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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재무성 후쿠다 준이치 사무차관이 취재진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지난 12일 잡지사 '주간신조'가 보도한 성희롱 발언 때문입니다. 일본 보도용어는 세쿠하라(セクハラ/sexual harassment)지만, 이 글에선 성희롱으로 통일합니다. 주간신조는 "후쿠다 차관이 여기자를 술집에 따로 불러 성희롱 발언을 했다"며 관련 음성 파일을 공개했습니다. ▶ 관련 유튜브 링크
위 주간신조의 영상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차관] 오늘 말이지, 안아봐도 돼?
[여기자] 안 돼요.
[차관] 아? 남편은 바람 안 피우는 타입인가? 예산이 되면 바람 피우나? 손은 잡아도 되잖아? 손 잡아줄게. 가슴 만져도 돼?
[여기자] 안 된다고요.
[차관] 손 잡아도 돼?
[여기자] 그런 말, 정말 그만둬 주세요.
낯 뜨겁습니다. 일본 최고 관료인 재무성 차관이 말했다고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공무원 시험응시자들에게 재무성은 외무성, 경찰청과 함께 가장 인기 있는 부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도쿄대 출신들이 가장 많이 지원하는 부서로 유명합니다. 재무성 차관이라면 관료로선 최고위인 셈입니다. (그 위의 정무관, 부장관, 장관은 정치인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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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차관은 재무성 초기 조사에서 "내 음성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여성이 접객을 하는 가게에서 말장난을 한 적은 있지만, 여기자에게 성희롱 발언을 한 적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당장 술집 여성에겐 성희롱을 해도 되냐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결국 후쿠다 차관은 지난 18일 밤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사임 기자회견에서도 엉뚱한 발언을 이어갔습니다.
[기자] 음성파일 목소리가 본인이라는 걸 인정하는 겁니까?
[차관] 자기 목소리는 자기 몸을 통해 나오는 건데, 저는 녹음된 소리가 내 목소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목소리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기자] 보통 사람이라면 자기 목소리인지는 알 텐데요.
[차관]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제 목소리가 테이프 녹음기에서 나오면 잘 모르겠더라고요.
[기자] 국회에서 답변하거나 TV카메라 앞에서 말하기도 했잖아요?
[차관] 그 음성을 들었을 때는 '이게 내 목소리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목소리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다수 있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습니다.
후쿠다 차관은 이후에도 "전체 음성 파일을 다 들으면 성희롱 발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며 의혹을 계속 부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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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피해 여기자가 나섰습니다. 피해자는 유력 방송국인 TV아사히의 30대 여기자였습니다. 여기자는 방송국 자체 조사에서 "1년반 전부터 차관의 성희롱 발언이 계속돼 녹음을 해 왔다. 그리고 상사에게 성희롱 발언을 보도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서 결국 잡지사에 녹음 파일 일부를 전달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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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아사히 보도국장은 18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이런 조사내용을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재무성에 공식 항의 문서를 보냈습니다. 불똥은 TV아사히로도 튀었습니다. 재무성에 눈치를 보며 여기자의 요구를 무시하지 않았냐는 겁니다. 재무성은 일본 정부의 예산을 다루는 곳으로 다른 부서의 정책도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재무성은 단순히 경제담당 부서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TV아사히 측은 "조직 전체가 이 문제를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점이 가장 반성할 부분"이라면서도 "여기자가 음성 파일을 제3자인 잡지사에 건넨 것은 부적절하고 유감"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뉴스가 거듭될수록 일본 사회의 반응이 이상해졌습니다. 한 정치인은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가스미가세키(정부기관 밀집지)에는 젊은 여기자가 많다. 그리고 많은 여기자들이 남성 기자들의 노력을 뒤로하고, 조금씩 취재원에게 파고든다. 취재원도 아저씨 기자보다는 여성과 이야기하는 것이 기분 좋을 것이다. 나쁜 것은 기자에게 여자라는 점을 무기로 해서 취재하도록 하는 언론사에 있다."
또 다른 온라인 칼럼니스트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차관이 사임한 것은 사건 직후 솔직하게 대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희롱을 솔직히 인정했다면 사임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치한은 위법 행위지만, 성희롱은 부도덕일 뿐이다. 성희롱을 인권침해라고 하는 것도 과도하고 위험하다.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범위가 점점 없어질 우려가 있다."
이런 일본 사회의 반응에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은 와세다 대학의 야타가와 토모에 교수를 인용해 "피해자를 보호하려는 시각이 전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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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주변의 일본 여성 분들 이번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대답을 들었습니다. 제가 물어본 여성 분들 상당수가 '자신도 저런 말을 들어봤다' 또는 '저런 이야기를 들은 지인이 있다'고 말한 겁니다. "손을 잡아도 돼?" 정도를 넘어 "안아도 돼?" "가슴을 만져도 돼?" 등 분명한 성희롱 발언을 들었다는 겁니다.
대학생 시절 남자 선후배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 신입사원 입사 직후 선배 사원에게, 심지어 소개팅 한두 번 만남 만에 이야기를 들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뭔가 사회적으로 '남성은 저런 이야기를 해도 어느 정도는 애교나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아닌가?'하는 분위기가 있다는 겁니다. 위 칼럼니스트가 말한 '사회적 용인도'라고 해야 할까요? 물론 일본 전체가 이렇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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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침 어제(20일) 일본 요미우리TV의 '미야네야' 프로그램이 20세 이상 여성 300명을 상대로 긴급 설문조사를 벌였습니다. "성희롱을 받은 적이 있다"는 사람이 37.3%에 이르렀습니다. 일본 여성들이 한국 여성에 비해 성희롱을 생각하는 행동 기준이 다소 낮은 점을 고려하면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닙니다. 성희롱을 받았을 때 대처방법을 묻는 질문에는 1) 아무 말 없이 참는다 51.6% 2) 당사자에게 그만두라고 요구한다 24.6% 3) 퇴사한다 9.2% 4) 회사 측에 개선을 요구한다 8.4% 등의 순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회를 들여다보다가…혹시 일본 여성들의 이야기가 사실 우리 여성 분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일본 차관의 성희롱 발언,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생각해도 될까요?
[최호원 기자 bestiger@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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