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회고록'에서 "아버지 기념사업이나 하셨어야…진영대결 앞장선 사람들도 큰 책임"
[아시아경제 조영주 기자] 고건 전 국무총리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대통령을) 하시지 말았어야 했다. 아버지 기념사업이나 하셨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고 전 총리는 1일 공개한 '고건 회고록 : 공인의 길'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스스로 너무 정치를 못한 것이) 맞다"면서 "정말 답답했다. 오만, 불통, 무능…"이라고 밝혔다.
그는 "당사자가 제일 큰 책임이 있겠지만, 그 사람을 뽑고 추동하면서 진영대결에 앞장선 사람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며 "박근혜를 검증 안 하고 대통령으로 뽑은 것 아니냐. 보수진영이 이기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진영대결의 논리이고 결과이다. 중도실용을 안 한 것이다"고 지적했다.
고 전 총리는 "2016년 10월30일 당시 박근혜 대통령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사회원로 몇 분이 함께 티타임을 가졌다"며 국가비상시국에 드리는 전언을 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국민의 의혹과 분노는 한계점을 넘어서고 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국민을 납득시키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 성역 없는 수사를 표명하고 모든 의혹이 객관적으로 규명돼야 한다. 인적 쇄신은 물론 국정시스템을 혁신해서 새로운 국정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진언했다"면서 "그러나 (이를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촛불집회가 연이어 일어나고 탄핵안이 발의되고 가결됐다"고 전했다.
고 전 총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과 뒷얘기도 털어놓았다. 그는 노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에 대해 "1998년 서울시장 민선2기에 출마할 당시, 국민회의 노무현 부총재를 만났다. 인상적이었다. 그의 화법은 매우 담백했다.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드물게 사심이 없는 정치인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고 전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총리를 제안하면서 '개혁대통령'을 위해선 '안정총리'가 필요하다 했고, 완강히 고사해도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면서 "'해임제청권뿐만 아니라 실질적 내각인선까지 맡아서 해달라면서 다만 법무부 장관은 이미 생각해 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강금실 변호사였다"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 탄핵 당시 권한대행을 맡았던 시절을 두고는 '내 인생 가장 길었던 63일'이라고 적었다. 노 전 대통령과의 사이가 멀어진 배경에 대해서는 인사 문제 등을 꼽았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탄핵소추에서 복귀한 날 청와대로 들어가 '이제 강을 건넜으니 말을 바꾸십시오'라고 사의를 표명했다"며 "그런데 사흘 후 새 장관들에 대해 임명제청을 해달라고 해서 거절했더니 비서실장을 두세번 보냈고, 마지막에는 내 사표를 노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완전히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을 싫어하게 된 진짜 이유에 대해 임명제청 문제와 함께 친노 세력과의 정치적 갈등을 들었다. 고 전 총리는 "그리고 또 하나는 정치적으로는 친노세력에게 메시지를 보낸 게 아닌가 생각한다. 고건을 밀지 마라. 그런 얘기다"면서 "나도 정치인으로서 그때 당시 정부와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일이 없을 수 없었다. 그때 바다이야기니 뭐니 일이 있을 때는 한 마디씩 해야 했었다"고 알렸다.
노 전 대통령이 2006년 12월 "고건 총리가 양쪽을 다 끌어당기지 못하고 스스로 고립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라고 말한 데 대해, 고 전 총리는 "완전히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그는 "여야를 아울러서 국정을 수행한 건 나다. 내가 물러난 지 2년 후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했을 때는 노 대통령 본인이 고립됐던 건 사실인가보다. 노 대통령 스스로 고립된 거다. 나는 총리를 그만둔 지 몇 년 후 얘기다. 시계열에 대한 착각이 있었던 게 아닌가. 내가 총리일 땐 여야정 협의가 잘됐다고 기록이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17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이유에 대해서는 "제일 큰 불출마 요인은 중도실용의 기치를 내걸고 내 정치세력을 못 만든 것이고, 또 하나는 호남 출신의 한계론"이라고 밝혔다.
고 전 총리는 "나의 정치적 실패를 놓고 보면 중도실용의 정치가 설 자리도 좁았지만, 비정당 출신 제3의 정치인이 설 자리가 더 좁았다"며 "참여정부의 총리를 해서 진보쪽으로 포지셔닝이 된 상황에서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이 발생하니 역부족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불출마 선언을 하고 사흘 후인가 돌아왔더니 DJ(김대중) 쪽에서 보낸 정세현 전 장관이 '동교동에서 번의(飜意)하라고 하신다'고 전했다. 후원해준다는 얘기다. 하지만 북한 핵실험으로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었고 열린우리당이 아무리 간판을 바꿔도 떨어지는 건 확실했다"며 "다음 대선에 재수로 후보가 돼야 하는데 나이가 DJ가 대통령이 됐던 만 73세보다 많아지는 거다. 노욕을 덮어버릴 만큼 권력의지가 강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조영주 기자 yjc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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