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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단체 익명 후원·기부
일방적 무통장 입금까지
성폭력상담소만 매달 5명
‘진지한 반성’ 양형에 영향
변호사 업계선 ‘권장’ 관행
여성단체 등 문제 제기에
법원 “법관 재량” 선긋기
“제가 성폭력 가해자로 재판 중인데요. 감형을 받고 싶어서 후원하려고요.”
한국성폭력상담소 박아름 활동가는 이달 초 성범죄자의 후원 제안 전화를 받았다. 박 활동가에겐 지겨운 전화였다. 그는 “가해자의 기부는 받지 않는다”고 설명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감형을 목적으로 기부·후원하는 성범죄자가 매달 5명 이상이 나온다고 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도 2015~2017년 성범죄자에게 기부·후원 제안을 받았거나 납부가 확인된 사례는 모두 101건이라고 밝혔다.
성폭력 가해자가 성폭력 관련 시민사회단체에 기부하는 이유는 뭘까. 일부 법관이 성범죄를 일으킨 피고인들의 사회단체 기부·후원 영수증을 양형기준상 감경요인인 ‘진지한 반성’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ㄱ씨는 2011년 8월~2012년 2월 이웃집에 사는 미성년 여성 지적장애인을 수차례 추행했다. 2013년 12월 전주지법 형사2부(재판장 은택 부장판사)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며 “피해자에 대한 피해 회복에 갈음해 사회복지단체에 800만원을 기부했다”고 했다. ㄴ씨는 2010년 1월 청주의 한 찜질방에서 7세 여아를 성추행했다. 지난해 11월 청주지법 형사11부(재판장 소병진 부장판사)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며 “범행에 대한 반성과 재범 방지를 다짐하며 한국피해자지원협회에 200만원을 기부한 점 등을 유리한 양형사유로 참작했다”고 했다.
여성단체들은 이런 양형기준을 두고 수차례 문제를 제기했다. 법원은 법관 개인의 재량일 뿐이라고 한다. 2017년 10월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에 회신한 공문에서 “양형기준은 법관이 형량을 정함에 있어 참고해야 하지만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않는 권고적 기준”이라고 했다. 양형위원회는 “다만 기부 사실을 유리한 양형 요소로 삼을지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이후에도 비슷한 판결은 이어졌다.
변호사업계도 성범죄 사건을 수임하면 관행적으로 기부를 권한다. 한 형사전문 변호사는 “‘성범죄 전문’이라고 홍보하는 일부 법무법인이 기부 전략을 주도하는 것으로 안다”며 “증거가 확실하면 무죄 주장보다 형을 줄이는 전략이 유리해 재판부의 선처를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회원 수가 9300여명인 ‘성범죄 전문 상담 카페’에는 “기부도 양형자료가 됩니다. 저는 초록우산과 굿네이버스에 했네요” “범행 후 반성으로 하시는 것이라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등의 댓글이 보였다. 현직 변호사가 쓴 <성범죄사건 경찰조사에서 재판까지 대응전략>에서도 “기부 및 봉사 활동으로 재판부에 반성의 뜻을 전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사회단체들은 후원자·기부자의 정체가 성범죄자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난감하다. 대부분의 여성단체는 성범죄자를 인지하면 기부나 후원이 여성의 피해 회복이라는 모금 목적에 맞지 않아 거부한다. 100만원 이상 고액을 일시 후원하고 급하게 영수증을 요구하면 성범죄자임을 의심하고 기부 이유를 확인한다.
한계가 있다. 성범죄자들은 단체가 기부를 거부할 수 없도록 후원계좌에 고액을 입금한 뒤 무통장입금 내역을 법원에 제출하기도 한다. 재판에서 감형되지 않으면 기부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선의의 기부자까지 의심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고통스럽다”며 “성범죄자의 일방적인 기부를 법원이 ‘진지한 반성’으로 받아들여 감형한다면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고 변화할 수 없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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