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르웨이 호바르 부스트니스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컨베이어벨트 위의 건강(Health Factory)'.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컨베이어벨트 위의 건강’은 신선한 화면 구성으로 이해하기 쉽지않은 의료제도를 흥미롭게 설명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 영화는 무상의료체제를 유지해 온 노르웨이가 어느 날 갑자기 포괄수가제(DRG)라는 시장 논리가 강한 지불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겪는 변화를 담담하게 그려냈다.
실제로 노르웨이는 1997년 포괄수가제를 도입했다. 이후 병원 진료비 지불체계(입원환자)는 보건당국(60%) 예산과 포괄수가제에 의해 이뤄지는 구조로 바뀌게 된다.
국내에서 포괄수가제 강제적용을 둘러싼 논란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포괄수가제라는 진료비 지불제도가 갖고 있는 상업성을 적나라하게 궤뚫은 영화란 점에서 더욱 흥미를 끈다.
이 영화를 서울인권영화제에 추천하고 직접 감수한 토리씨(활동가명, 의사,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는 출품작 해설집을 통해 “북유럽 복지의료체제에서 신자유주의적 시장 원리를 들이대는 불합리함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며 “시장화된 의료는 환자의 선택권을 약속하지만 실제 보건의료의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기자는 지난 18일 오후 서울인권영화제를 주최한 '인권운동사랑방' 사무실을 직접 찾아가 이 영화를 관람했다.
#. 영화의 도입부는 음울한 공장 내부를 배경으로 컨베이어벨트에 환자들이 누워 차례로 실려 가는 장면이다. 이들은 한명씩 후크에 들려 베드에 뉘어지고 지게차는 환자가 누워있는 침상을 짐짝처럼 옮긴다.
전국민 무상의료를 실시해왔던 노르웨이에게 포괄수가제 도입은 충격이었다.
노르웨이 국제공공의료정책센터 엘리스 플록 교수는 “그동안 의료서비스는 환자가 돈을 낼 수 있느냐 보단 (환자에게) 진료가 얼마나 필요한가의 기준이 우선이었다. 의료에 소외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사회연대에 기초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의료에 시장 논리가 개입되면서 부모의 경제력이 아이들의 치료 수준을 결정하는 시대로 변했다고 영화는 지적한다.
노르웨이는 지불제도 개혁에 이어 2001년에는 병원개혁도 단행했다. 병원의 지위와 예산을 독립시키고 보건기업 설립을 인정했다. 병원 간 서비스경쟁을 통해 환자를 유치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포괄수가제를 도입한 병원 현장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노르웨이 세인트 올라브스병원 산부인과 회의실. 산부인과 과장이 신참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포괄수가제를 설명하고 있다.
산부인과 과장은 질병군별 가격표를 보여 주면서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1만2,000크로네, 산후조리하면 6,000크로네로 총 1만8,000크로네로 자연분만 수가가 정해져 있다고 설명한다.
또 제왕절개수술은 합병증 예방 등의 비용으로 3만5,000크로네가 배정돼 있다고 한다. 합병증 개수가 많아지면 DRG점수가 높아지는 방식이다.
만약 초산 진행이 느려서 흡입분만을 할 경우 1만크로네를 병원이 지출해야 한다.
산부인과 과장은 흡입분만을 해야 할 경우엔 고민을 해보고 어쩔 수 없을 때 쓰라고 권유한다. 자연분만이나 흡입분만이나 소요시간도 결과도 비슷한데 흡입분만이 돈이 더 들기 때문이다.
설명회가 끝난 후 한 간호사는 동료에게 “자연분만을 하지 않는 게 일을 더 잘하는 건가?”라고 고개를 갸웃했다. 산부인과 과장도 “쉽게 치료하기 어려워서 낮은 DRG 점수를 받을 만성환자를 치료할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털어놨다.
포괄수가제 도입으로 인해 업무량도 늘었다.
한 간호사는 “늘어난 일거리로 본연의 일보다 (포괄수가 산정에) 시간을 더 투자한다”며 “산모가 아플 경우를 대비해 진단기준을 알맞게 골라놔야 한다. 산모의 원래 몸 상태를 알아야 돈을 더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노르웨이 과학기술대 아멜스트롬 혈액학교수는 “포괄수가제는 병원의 재정상태 고려가 우선이라 병원의 수익 지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기존환자는 퇴원시키고 병원 수입을 올릴만한 DRG 점수를 가진 환자를 받아야 유능한 직원, 유능한 병원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영화는 포괄수가제 도입 이후 미처 얘기되지 않고 있는 부분인 ‘창의적 코딩(creative coding)’이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지불제도 운영은 수익과 직결되고, 이는 병원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손해가 나는 5개 코드를 수익이 나는 10개 코드와 맞바꾸는 방식이 생존의 열쇠라는 것이다.
도요타식 경영기법을 병원에 도입
#. 다시 영화는 하루 일과를 마친 간호사들의 대화로 시선을 옮긴다.
간호사들은 합병증을 만들어 진단을 많이 내릴수록 돈이 더되는 구조라는 사실에 탄식했다. 자연분만 건수가 많았던 지난 1월 병원으로부터 수입이 적다고 징계를 받았던 경험도 공유했다. 간호사는 “이상하게 변해 가고 있어요”라고 탈의실 문을 나섰다.
노르웨이에 불고 있는 병원개혁 방식엔 도요타 경영기법도 있다. 영화에서는 노르웨이 보건부장관(2008~2009년 재임)이 직접 일본 도요타 공장을 견학하는 장면도 보여준다.
보건부장관이 다녀갔으니 도요타 경영기법은 곧 노르웨이 병원에 전파된다.
노르웨이 우발브 병원 회의실. 여기서는 도요타 경영기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보건부 공무원이 직접 병원을 찾았다. 병실에서 간호사가 노인 환자를 케어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뒤에서 체크하는 공무원. 그는 전체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기 위해서라고 시간 체크 이유를 설명한다. 공무원은 외과수술장에서도 스탭, 장비, 수술 종류에 따라 수술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방안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노르웨이 보건의료전문가들은 포괄수가제가 도입된 이후 경험하고 있는 의료서비스의 계량화에 분노했다.
이들은 “환자의 손을 잡아 주는 시간을 3분으로 할 것인가, 8분으로 할 것인가”라며 “의료서비스를 계량화하다 보면 ‘건강증진’이라는 보건의료 고유의 임무를 망각하게 된다. 의사는 환자의 말을 경청하고 병을 진단하는 게 핵심인데 쓸데없는 것에 매달리게 된다”고 우려했다.
이오나 히스 왕립 일반의 의대총장은 “탈장수술 같은 비교적 정량화된 수술은 포괄수가제를 적용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만성질환이나 정신질환 등으로 확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노르웨이 과기대 스타이어 웨스턴 공공의료학교수는 “얼마나 많은 환자를 진료했냐고 물으면 치료가 잘 되지 않은 환자도 그 계산에 넣을 건가”라며 “신장결석 제거 수술을 받고 다음날 새벽에 통증을 느껴 재수술을 하고, 그 이튿날 부작용으로 세 번째 수술을 받았다면 환자 수는 3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환자 수만 중요하지 건강은 뒷전이 되는 구조”라고 꼬집었다.
노르웨이의 포괄수가제 도입에 따른 변화는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토리씨는 출품작 해설집에서 “포괄수가제를 도입하고 도요타식 경영을 배우지만 이는 환자들을 치요하는데 들어가는 시간을 단축할 뿐”이라며 “치료와 완치는 기업의 생산과정처럼 비용을 절감하면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실제 치료에 들어가는 비용은 적어지면서 오히려 치료과정을 감시, 통제하는 부문에 들어가는 비용이 늘어나 새로운 관료제가 생긴다”고 분석했다.
그는 “공공보험은 존재하나 이미 의료는 시장화가 될대로 된 한국 사회에서 북유럽 복지사회의 권리는 아직 멀게 느껴질 수 있다”며 “하지만 그럴수록 시장화된 의료가 인권 침해적임을 직시하고 시장화되지 않은 의료를 향유할 권리에 대해 더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의규 기자 sunsu@rappor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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