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계부채 1000조시대 ② ◆
중소기업 부장 최 모씨(50)는 남보기에는 어엿한 직장인이지만 빚더미에 올라 있다. 5년 전 3억원을 대출받아 재건축에 투자한 게 시작이었다. 담보대출 이자를 내고 나면 생활비가 부족했다. 그래서 저축은행에서 2500만원 생활비 대출을 받았다. 작년에는 맏딸 결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카드빚까지 끌어 썼다. 김씨는 "빚이 늘면서 지난달에는 담보대출 이자마저 연체했다"며 "앞으로가 막막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기 침체가 계속되면서 김씨처럼 3곳 이상의 금융회사에서 빚을 낸 다중채무자가 급증하고 연체율이 치솟고 있다.
8일 개인신용평가기관인 코리아크레딧뷰로(KCB)에 따르면 지난 4월 말 다중채무자 연체율은 4.15%로 2010년 말(2.41%)에 비해 1.7배나 뛰었다. 이는 4월 말 가계대출 평균 연체율(0.89%) 대비 4.7배에 이르는 수치다.
다중채무자 증가세도 무섭다. KCB에 따르면 2010년 3월 말 120만명이던 다중채무자가 올해 4월 말에는 182만명으로 62만명(51%)이나 급증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대부업체 이용자까지 포함하면 다중채무자 수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다중채무자 수가 정부의 가계부채 종합대책이 나온 작년 6월 말(165만명)보다 17만명이나 많다는 데 주목한다. 정부 대책이 다중채무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는 증거기 때문이다.
◆ 집 담보 빚…이자 내려고 빚…아들 학비도 빚…'빚의 늪' 퇴로없다
택배기사 한광수 씨(가명ㆍ52)는 얼마 전 대출 원리금을 갚느라 대부업체에서 200만원을 빌렸다. 1년 전 생활비가 부족해 한 저축은행에서 1000만원을 대출받았는데, 저축은행에서 만기를 갱신하면서 원금을 일부 상환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현재 한씨가 본인 명의로 받은 대출은 4개다. 은행에서 받은 주택담보대출, 저축은행 신용대출, 캐피털사의 차 할부대출, 대부업 대출이다. 전형적인 다중채무자다. 여기에 얼마 전 복학한 아들의 학비가 없어 아들 명의로 학자금대출까지 받았다. 한씨는 "어떤 일이 있어도 빚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당장 생활이 막막하니 어쩔 수 없이 아들까지 빚을 냈다"며 "매달 이자 갚는 데 급급해 원금 줄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빚의 수렁에 빠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가계부채는 계속 증가하는데 가계의 상환능력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으면서 가계부채의 질적 지표가 빠르게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다중채무자다. 다중채무자란 3곳 이상의 금융회사에서 대출을 받은 사람을 일컫는다. 쉽게 말해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려 쓰는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빚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한 곳에서만 대출을 받지만 이자와 원금 상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또 다른 곳에서 대출을 빌려 이전 대출의 이자를 갚는 행태가 반복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퇴로가 없는 셈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다중채무자의 경우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대부분 2금융권 대출을 갖고 있다고 추정된다는 점이다. 2금융권 대출은 은행 대출보다 훨씬 금리가 높다. 이 때문에 채무자의 이자 부담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올해 들어 은행권의 가계부채 증가속도가 안정세에 접어든 것과 달리 2금융권의 대출은 여전히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한국은행의 '4월 중 예금취급기관 가계대출' 자료에 따르면 4월 말 비은행 예금취급기관 가계대출은 185조1000억원으로 한 달 새 1조2000억원이 늘어났다. 저축은행, 신협, 새마을금고, 지역농ㆍ수협 등 비은행권의 가계대출이 185조원을 넘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비은행권의 대출이 늘어나는 것은 은행권이 가계대출을 옥죄면서 풍선효과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2금융권의 가계부채는 담보대출보다는 신용대출 비중이 크다. 금융위원회가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비은행권 신용대출 잔액은 66조9000억원으로 전체 신용대출의 34.4%를 차지하고 있다. 신용대출의 경우 금리 수준은 카드사는 20%대, 저축은행이나 대부업의 경우에는 30% 중후반에 달한다. 은행권 신용대출금리(약 5~7%)의 5배에서 8배에 달하는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은행권은 물론 2금융권 등 여러 금융회사에 걸쳐 부채를 갖고 있는 다중채무자는 최대 취약계층으로 꼽힌다. 빚으로 빚을 막는 악순환이 지속되면서 경기침체가 장기화할 경우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용등급별로 보면 다중채무의 위험에 가장 크게 노출된 계층은 5~7등급이다. 8~10등급의 저신용자들은 이미 연체가 일어난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더 이상의 빚을 내기 어려워 다중채무가 오히려 적다. 가계수지가 갈수록 어려워지면서 은행권과 제2금융권의 경계에 놓인 5~7등급이 은행권 빚을 상환하기도 전에 저축은행ㆍ캐피털 등 2금융권에서 추가로 대출을 받는 것이다.
김혜란 보험연구원 연구원은 "경기 둔화로 금융회사가 위험관리 차원에서 신용이 낮은 계층의 대출을 먼저 회수하기 시작하면 이미 연체가 시작된 8~10등급보다는 7등급의 한계차주부터 부실이 급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리스ㆍ스페인 재정위기, 미국 경기지표 악화 등이 한국 금융시장에 영향을 미치면 중간등급의 부실이 폭발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개인에게도 다중채무는 빚의 수렁을 빠져나갈 수 없는 '족쇄'가 된다. 2007년 3월~2011년 12월 사이 신용회복에 성공해 금융거래를 하는 95만명 중 13.4%인 12만6000명은 다중채무를 보유해 또다시 채무불이행 상태로 빠져들 위험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다중채무자들은 대부분 저소득 계층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행이 지난 4월 발표한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신규 가계대출 동향을 분석한 결과 연소득이 3000만원 미만인 계층의 신규 가계대출은 꾸준히 늘어난 반면 연소득이 3000만원이 넘는 계층의 신규 가계대출 비율은 눈에 띄게 줄었다.
김정인 KCB 연구소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소득ㆍ저신용층 중 연소득이 2000만원 정도인 소득 1분위와 신용등급 7등급 대출자의 부채 증가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면서 "특히 총부채상환율(DTI)의 40%를 초과하는 고위험 대출자의 비율이 높아 위기가 올 경우 가계와 금융회사의 동반 부실 우려가 있다"고 분석했다.
[기획취재팀 = 김인수 차장(팀장) / 손일선 기자 / 한우람 기자 / 이상덕 기자 / 석민수 기자 / 안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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