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세] 해삼 따고 멜론 서리…日 야쿠자 어쩌다 좀도둑 됐나

돈줄 끊기자 생계형 좀도둑 신세 전락

거액 보호비 뜯던 전성기 막 내려

“시대가 어려워지고 있다. 더이상 명성에만 의지할 수 없다.”

2013년 7월 일본 야쿠자(조직폭력배) 전용 잡지인 ‘야마구치구미 신보’에 이런 내용의 글이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최대 규모의 야쿠자 조직 야마구치구미의 두목 시노다 겐이치였는데요. 전국 2만여 명의 조직원들에게 뿌려진 8쪽짜리 잡지에서 우두머리가 “야쿠자로 먹고사는 시대는 끝났다”는 위기의식을 드러낸 겁니다.

일본 최대 규모의 야쿠자 조직 야마구치구미 6대 조장(두목)인 시노다 겐이치.[중앙포토]

최근에는 야쿠자가 다소 모양 빠지는 사건에 연루됐다는 소식이 종종 들려옵니다. 돈에 쪼들려 멜론 서리에 나서고 해삼을 캐러 다닌다는 건데, 가오(체면)와 간지(멋)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야쿠자답지 않죠. 자금난 앞에선 이들도 별수 없는 걸까요.

야쿠자가 100년 넘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세계 최대 기업 부럽지 않은 규모의 수익이 한몫했다고 봐야 할 텐데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고 보면 쓸모 있는 신기한 세계뉴스-알쓸신세]에서 이번에는 야쿠자의 세계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야마구치구미가 조직원 전용으로 발행하는 잡지 야마구치구미 신보. [마이니치신문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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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자의 아성이 무너졌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에 따르면 최근 일본에서 수확을 앞둔 농가가 야쿠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데요. 돈이 궁한 야쿠자들이 내다 팔려고 멜론이나 포도, 망고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겁니다. “멜론 100개를 훔쳐봤자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고작 30만엔(약 303만원)”이라는 데도 말이죠.

공들여 재배한 농작물을 사수하려는 농민들의 노력도 눈물겹습니다. 좀도둑 야쿠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순찰대까지 구성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바다에서도 한바탕 전쟁입니다. 칼 대신 스쿠버 장비로 무장한 야쿠자들이 고속 보트를 타고 나타나 해삼 잡기에 열을 올리면서요. 어두운 밤이면 해상보안정과 야쿠자 간 추격전이 벌어진다고 하는데요. 야쿠자들은 해삼에서 각성제 성분을 추출한 뒤 나머지를 가공업체에 넘겨 부당이득을 취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에서 해삼을 불법 포획하다 잡히면 최대 6개월의 징역형에 처하고, 10만엔(약 101만원)의 벌금을 내야 하는데요. 워낙 빠른 속도로 도망치는 데다 드물게 잡히더라도 해삼을 바다로 던져 버려 증거물을 없애는 탓에 적발에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니라고 하네요. 영국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지난해 야마구치구미 두목은 60t의 해삼을 밀렵한 것과 관련 1억엔(약 10억원)의 벌금을 부과받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50대 야쿠자 2명이 나고야시 슈퍼마켓에서 수박, 쌀, 장어 등 7만6000엔(약 77만원)어치의 물건을 훔치려다 경찰에 붙잡힌 적도 있죠. 이들은 야마구치구미에서 떨어져 나온 고베 야마구치구미 소속이었는데요. 그중 한 명이 당시 밝힌 범행 동기는 “조직이 너무 빈곤하다. 음식을 훔칠 수밖에 없다” 였습니다. 이뿐인가요. 홋카이도에서는 3대 야쿠자 조직인 스미요시카이 40대 간부를 포함한 3명이 연어 37마리와 연어 알 40㎏ 때문에 쇠고랑을 차는 일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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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 되는 사업” 이탈자 해마다 늘어

한때 야쿠자를 ‘총을 가진 골드만삭스’라 묘사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조 원의 돈을 굴리며 일본뿐 아니라 미국의 금융시장까지 뒤흔들 정도로 세계의 큰손 행세를 했기 때문인데요.

일본 요미우리신문에서 범죄 전문기자로 활동했던 제이크 아델스타인은 “도박에 매우 능숙한 야쿠자에게 일본 주식 시장은 거대한 카지노와 같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야마구치구미의 연 수입은 66억 달러(약 7조3600억원)에 달한다는 미국 경제지 포춘의 추산도 화제가 됐었죠.

하지만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진 데다 정부가 단속과 제재를 강화하며 야쿠자의 돈줄을 옥죄자 위기가 찾아옵니다. 2011년 일본 전역에서 시행된 폭력단배제조례는 특히 큰 전환점이 되는데요. 야쿠자에게 이익을 제공하는 이를 처벌하는 내용을 담았는데 이 때문에 술집이나 음식점 등에서 자릿세와 보호비 명목의 돈을 뜯기가 어려워졌고, 기업들도 이들과 거래를 거부하면서 행동반경이 좁아진 겁니다. 야쿠자 관계자는 은행 계좌를 신설하지 못하고 보험에도 들 수 없으며 임대주택을 계약하기도 어렵습니다. “밥벌이가 안되는 직업”이란 얘기가 나오는 이유죠.

손가락을 자르는 것은 야쿠자 특유의 자해 방식이다. [AFP=연합뉴스]

제프 킹스톤 미국 템플대학 아시아 연구소 교수는 “일본 기업들이 ‘잃어버린 10년’의 결과로 겪은 어려움과 똑같은 감정을 현재 지하세계가 느끼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상납금을 마련하지 못해 조직을 떠나는 이들은 해마다 느는 데다 “야쿠자로서 메리트가 없다”며 젊은 층도 외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일본 경찰청에 따르면 2016년 말 야쿠자 수는 전년보다 2000명 더 줄어든 1만8100명으로 집계됐는데요. 관련 통계를 작성한 1958년 이래 처음으로 2만명 이하로 떨어진 겁니다. 역대 최저치로 10만여명으로 정점을 찍었던 1963년과 비교하면 대폭 쪼그라든 셈이죠. 이제 야쿠자 세계는 일부 승자만이 생존하게 되는 일강 체제로 변했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실정입니다.

남아 있는 조직원 가운데 20대는 5%도 되지 않는 반면, 50대 이상은 10명 중 4명(40%)을 차지할 정도로 조직도 늙어버렸습니다. 버티다 못해 문 닫는 곳도 생겨났겠죠. 한때 100여명을 거느렸던 야쿠자 조직 호시가와구미의 두목은 “이제 야쿠자로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라면서 조직 해산을 선언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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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풍파 차가워”

야쿠자를 관둬도 냉혹한 현실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른바 ‘5년 규칙’이라고 하는데요. 폭력단배제조례에 따라 야쿠자를 이탈해도 5년가량은 관계자로 여겨져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 생활을 하기 어렵다는 전언입니다.

야쿠자. [영국 텔레그래프 캡처]

3년 전만 해도 야마구치구미 계열 조직에 몸담아 많게는 30명 이상의 부하들을 거느렸던 60대의 전 야쿠자 두목은 최근 일본의 저널리스트 이마니시 노리유키와의 인터뷰에서 “조직을 해산하고 나오니 이제는 ‘전 야쿠자’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닌다. 세상 풍파가 얼음장 같다”고 토로했는데요.

“경찰은 야쿠자 관두라고 법을 엄하게 하는데 현실은 관둬도 야쿠자였으니 회사에선 받아주지 않고, 일이 없어 결국 생활보호수급자로 먹고산다”는 겁니다. 야쿠자 생활을 청산했음에도 불법 약물 매매에 손을 대는 등 하는 일은 야쿠자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이들도 있다고 하네요.

야쿠자의 사회 복귀 지원 문제가 과제로 떠오르자 해결사 역할을 자처한 지방자치단체도 생겨났습니다. 후쿠오카현은 야쿠자 출신을 고용하는 기업에 지원금을 준다네요. 도쿄에선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계좌 개설 등의 지원책을 검토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쁜 짓을 해온 이들을 왜 지원해야 하냐”는 반발이 있는 게 현실입니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옛 명성은 사라진 지 오래, 야쿠자의 수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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