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신고 묵살당한 수원 피해여성
‘이러다 죽겠다’ 싶어 신고했는데
경찰, 때리던 동거남에게 전화
“신고해서 더 많이 맞은 게 억울”
보도뒤 감찰조사한다며 들락날락
파출소는 “말 좀 잘해달라”고까지
동거남의 폭행을 112에 신고했으나 경찰이 ‘오인신고’로 처리하여 더 심각한 폭행을 당했던 ㅇ(31·<한겨레> 23일치 1면)씨가 언론에 처음으로 당시 상황을 직접 설명했다. 24일 오후 <한겨레>와 따로 만난 ㅇ씨는 “맞아서 아픈 것보다 경찰에 신고해 더 많이 맞은 게 마음 아프다”고 말했다.
동거남 최아무개(35)씨는 지난 16일 아침부터 ㅇ씨를 때리기 시작했다. “다른 남자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유였다. 하루 종일 얻어맞았지만 ㅇ씨는 잠자코 견뎠다. 그러다 16일 밤 12시께 최씨가 두 발로 ㅇ씨의 가슴팍을 찼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어요.” ‘이러다 죽을 수도 있지’ 싶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급박했다.
17일 새벽 0시34분, ㅇ씨는 집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최씨는 이미 ㅇ씨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버린 상태였다. 화장실에 간다며 최씨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1, 1, 2를 눌렀다. 집 주소부터 말했다. “지동 ○○번지 ○○호요.” 정확한 주소를 알려야 경찰이 빨리 도착할 거라 생각했다.
“무슨 일이죠?” 경찰이 물었다. “아침부터 맞고 있어요. 빨리 좀 와주세요.” 경찰은 “빨리 가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신고 사실이 드러나면 최씨가 흥분할 것을 우려해 ㅇ씨는 집전화 발신목록에서 112를 삭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14분 뒤, ㅇ씨의 기대와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0시48분, 전화벨이 울렸다. 최씨가 집어든 수화기에서 “여자분이 맞고 있다고 신고해 확인차 연락했다”는 순찰대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화기를 든 최씨가 ㅇ씨에게 눈을 치켜떴다. 최씨가 “신고한 일 없다”고 답하자 순찰대원은 “예, 알았습니다”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식은땀이 쭉 흐르면서 가슴이 내려앉았다”고 ㅇ씨는 말했다.
ㅇ씨의 집은 지난 4월 ‘오원춘 살인사건’이 발생한 경기도 수원 중부경찰서 관할구역에 있다. 당시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경찰이 “전화를 끊은 뒤에라도 와줄 줄 알았다”고 ㅇ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동네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는데도 경찰은 여전히 똑같았어요. 제가 그런 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고요.”
경찰은 끝내 ㅇ씨에게 오지 않았다. 최씨는 “오원춘에게 당한 여자처럼 해주겠다”며 더 가혹하게 폭행했다. 갈비뼈 두 대와 허리뼈가 부러졌다. 중상을 입은 ㅇ씨는 자신의 집에 사실상 감금상태로 방치됐다. 최씨는 ㅇ씨를 때리기 시작한 16일 낮부터 이미 현관문과 이중창을 잠가버린 상태였다.
이후 21일 낮까지 110여시간 동안, 최씨는 ㅇ씨를 위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옴짝달싹 못하는 ㅇ씨에게 간단한 먹을거리를 가져와 “침대에서 내려와 먹으라”고 강요했을 뿐이다. ㅇ씨는 겨우 몸을 가누고 먹는 시늉을 했지만 음식을 넘길 수 없었다. 최씨는 ㅇ씨가 거듭 고통을 호소해도 “신경이 놀란 것”이라며 외면했다. 사흘째인 19일에야 통증 부위에 파스를 붙여줬지만, “119를 불러달라”는 ㅇ씨의 부탁은 모른 척했다.
21일 오전 11시께 최씨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ㅇ씨는 친언니에게 전화했다. 어머니 이아무개(63)씨가 이를 전해듣고 다시 경찰에 신고했다. 최초 신고 110여시간 만인 오후 1시께 경찰은 뒤늦게 현장에 출동해 ㅇ씨를 119 구급차로 병원에 이송했다. 닷새 내내 통증 때문에 잘 수 없던 ㅇ씨는 진통제 주사를 맞은 뒤 만 하루 동안 까무러치듯 잠들었다.
그러나 불안으로 잠 못 드는 날은 다시 시작됐다. 경찰 책임을 묻는 보도가 나간 뒤, 경기지방경찰청 감사관실은 “감찰조사에 협조해달라”며 수시로 ㅇ씨와 가족들에게 전화하고 불쑥 찾아왔다. 어머니 이씨는 “지난 23일 밤엔 사전 연락도 없이 파출소 관계자들이 찾아와 ‘감사관실에 말 좀 잘해달라’고 했고, 감사관실 담당자들도 병원을 자꾸 찾아 아픈 딸을 괴롭혔다”고 호소했다.
결국 ㅇ씨는 경찰과 언론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거처를 옮겼다. 여전히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병상에 누운 채 증언하던 ㅇ씨는 “경찰이 진심으로 사과하기보단 자꾸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리라고 강요해 신경쇠약에 걸릴 것 같다”며 눈물을 떨궜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감찰조사는 경찰 내부조사로 충분한데도 심신이 피폐해진 피해자 및 그 가족을 고압적 자세로 조사하는 것은 2차, 3차 가해에 가깝다”고 비판했다. 남윤인순 민주통합당 의원과 ‘한국 여성의 전화’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25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가정폭력 피해자의 신고를 묵살한 경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