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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아파하는 형 모습이 내 미래” 극단적 선택한 희귀병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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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추적] 형 숨지고 동생 전신 마비

20여년 베체트병…둘다 시각장애 1급

70대 노부모 집 비운 사이 참극 벌어져

경찰 “신병 비관해 동반 자살 시도” 추정

중앙일보

지난 17일 전북 남원시 한 아파트 13층에서 이 집에 사는 A씨(47)가 투신했지만, 주민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 당국이 설치한 에어매트 위에 떨어져 목숨을 건졌다. [사진 전북소방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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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병을 앓던 중년 형제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형은 숨졌고, 동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불구의 몸이 됐다. 함께 살던 70대 노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벌어진 비극이다. 이들 형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1일 전북 남원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17일 오후 7시 42분쯤 남원시 조산동의 한 아파트 13층에 사는 A씨(47)가 발코니에서 뛰어내렸다. A씨는 소방 당국이 설치한 에어 매트 위에 떨어져 목숨을 건졌다. 주민이 난간에 매달린 A씨를 보고 119에 신고한 덕분이다. 하지만 A씨는 목뼈 2개가 부러져 전신이 마비됐다. 병원 측은 “재활 훈련을 하면 상반신 마비는 풀릴 수 있지만, 하반신 마비는 지속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거실에서는 형 B씨(51)가 이불을 덮고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 조사 결과 형제는 수십년간 베체트병을 앓았다. 동생은 3기, 형은 말기였다. 베체트병은 입안과 성기 등에 궤양이 발생하고, 시력을 잃을 수 있는 만성 염증성 질환이다. 다섯 형제 중 숨진 B씨가 큰형이고, 투신한 A씨가 셋째다.

경찰은 A씨 형제가 신병을 비관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형이 부탁해 동생이 살인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은 다이어리에 각자 큼지막한 글씨로 유서를 7~8장씩 쓴 것으로 조사됐다. “어머니, 아버지 죄송해요” “이만 생을 마감합니다. 이게 최선입니다” “제수씨와 잘 살아라” 등 부모와 남은 형제들에게 일일이 유언을 남겼다. 경찰은 “글씨체가 서로 달라 형은 형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유서를 쓴 것 같다”고 했다.

A씨 형제는 부모와 함께 인천에서 거주하다 지난 2월 어머니 고향인 남원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모두 직업이 없지만,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아니었다.

경찰에 따르면 숨진 형은 25년 전쯤 베체트병에 걸렸다. 동생은 3~4년 뒤 같은 병이 발현됐다. 나머지 가족 중 베체트병을 앓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A씨 형제는 모두 1급 시각장애인이다. 베체트병 때문에 시력이 나빠졌다고 한다. 경찰은 “형은 집 안에서 화장실을 더듬어서 갈 정도이고, 동생 시력은 3~4m 앞을 뿌옇게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둘 다 미혼이고, 직장 생활을 한 기록은 없었다.

A씨 형제의 마지막 진료 시점은 파악되지 않았다. 다만 병원에서 몇 달치 약을 한꺼번에 처방받아 복용해 왔다. 부모와 함께 살았지만, 동병상련(同病相憐)인 동생이 주로 형을 보살폈다. 바깥 외출을 거의 못해 형제끼리 의지했다.

사건 당일 노부모는 오후 4시쯤 남원 집을 나섰다. 타지에 사는 다른 아들 집에 가려고 기차를 탔다. A씨는 사건 직전 가족에게 전화해 “너무 아파하는 형과 함께 죽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경찰은 동생이 투신 소동을 벌이기 3~4시간 전에 형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아파트에는 이들 형제가 매일 먹어야 할 약봉지 30여 개가 발견됐다. 경찰은 빈 봉지도 상당수 있는 점으로 미뤄 숨진 형이 약 일부를 먹은 것으로 추정했다.

현재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동생은 정확하진 않으나, 의사소통은 가능하다고 한다. A씨는 경찰 구두 조사에서 “나는 약을 먹지 않았다. 아파트에서 떨어진 기억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경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은 다른 형제들은 “큰형은 지난해 한 차례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고, 셋째 형은 큰형 모습이 자기 미래 모습이라고 여겨 극단적 선택을 한 것 같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경찰은 20일 B씨 사인을 밝히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시신 부검을 맡겼다. 남원경찰서 관계자는 “형이 약만 먹고 사망할 수 있는지, (숨지는 과정에서) 동생의 다른 행위가 있었는지는 부검 결과가 나와 봐야 안다”며 “동생이 회복하는 대로 사망 경위 등을 조사하겠다”고 말했다.

남원=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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