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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강일홍의 스페셜인터뷰㊹-송대관]세 번의 인생유전, "행복도 불행도 모두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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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패들은 52년 가수인생을 살면서 쌓은 분신같은 기록이죠." 송대관은 "행복도 불행도 모두 내 인생의 한 조각이고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40여년간 200여개에 달하는 각종 상을 수상했다. /이덕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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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억 부채, 법원이 결정한 10년 회생기간 불과 2년 만에 탈출

[더팩트|강일홍 기자] 송대관(73)의 가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그의 대표 히트곡 '해뜰날'처럼 좌절과 절망을 딛고 극적으로 꽃을 피웠다. 고난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일어서는 그의 오뚝이 인생에 팬들은 '저력의 국민가수'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가수의 삶을 살아온 지 올해로 52년째, 반세기를 훌쩍 넘겼다. 1967년 정통 트로트 '인정 많은 아저씨'로 데뷔한 이후 '세월이 약이겠지요' '해뜰날'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정상급 가수로 부상했다. 하지만 그는 80년대 초 돌연 미국 이민을 결심하며 가요계를 떠난다.

송대관을 다시 무대로 돌아올 수 있게 한 건 음악에 대한 끝없는 열정과 고국을 향한 짙은 그리움과 향수다. 10년 만에 귀국한 뒤 그는 '혼자랍니다' '정 때문에' '차표 한장' '고향이 남쪽이랬지' '네 박자' 등을 순차적으로 히트시키며 재기에 성공한다.

승승장구하던 송대관은 아내의 사업실패로 또다시 벼랑 끝에 내몰린다. 뒤늦게 억울함을 풀었지만 부동산개발 사건에 연루되면서 무려 145억 원의 빚을 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시련에 굴하지 않았다. 법원에서 보장한 10년 회생 기간(탕감+변제)을 불과 2년 만에 털어냈다.

그는 누구보다 롤러코스터를 많이 탄 가수다. '쨍'하고 '해'가 뜨면 고비를 맞고 다시 일어섰는가 싶으면 또다시 고비를 맞았다. 비온 뒤 땅은 더 단단히 굳게 마련, 송대관은 "좌절을 겪으며 더 큰 행복을 찾은 것같다"고 활짝 웃었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그의 자택에서 2시간동안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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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극복하니 아내와 부부애가 더 깊고 돈독해졌어요." 송대관은 시종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그의 자택에서 2시간동안 진행됐다. /이덕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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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등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 뿌듯해하신다고 들었다. 인기가수라면 일상사인데 새삼스럽지 않나?

몰라서 하시는 말씀, 가수는 무대를 떠나면 그냥 죽은 목숨이에요.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몰라요. 저는 세번이나 숨이 꽉 막힌 세월을 겪었어요. 더구나 마지막 세번째 시련은 '이제 모두 끝난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강박관념에 시달렸죠. 순탄하던 삶이 막상 하루 아침에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고 보니 막막하더라고요. 팬들이 저를 다시 사랑해줘서 늘 감사한 마음이고, 지금은 TV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제 모습만 봐도 마냥 행복해요.

송대관은 "70살 넘게 인생을 살아본 뒤에야 세상은 내 뜻과 전혀 상관없이 흘러가는 경우도 있다는걸 비로소 깨달았다"며 "행복도 불행도 모두 내 인생의 한 조각이고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송대관의 표정은 매우 밝아보였다. 고통을 함께 나눈 아내 이정심 씨와의 부부애도 오히려 더 돈독해졌다고 한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는 지난해 TV조선 '인생다큐-마이웨이'에서 전파를 탄 뒤 네티즌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은 일으켰다. 지인들로부터 수많은 격려와 위로 전화를 받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거실에 진열된 엄청나게 많은 상패에 놀랐다. 국민가수라는 위상이 새삼 실감난다.

저는 원래 집에서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 됐네요. 이곳에 이사온 이후 이렇게 거실에 앉아 인터뷰를 하는 것도 강 기자님이 처음이에요. 평소 저를 잘 알던 지인들조차도 한데 모아놓은 이 상패를 보면 특별한 감상에 젖더라고요. 다들 '이렇게 많은 상을 받았을 줄은 몰랐다'고 해요. 활동한 기간이 있으니 어느정도 짐작은 했겠지만, 실제로 눈으로 확인하면 느낌이 다른 모양이에요. 가수인생을 살면서 쌓은 저의 분신같은 기록인 셈이죠.

송대관은 1976년 KBS MBC TBC(80년 KBS로 통폐합) 방송3사 가요대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가수왕에 올랐다. 그를 처음 가수왕에 올려준 노래는 '해뜰날'(75년)이다. 이 곡은 반복적이며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가사와 경쾌한 멜로디에 힘입어 당시 남진 나훈아 하춘화 등 대세 가수들을 제치고 인기몰이에 성공한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40여년간 가수로 활동하며 그가 각종 무대에서 받은 상은 200여개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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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내려놓고 욕심을 버리니 더 큰 행복이." 자택 베란다에서 포즈를 취한 송대관은 "팬사랑으로 다시 일어섰다"면서 "더 좋은 노래로 보답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이덕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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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4년 전만 해도 엄청난 빚더미에 쌓여 빈털터리가 됐는데 경제적 어려움은 좀 극복했나. 지금 살고있는 이 집은 누구 소유인가?

아마 개인이 100억대 이상 빚을 지고, 다시 경제적 자립을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기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개인 회생(일부 탕감)을 통해 법원이 정해준대로 착실히 빚을 갚았고, 현재 살고있는 보금자리도 새로 마련한 제 주택입니다. 가수로 살면서 누구보다 많은 재산을 가져봤지만 다 내려놓고 욕심을 버리니 더 큰 행복이 찾아오더라고요. 물론 이 모든 건 아낌없는 팬사랑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더 좋은 노래로 보답하고 더 감사하며 살고자 합니다.

송대관은 2009년 아내가 추진한 자신 소유의 충남 보령시 인근 토지개발사업이 잘못되면서 송사에 휘말렸다. 당시 미국발 금융위기와 겹친 데다 6만평에 달하는 이 토지(송대관이 2004년 71억원에 구입)는 잡종지로 분류돼 3층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 없었지만 기획부동산업자들한테 속아 분양사업을 진행하다 부작용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빌린 돈을 제때 변제하지 못해 사기혐의로 재판에 회부됐으나 2015년 11월 대법원으로부터 최종 무죄 판결을 받으며 혐의를 벗었다.

-국민가수라는 칭호가 무색하게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 세번의 힘든 고비를 모두 극복한 '오뚜기 인생'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한테나 살면서 세번의 운명적 고난을 맞는다고들해요. 또 동시에 그 고난을 극복할 기회도 주어진다고 하죠. 사람마다 그런 운명을 어떻게 헤쳐나가느냐는 다 자신의 몫입니다. 만들어낸 말일 수도 있지만 내 경우를 두고 곰곰 생각해보면 대체로 일리가 있는 것같기도 해요. 20대 초반 가수로 데뷔한 이래 저한테도 10년 주기로 세번의 힘든 고비가 있었고, 운좋게도 매번 잘 극복해 새 삶을 열었어요. 그래서 '송대관은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송대관은 1980년 가족이민(영주권을 받고가는 초청이민)을 떠나면서 10년간 가수활동을 중단했다. 경제적 어려움이나 스캔들이 아닌 자발적 이민이어서 자칫 영원히 가수의 길을 포기할 가능성이 컸다. 위기는 1990년대 후반에도 있었다. 서울 삼성동에 17채의 다세대 주택을 지었다가 국가부도위기(IMF)에 휩쓸려 재산의 상당부분을 날렸다. 부동산 개발 사기사건에 연루돼 방송활동을 중단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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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선택의 연속, 성공도 실패도 모두 내 몫." 송대관은 80년대 미국 이민 결행과 귀국, 그리고 이후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고비를 맞았지만 '변함없는 국민가수'로 우뚝 자리매김했다. /이덕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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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를 포기하고 미국 이민을 결행한 시기는 위기라고 말할 수 없지 않나. 사업가로 더 화려한 삶을 열 수도 있었을 것같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잖아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니까요. 이제 와서 의미 없는 가정법일 뿐이지만 가수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주 평범하게 살았거나, 정말 돈 복을 타고났다면 세계적인 갑부가 됐을 수도 있겠죠. 어쨌든 미국에서의 사업은 술술 풀렸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어요. 물질적으로 풍족해질수록 노래에 대한 욕망은 커지더군요. 다시 무대로 돌아오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죠.

송대관은 39년 전 돌연 처갓집이 있는 미국 이민을 결심한다. 당시는 '해뜰날' 등이 히트한 뒤 한창 인기를 누리던 시기다. 미국에서 그는 처가의 넉넉한 경제력을 등에 업고 사업가로 변신했다. 100만 달러를 투자한 초대형 슈퍼마켓에 이어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바로 인근에서 최고급 이탈리안 식당을 운영했다. 사업은 무난했지만 늘 허전했다. 이에 대해 송대관은 "가수 외엔 어떤 일도 나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며 귀국을 결심한 배경을 설명했다.

-그동안 부른 노래에는 다른 가수와 달리 유독 사연이 많다고 들었다. 직접 작사한 곡도 많은데 몇 곡이나 되는지 기억하나?

앞에 말씀 드린 대로 많은 굴곡의 삶을 살았잖아요. 가수는 부르는 노래를 따라 운명이 바뀐다는 말도 있어요. 무명시절 넋두리처럼 부른 곡이 히트하면서 사연많은 노래들의 첫 단추를 꿰기 시작한 것같아요. 직접 작사한 대표곡으로는 '세월이 약이겠지요' '해뜰날' '혼자랍니다' '정 때문에' '우리 순이' '차표 한장' '네박자' '한번 더' 등 20곡 정도 되는데 하나같이 스토리가 있어요. 팬들도 그동안 부른 200여곡 중 이런 진솔하고 깊이 있는 노래에 더 공감하는 것같더라고요.

1967년에 정통 트로트 '인정많은 아저씨'로 데뷔했다.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무명가수로 전전하다 자신의 신세와 처지를 애절하게 담은 '세월이 약이겠지요'(71년)를 불렀다. 직접 작사한 최초의 곡이다. 동정표를 얻으며 방송 출연량이 늘어날 즈음 '해뜰날'(1975년)을 부른다. 그가 "내 인생도 쨍하고 해뜰날 있다"는 심경을 담아 발표한 곡으로 당시 사회 분위기 속 민초들의 마음에 공감대를 얻으면서 대 히트를 기록한다. 이후 그가 직접 작사한 곡들은 대부분 자신의 심경을 빗댄 노래들로 채워지고, 어김없이 히트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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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관 태진아 콤비(원안)는 가요계 바늘과 실. 송대관은 태진아에 대해 "우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사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10여년전 SBS '가요대전' 출연 당시(왼쪽부터 박상철 태진아 송대관 장윤정 강진). /더팩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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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인생을 살며 수많은 시련을 함께 극복한 아내는 어떤 존재인가. 덕분에 부부금실이 더 돈독해졌다고 들었다.

대중 스타는 이미지가 생명이고, 보이는 대로 믿는 게 세상의 인심인 것 같아요. 아내가 추진하던 일이 잘못돼 법적분쟁에 휘말렸기 때문에 부부 사이가 안 좋을 거라고 믿는 분들이 많죠.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데뷔 이후 아내의 헌신적 내조가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존재하니까요. 매 번 위기 때마다 아내의 현명한 판단과 추진력, 아낌없는 위로와 격려가 큰 힘이 됐어요. 몇번의 힘든 과정을 겪으며 부부애는 더 깊어졌어요.

송대관의 아내 이정심 씨는 가요계에서도 여장부로 소문이 나 있을 만큼 강단진 데가 있다. 송대관이 방송 출연 정지 등 힘든 시기를 겪은 뒤 재기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준 지인들한테는 반드시 배려하고 보답해주는 걸로 알려져 있다. 연말 디너쇼나 전국 투어콘서트 등 연출자로 참여하고 있는 방송사 출신 이 모 PD는 "송대관 씨가 정에 이끌려 이해관계가 복잡해지는 경우가 더러 생기는데 그때마다 아내인 이 여사께서 깔끔한 교통정리로 문제의 소지를 없앤다"고 말했다.

-가수 태진아와는 바늘과 실처럼 가요계 '단짝 선후배' 사이다. 사람들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인지 협력하는 사이인지 헷갈려 한다.

아마 지금껏 가요계에서 우리가 보여온 콘셉트 때문이겠죠.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코미디언 중에 '이상해-이상한' '고 남철 남성남' 등이 콤비로 활동한 적이 있어요. 가수들이야 듀엣이 아닌 이상 각자 노래만 부르면 되지만 코미디는 때론 서로 주고받는 파트너십이 꼭 필요할 때가 있어요. (태)진아 동생과는 그래서 아주 특별한 사이라고 할 수 있죠. 후배 가수들이 그래요. 우리 둘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요. 경쟁구도와 협력관계를 적절히 유지해야 상생하는 동반자인 셈이지요.

송대관 태진아 콤비는 한국 가요계의 엔터테이너 쌍두마차로 정평이 나 있다. 둘이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티격태격' 다툼은 강렬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팬들도 이들의 악의 없는 다툼은 건강한 라이벌의 관계로 이해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두 사람은 어김없이 라이벌 콘서트로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엔 고전해학 '흥부놀부전'을 패러디한 드라마 콘서트 형식으로 발전, 지난 5월 서울과 청주에 이어 9월 광주 등 지방을 거쳐 연말 서울 앙코르 무대를 가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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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 이나 지금이나 체력은 그대로. 매일 두 세시간씩 20년째 헬스로 체력관리를 하고 있는 송대관은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전국 방방곡곡을 뛰어다닐 수 있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이덕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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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건강관리에 각별히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희를 넘긴 나이인데 주로 어떤 운동을 하는가.

가수한테 체력만큼 중요한 게 없어요. 무대 위에서 생기와 활력을 보여줄 수 있는 원동력이니까요. 20년째 헬스를 하고 있는데 밥을 먹고 숨을 쉬듯 거의 매일 꼬박꼬박 반복합니다. 이 나이에 전국 방방곡곡을 뛰어다닐 수 있는건 이런 체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이에요. 겪어보니 습관이란 게 참 중요하더라고요. 좀 피곤하고 몸이 찌뿌둥 하다가도 2~3시간씩 근력운동으로 땀을 흘린 뒤 샤워를 하고나면 말짱해져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체력만큼은 자신있어요.

송대관은 자신의 공언대로 과연 팔과 다리, 가슴 근육 등 몸이 탄탄해보였다. 그는 "무대 위에 서 있을 때를 빼면 헬스장에서 땀을 흘릴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가끔 아내를 포함한 지인들과 골프모임에 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그는 "친목을 위해 더러 피할 수 없는 자리가 있다"면서 "헬스와 비교하면 골프는 그저 숨쉬기나 스트레칭 정도의 가벼운 운동에 불과하다"며 헬스마니아다운 예찬론을 펼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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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관은 유명한 독립운동가 자손이다.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2006년 광복 61주년 기념 보신각 타종 행사에도 참석했다. 사진은 송대관이 지난해 '제 4회 THE FACT와 함께하는 호국보훈의 달 기념 현충원 나라사랑 걷기대회'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더팩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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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관은 자칫 모든 걸 포기할 수도 있을 절망의 상황이었지만 노래를 통해 웃음을 되찾았다. 그는 "가수로 팬들과 공감하고 노래할 수 있는 지금 순간을 맘껏 즐기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앞으로의 꿈도 소박하다. 그는 "가요계 대선배로서 후배들을 다독이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는 데 일조하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빚더미에 눌려 힘든 시기에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후배를 위해 남다른 애정을 쏟는 모습을 보였다. 송대관은 3년 전 가수 방실이가 뇌경색으로 10년째 장기 투병 중인 인천 강화도의 한 요양병원을 찾아 병원치료비 1000만 원을 건넸다. 가요계에서는 "당시 송대관의 처지를 감안하면 평소 1억원보다 값진 의미를 던져줬다"고 말하기도 했다.

송대관은 유명한 독립운동가 자손이다. 그의 친할아버지 송영근 선생은 1919년 전북 태인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등사해 나눠주다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2년 그의 공훈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송대관은 독립유공자 후손 자격으로 2006년 광복 61주년 기념 보신각 타종 행사에도 참석했다.

부동산투자 사기사건에 휘말려 방송활동을 할 수 없던 무렵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억울함을 풀고 싶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시 마주한 송대관은 표정부터 달랐다. 모든걸 다 내려놓은듯 차분하고 평온했다. 그는 "누구나 겪는 희로애락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사는 게 행복"이라고 말했다. 특유의 정겨운 미소가 그의 자택 베란다에 활짝 꽃을 피운 기화요초만큼이나 밝고 환했다.

ee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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