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인생 처음, 하루 아무 것도 안해보니…미세먼지 잔뜩 낀 뇌 씻은듯, 처음 느껴본 개운함]
집 방구석에 드러누운 기자가 17일 하루 종일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하고 있다. 물은 생존해야 해서 떠놓았다. 양말은 가만히 있으니까 추워서 신었다. 뚱뚱한 몸을 수용 못한 니트에 뱃살이 살짝 드러났는데, 기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 블러 처리를 했다. CCTV처럼 찍어봤지만 사실 삼각대를 창틀에 올려놓고 찍은 것이다./사진=남형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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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뜨니 아침 6시30분. 벌떡 일어나 분주히 준비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수면 바지와 목 늘어난 니트를 그대로 입고, 터덜터덜 일어났다. 머리 맡에 뒀던 스마트폰은 전원을 끈 뒤 쇼파에 던져 버렸다. 무언가 쾌감이 느껴졌다. 물통에 물 500㎖(밀리리터)를 넣어 챙겼다. 그리고 빈방으로 향했다. 이어 바닥에 대(大)자로 뻗었다. '최애(가장 사랑하는) 자세'였다. 세수도, 양치질도 안했다. 떡진 채 까치집이 된 머리도 놔뒀다.
힘을 쭉 뺀 뒤 천장을 응시했다. 초점이 흐려졌다. '매직아이(1980년대 생들은 앎)'처럼 상(像)이 겹쳤다. 갑자기 왼쪽 발목이 간지러웠다. 오른쪽 발가락으로 긁었다. 시계 소리가 째깍째깍, 코 끝에 숨만 오갔다. 똑바로 누운 자세가 지루해져, 옆으로 몸을 뉘였다. 한쪽 팔로 머리를 지탱했다. 학창시절, 독서실서 잘 때 자주하던 자세다. 계획도, 생각할 것도, 해야할 것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편안했다. 살짝 졸음에 겨워 눈을 감았다. 그랬다. 최선을 다해 아무 것도 안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살면서 단 하루도 아무 것도 안한 날이 없었다. 1~2살 아기 때를 제외하고는. 유년시절엔 어린이집·유치원을 다녔고, 초·중·고 학창시절엔 학원·학교·독서실을 오가며 공부하느라 바빴다. 대학생 땐 강의에 시험 벼락치기에 연애 하느라, 취업준비생 땐 그냥 당연히 바빴다. 기자가 된 뒤엔 밤낮, 평일·주말 없이 더 바빴다. 가족·지인들에 늘 "바쁘다"를 달고 살았다.
웹툰 작가 조석의 '마음의 소리'에서 좋아하는 가장 좋아하던 짤 중 하나. 바쁠 때 위안이 됐던 짤이다. 저 표정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사진=웹툰 마음의 소리 캡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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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 속은 더 바빴다. 아무 생각을 안해본 지 오래됐다. 길을 걸으며 '기사거리가 없나' 생각했고, 오늘 뭐 할지, 내일 뭐 할지, 주말에 뭐 할지, 잘 살고 있는지 등을 생각했다. 회사에선 기사를 놓치는 게 없는지, 팀원들이 잘하고 있는지, 다음 체헐리즘은 뭘 할지 등으로 피로했다. 벅찬 생각들에 치이다 퇴근할 때쯤엔 머리가 안개낀 것처럼 벙벙했다. '생각할 사(思)'가 아니라, '죽을 사(死)'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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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처음, 아무 것도 안하기로 결심하다━
우연히 본 영화 '곰돌이푸 다시 만나 행복해'. 주인공 크리스토퍼 로빈이 어렸을 때 같이 놀던 푸와 다시 만나며 잊고 살았던 중요한 것들을 깨닫는 내용이다. 유치할 것 같지만, 지친 어른들을 치유해주는 영화란 생각이 들었다./사진=곰돌이푸 다시 만나 행복해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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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곰돌이 푸'가 영감을 줬다. 지난 주말 영화를 봤을 때였다. 귀여운 푸가 무심한듯 이렇게 말했다. "아무 것도 안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지.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또 이렇게도 말했다. "아무 것도 안하다 보면, 대단한 뭔가를 하게 되지." 그렇게 말하는 푸는 정말 아무 것도 안했다. 그저 꿀을 먹고, 기차를 타고 가며 보이는 것들을 그대로 외쳤다. 그런데 행복해보였다. 별 것 아닌듯 한 짧은 대사들이 영화가 끝나도 계속 맴돌았다. 지친 마음에 위로가 됐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안해보기로 결심했다. 36년 만에 처음으로.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이 정돈 괜찮은 선물이지 싶었다. 그런 뒤 알리고 싶었다. 게으름 한 번 피울줄 모르고 부지런한 이들에게. 실제 우리 국민들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노동시간 2위(2071시간, 2015년 기준)에, 직장인 88.6%가 '번아웃(직무에 과도하게 몰입하며 생긴 스트레스로 생긴 우울증 등으로 일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에 시달린다.
배우 유해진이 나온 한 금융사 광고 화면. '아무 것도 안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하고 싶다'는 문구가 직장인들 공감을 이끌며 인기였다./사진=삼성카드 광고 캡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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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가 필요했다. 노는 것처럼 안 보이려 절에서 하겠다 했다. 세 곳의 '템플 스테이(절에 머물며 휴식 등을 취하는 것)'를 알아봤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안할 순 없다며 다 거절했다. 예불, 참선, 108배 등을 해야한다는 것. 그래서 '별 수 없이' 집에서 아무 것도 안하기로 했다. 계획대로 되고 있었다(씨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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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스트레스 多, "생각이 많네요"━
한국뇌과학연구소 협조로 '뇌파검사'를 하는 기자. 머리띠에 붙은 전극을 통해, 뇌파가 실시간으로 그려졌다./사진=한국뇌과학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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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현재 상태가 어떤지 궁금했다. 스스로 판단하기엔, 상당히 지쳐 있었다. 집에서 주로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았고, 잠을 자고 일어나도 개운치 않았다. 말수가 서서히 줄었고, 표정은 굳어갔다. 웃음도 시원스레 나오지 않았다. 일의 성과를 거둬도, 행복하단 느낌이 예전보다 덜했다. 그냥 좀 쉬고 싶단 생각을 자주 했었다.
보다 객관적 판단이 필요했다. 한국뇌과학연구소 협조로 '뇌파검사'를 진행했다. 처음 해보는 검사였다. '뉴로피드백(뇌파 정보를 통해 뇌기능을 강화하는 것)'이란 원리라 했다.
전극 4개가 달린 머리띠를 한 뒤, 컴퓨터 화면을 봤다. 시키는대로 눈을 감았다 떴다 했다. 화면에 뇌파 모양이 3D 그래프로 그려졌다. 육체적 스트레스(긴장도)는 좌뇌 8.8, 우뇌 10.4로 정상 범위였다. 하지만 정신적 스트레스(산만도)는 좌뇌 1.4, 우뇌 1.6으로 높은 편(1 이하가 바람직)이었다.
한국뇌과학연구소 협조로 '뇌파검사'를 한 뒤 나온 결과지. 육체적 스트레스는 평균 정도엿지만, 정신적 스트레스는 평균 보다 높은 것으로 나왔다. 수치가 높을 수록 불안하고 스트레스가 높은 것이다./사진=한국뇌과학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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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본 백기자 뇌과학 박사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높은 편"이라며 "공부는 잘했을 것 같은데(뿌듯), 특히 생각이 너무 많다"고 진단했다. '족집게'라며 감탄했다.
자기조절능력도 분석했다. 뇌파가 알파(휴식력), 주의력(SMR), 집중력(베타-) 세 가지인데, 각각 9, 36, 22로 나왔다. 평균 25가 바람직하고, 15 이하는 뇌 기능을 전체적으로 저하시킬 수 있다고 했다. 기자는 주의력(관계성, 사교성 등)은 높고, 집중력(한 가지에 몰입하는 능력)은 좋은 편, 휴식력(심리적 안정성, 정신적 피로도)이 크게 낮았다. 피로에 지쳐 있는 상태였다. 백 박사는 "같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저항하고 회복하는 정도가, 다른 사람에 비해 상당히 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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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도, 심장도, 위장도 푹 쉬었다━
17일 오전 9시쯤, 방안에서 엎드린 채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기자. 처음에는 온갖 잡념이 많아 가만히 있는 게 힘들고 시간이 더디게 갔다./사진=남형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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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의 날이 밝았다. 아무 것도 안하는 날이었다. 17일 하루(아침 7시부터 저녁 7시,12시간)가 목표였다. 전날 저녁부터 맘이 가벼웠다. 아무 것도 안한다니, 생각만으로 좋았다. 원칙도 몇 가지 정했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움직임을 최소화한다(배변 활동만), 스마트폰과 TV·오디오 등을 끈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물만), 가급적 잠을 피한다(잠만 잘 수 있으므로) 등.
'누워서 떡먹기' 같았는데, 막상 해보니 쉽잖았다. 누워서 가만히 천장을 응시했는데, 수분 만에 좀이 쑤셨다. 몸이 계속 들썩거렸다. 지렁이처럼 왔다갔다, 좌불안석이었다. '코코코 XXX', '초특가 XXX' 등 한때 세뇌 당했던 광고 음악이 무한 재생됐다. 이어 '쇼XX머니'에 나왔던 한 랩의 훅(후렴구)도 계속 맴돌았다. '이걸 어떻게 기사로 풀지, 기록해야 하는데, 이대로 출근하지 말아야하나' 등의 생각도 줄을 이었다. 꽤 한참 만에 시계를 봤다. 겨우 30분이 지나 있었다.
안되겠다 싶었다.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했다. 몸과 마음을 가라 앉혔다. 쉼 없이 달려온 시간들을 생각했다. 몸 하나하나에 집중해봤다. 뇌는 오래 전부터 공부하느라, 시험 보느라, 말하고 생각하느라, 일하느라 늘 수고가 많았다. 심장은 안 뛰면 바로 숨 못 쉬니 두말할 것 없었다. 위장은 라면을 먹어도 많게는 다섯 개씩 먹는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길이었다. 손을 떠올리니 만원 버스 손잡이가, 발을 생각하니 그간 부지런히 걸었던 수많은 길들이 보였다. 허리는 10시간씩 앉아 있느라 늘 곤욕이었다. 안경도 벗었다. 눈도 쉼이 필요했다.
아무 것도 안했을 때 휴대용 심전도기를 통해 심전도를 찍으니, 낮은 맥박 수치와 안정된 곡선이 그려졌다. 잘 쉬고 있음이 느껴졌다./사진=남형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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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푹 쉬게 해주는 게 처음이었다. 언젠가 봤던, 혜민 스님의 명상 영상을 떠올렸다. 몸과 마음에 집중하며 '참 고맙다'고 말을 건네라 했다. 속으로 떠올리며 '고생했다, 고맙다'라고 다독였다(오글 주의).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스며드는 듯 했다.
휴대용 심전도기로 맥박을 재봤다. 60~65 사이를 맴돌았다. 심전도 파동도 안정돼 보였다. 평소 맥박을 쟀을 땐 70~80 사이를 오갔다. 긴장할 때면 파동이 거칠었었다. 몸이 푹 쉬고 있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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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살았던, 미뤄뒀던 생각들 ━
거실 창틀에 머리를 올려 놓은 기자가 아무 것도 안하며 하늘을 보고 있다. 먼지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광합성을 하니 좋았다. 이웃집 개가 컹컹 짖길래 같이 웡웡 짖으며 싸워봤다. 목소리 큰 이가 이긴다고, 결국 기자가 이겼다./사진=남형도 기자 삼각대 셀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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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12시, 해가 남중고도에 떠 있었다. 점심 때가 됐지만 배가 안 고팠다. 에너지를 쓸 일이 별로 없어 그런듯 했다. 가을 바람이 맞고 싶어 거실로 나와 창문을 열었다. 한쪽 벽에 몸을 기댄 뒤 바깥을 봤다. 하늘 빛이 이렇게 파랬나 싶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청량했다. 햇볕을 맞으며 그동안 못했던 광합성을 늘어지게 했다. 이웃집 강아지가 짖는 소리가 들려, 같이 짖기도 했다. 강아지도 어이 없었는지, 짖는 걸 멈췄다. 기자의 승리였다. 실소가 터졌는데, 모처럼 지어본 개운한 웃음이었다.
고요한 호흡을 느끼고 있자니, 소중하지만 잊고 살았던 것들이 새삼 떠올랐다.
아내에겐 고마움, 그리고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냥 세상 다른 누군가가 아닌, 아내라서 고마웠다. 이렇게 잘 맞는 사람이 또 없을거라 장담했다. 결혼해서 훨씬 더 행복해졌다. 늘 먼저 생각해줬고, 사랑 받는 기분을 들게 해줬다. 소소하지만 고마운 것들, 그런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미안한 마음도 컸다. 아내 일이 늘 고단했다. 출퇴근길엔 만원 버스·지하철에 시달렸다. 아내도 아무 것도 안하면 좋을텐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또 연애할 때 약속한 게 있었다. 화나서 싸우는 순간에도 먼저 이야기를 들어주겠다 했다. 연애할 땐 잘 지켰지만, 결혼한 뒤 잘 지키지 못한 적이 많았다. 내 얘기가 앞섰고, 눈물 흘리게 한 적도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가슴이 저렸다.
부모님 생각도 났다. 어느샌가 나이가 부쩍 들어 계셨다. 매번 바쁘다며 연락도 잘 못하는, 무심한 아들이었다. 자주 찾아뵙겠다 했지만, 일상에 지쳐 매번 미뤘었다. 어머니와 데이트 하자고 한 약속, 아버지와 술 한 잔 하자 한 약속을 아직도 지키지 못했다.
반려견 똘이와 코스모스. 합쳐서 코똘이라 이름 붙였다. 산책을 하다가 기분이 좋은지 웃고 있다./사진=남형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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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장인어른을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부족한 사위인데 늘 과분한 사랑을 주셨다. 장모님은 추울 것 같다며 겨울 수면바지까지 챙겨주셨고, 장인어른은 좋은 말씀들로 늘상 열정을 불어넣어 주셨다. 인생의 가장 소중한 인연이 됐다.
반려견 똘이도 떠올랐다. 늘 많이 못 놀아줘 미안했다. 어쩌다 오랜만에 오면, 반가워 어쩔 줄 모른다. 귀를 펄럭 거리며 다리에 매달린 채, 직립보행을 한다. 몸으로 놀아주는 걸 좋아하는데, 저질 체력이라 많이 뛰질 못했다. 강아지들의 시간은 사람보다 몇 배나 빠르단 걸 생각하면 늘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죽마고우(竹馬故友: 어릴 때 아주 친했던 벗)들. 30년지기 김모씨(36)는 두 아들의 아빠가 돼 못 본지 2년 정도 됐다. 전모씨(36)도 동네에 놀러올 때 연락하라 했는데, 한 번도 못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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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안해도, 행복했다 ━
뭔가 깊은 상념에 잠긴 것 같지만 사실 아무 생각도 안하고 있다. 편안한 순간이다./사진=남형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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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시간은 비교적 잘 갔다. 졸다가, 멍 때리다가.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했다. 해가 남중고도를 지나 오른쪽으로 넘어가는 걸 천천히 지켜봤다. 한기가 몰려와 양말을 신은 것 말고는 별다른 행동을 안했다. 오후 5시쯤 허기가 몰려왔지만 버틸만 했다. 잠도 별로 안 왔다. 지루할 때면 숨소리에 귀 기울였다. 마음이 편안하고 너그러워졌다. 위층 층간 소음이 들리면 늘 신경이 곤두섰는데, 그날은 정말 괜찮았다. '이 생활이 체질에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녁 7시쯤 체험을 마쳤다. 12시간 만에 스마트폰을 켜니 메시지가 300개가 넘게 와 있었다. 답장할 타이밍조차 늦은 때였다. 차라리 맘이 편했다.
머리가 무척 가볍고 개운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상쾌함이었다. 머릿 속 '미세먼지'를 공기청정기로 다 빨아들인 느낌이었다. 뇌가 홀로 두둥실, 우주를 헤엄치는 것도 같았다. 깊은 산 속 암자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답답한 방안에 갇혀 있던 몸이, 처음 바깥에 나온듯 싶기도 했다. 늘 더부룩했던 속도 편안하고, 숨도 예전보다 크게 쉬어졌다. 멍 때리는 것도 한결 편했다. 잡생각이 다 빠져나간듯 했다.
웃음이 편안하고 자연스레 나왔다. 많은 생각에 눌려 있던 감정들이, 그제야 풀린 것 같았다. 주위서도 표정이 좋아졌다고 했다. 아내도 그렇게 말하며 웃었고, 다음날(18일) 출근하니 후배들도 그렇게 말했다. 그동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싶었다. 고장났던 마음을 고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행복은 늘 부지런히 노력해야 얻는 걸로 알았다. 그래서 바쁘고 치열하게 살았다. 36년, 1만3140일, 31만5360시간을 채찍질하면서 보냈다. 그러다 처음으로, 온전히 12시간을 무(無)로 채웠다. 쉴 새 없이 돌아갔던 몸이 온전히 숨을 쉬며 웃었다. 그리고 잊고 살았던 소중한 걸 알게 됐다. 주먹을 꽉 쥐지 않고, 때론 쫙 펴도 행복할 수 있단 걸 알게 됐다. 힘을 빼는 법을 배웠다. 소중한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기계도 오래 쓰면 한 번쯤은 고장난다. 그럴 땐 가동하지 않고 그냥 놔둔다. 하물며 사람 마음은 어떨까. 뭔가 뒤죽박죽 뒤엉켜있다면, 매일 열심히 살아도 행복하지 않다면.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온전히 아무 것도 안하는, 뜻밖의 선물 같은 하루 말이다.
김선우 시인의 시집 '아무 것도 안하는 날'의 시 '아무 것도 안하는 날'. 오늘 하루 아무것도 안 했다면 엄청 어려운 일을 해낸거라고 했다. 그 말에 공감했다./사진=남형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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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epilogue). 아무 것도 안하며 깨달은 마지막 생각. 고등학생 땐 대학교에 가면 행복할 것 같았다. 대학생 땐 취업하면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막상 직장인이 되니 연봉이 더 높아야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늘 행복은 인생 어디쯤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삶 대부분은 '과정'이다. 언젠가 올 행복을 기다리며, 수많은 '오늘'을 희생하고 있는 건 아닐지.
그리고 곰돌이 푸와 주인공의 마지막 대화.
푸: "무슨 요일이지?"
주인공: "오늘이야."
푸: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이네."
그리고 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젠 길을 잃지마, 크리스토퍼 로빈."
남형도 기자 hu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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