을 갖췄습니다. 제 자랑 같지만 객관적 사실은 사실이죠. (웃음). 벌써 여러 바이오 기업들과 MOU를 체결하고 산학연 협력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보면, 한국의 기초과학의 내일은 밝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만간 세계 과학계가 이곳을 또 한국을 주목할 것입니다.

긴 인터뷰를 마치며, 세계적 거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단어는 '자유 그리고 윤리'였습니다. 노벨상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상상하고 연구하되, 동시에 학문 공동체가 만든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과학계는 이를 얼마나 잘 지켜가고 있을까요? 자유와 윤리를 지키며, 지금 이 순간에도 연구실에서 밤을 밝혀 진리와 자연의 이치를 쫓는 한국 과학자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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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촬영·편집 : 이준영 VJ)
한세현 기자(vetma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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