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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가깝고도 먼` 존엄한 죽음…내 가족이라면 어떤 선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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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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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대 A씨는 위암 말기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지만 한사코 병원에 가는 것을 거부했다. 한번 중환자실에 들어가면 가족 얼굴도 제대로 못보고 인공호흡기를 뗄 때(임종 시)까지 외롭게 누워 있어야 한다는 지인들 얘기에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죽음을 홀로 병원에서 맞이하는 것도 싫었지만 병원비 등도 걱정스러웠다. 답답한 마음에 이리저리 방법을 찾던 A씨 딸은 법 개정으로 지난 2월부터 환자 의사에 따라 인공호흡기 등 연명의료를 받지 않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A씨는 딸과 함께 대학병원을 찾아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한 뒤 몸 상태 진단과 당장 필요한 치료만 받고 퇴원해 집 근처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통증을 완화하는 치료만 받으며 여생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 30대 B씨는 집 근처 보건소를 찾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친구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연명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리 밝혀 놔야겠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친구는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의료진 판정에도 심정지가 올 때마다 30분가량 심폐소생술을 받아야 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친구 부모님은 "심폐소생술을 하면 갈비뼈가 부러지고 심하면 내부 출혈을 일으킬 수도 있는데 의식도 없는 아들이 며칠간 계속 심폐소생술을 받고 의료기기에 의지해 누워 있는 것을 차마 보기 어려웠다"며 눈물을 흘렸다.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연명치료를 거부한 채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연명치료 중단'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고인은 최첨단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아 삶을 연장할 수 있었지만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거부하고 '존엄한 임종'을 선택했다. 장례식 역시 대표적인 허례였던 조화(弔花)를 받지 않고 화장과 수목장을 선택해 귀감이 됐다. 구 회장의 아름다운 임종과 장례는 세간에 잔잔한 감동을 줬고 이후 일선 병원에 부쩍 연명의료 중단과 관련된 문의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월 4일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이 도입 4개월째를 맞고 있다. 지난 3일 현재 환자 8557명이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중단하고 존엄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 중 2971건은 환자가 직접 연명의료계획서 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사인한 경우다. 나머지는 환자가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어 가족들이 대신 연명치료 중단에 동의한 것이다. 이 중 2383건은 평소 환자가 연명의료를 원하지 않았다는 가족 2인 이상의 진술이 있었고 3203건은 환자 가족 전원의 합의로 연명치료 중단 결정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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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연명의료계획서 등록 건수는 매달 늘고 있다. 건강할 때 미리 쓰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자는 제도 시행 4개월 만에 2만6417명을 기록했다. 남성이 8957명, 여성이 1만7460명으로 여성이 두 배 가까이 많다. 서울 지역 등록자가 전체 28.1%로 가장 많았고 경기(27.8%) 충남(11.2%) 전북(5.5%) 대전(4.2%) 순이었다. 말기 환자 등의 의사 표시에 따라 담당 의사가 작성한 연명의료계획서 등록도 4697건에 달했다. 남성이 2967건, 여성이 1730건이었다.

연명치료 중단은 환자 본인이 건강할 때 의향서를 작성해놨거나 가족들에게 환자가 미리 연명치료 중단 의사를 밝혀 놓은 경우에는 원활하게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환자가 의사표현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가족들이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다. 의학적으론 살아 있지만 인간으로선 죽어 있는 '가족의 생명(연명치료)'을 놓고 이성으로만 행동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내 부모와 자식이 수년째 병상에 누워 있으면 이성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젠가 기적적으로 소생할 수도 있다고 믿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해 연명의료 중단을 법으로 제정해 '모두가 환자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치료라고 동의하고 적절한 법적 절차만 갖춘다면 연명의료를 합법적으로 중단'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줬다. 이를 통해 연명의료 결정도 주로 보호자 중심에서 좀 더 환자 의사를 존중하는 쪽으로 바꿨다. 환자 의사에 반하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줄이고 환자가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연명의료결정법은 치료 효과 없이 환자의 생명만을 연장하기 위해 시도하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등 네 가지 의학적 시술에 한해 환자 본인 결정이나 가족의 동의로 연명치료를 받지 않도록 했다. 이 법은 주로 회생 가능성이 없고 치료해도 회복될 가망이 없고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돼 사망에 임박한 환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영국 국민건강서비스(NHS)에서 발간한 '생애말기전략' 보고서는 "'좋은 죽음'은 통증 등 괴로운 증상이 없고 친숙한 환경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한 사람으로 존중받으며 임종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진우 서울대병원 호흡기내과 교수(중환자진료부 긴급대응팀)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연명치료를 시행할 경우에는 중환자실에서 사랑하는 사람들도 자주 만나지 못하고, 온갖 기계에 둘러싸여 고통스럽게 임종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지적했다.

소생 불가능이라는 의학적 판단이 내려졌다면 기적에 의존하지 말고 연명의료 중단을 적극 검토해볼 만하다는 얘기다. 최근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만 19~59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 중 93.5%가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자기 결정이나 가족 동의로 연명치료를 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연명의료결정법 취지에 공감한다고 밝혔다. 88.9%는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이 온다면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며 죽고 싶다고 응답했다.

박혜윤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암통합케어센터 정신건강담당)는 "가족이 연명치료를 선택해 중환자실을 드나드는 환자와 가족을 만나보면 '이럴 줄 알았으면 안 했다' '이런 줄 알았으면 연명치료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며 "중환자실에서 임종은 '좋은 죽음', 즉 존엄사와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연명의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이었다. 당시 의사는 의학적 판단이 아닌 보호자 의견을 따라 연명치료를 중단했는데 살인방조죄라는 판결을 받았다. 해당 환자 회생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이후 의사들은 인공호흡기를 한 번 적용하면 중단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해 연명의료 중단이 매우 어렵게 됐다.

이후 이러한 행태에 큰 변화를 준 것이 2009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의 김 할머니 판례였다. 의학적으로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라면 해당 환자가 남긴 사전 의료 지시나 환자 가족이 진술하는 환자 의사에 따라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것이 가능하게 됐다.

2015년 대통령 소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특별법 제정을 권고했고 2015년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에 대한 '연명의료 유보 및 중단에 관한 법률'이 제안돼 2016년 2월 법이 제정됐다. 그 후 2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지난 2월 4일부터 법이 시행되고 있다.

헷갈리는 용어 살펴보니

안락사(安樂死)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생명을 인위적으로 종결시키고 의도적으로 죽음을 유도하는 모든 행위를 의미한다. 안락사는 사망에 도달하는 방법과 시기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연명의료 중단과 다르다.

존엄사(尊嚴死)는 사망하는 사람의 존엄성 확보를 목적으로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강조하는 용어다. 연명치료 중단도 결국 존엄사이긴 하지만 임종 과정이라는 의학적 판단이 개입된다.

웰다잉(well-dying)은 글자 그대로 행복한 죽음을 의미하며 유언작성, 장례 절차 준비, 유산 상속 기부 등을 포함해 임종 문화에 관한 포괄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연명의료 중단은 임종 과정에 있다는 의학적 판단이 전제된 환자에 한정해 환자의 자기 결정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안락사, 존엄사, 웰다잉과 차이가 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말기 환자 또는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와 그 가족에게 통증과 증상의 완화를 포함한 신체적 심리 사회적 영적 영역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와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의료다. 호스피스는 처음에 임종을 앞둔 환자 돌봄에서 시작됐지만 개념이 확대돼 현재는 완화의료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병문 의료전문기자 / 김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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