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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新허기진 군상](1)행복을 잃은 아이들-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 마지막 보루였던 교육…60년대 시작된 ‘치맛바람’ 이젠 ‘태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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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2015 시대별 교육 천태만상

“맏아들이자 외아들인 동진군에겐 3학년 때부터 가정교사가 딸려 착실히 발판을 다져왔다. 4학년 때 진학 성적이 월등했던 D국민학교로 억지기류계를 만들어 진학했다가 사립국민학교에 눈이 뜨이자 다시 적지 않은 전입학금을 내고 옮겼다. 그때마다 정든 친구들을 잃은 아들은 울먹였지만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다는 KS마크(경기중-서울대)의 자랑스러운 학부모가 되기 위해서 그 정도의 불만쯤이야.”(경향신문 1968년 5월13일자 ‘스위트·홈 진단-(2)일류병’)

1968년 학부모들의 교육열을 풍자한 기사 중 일부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국민학교 6학년 동진군은 ‘KS마크’를 달아주려는 엄마의 교육열로 인해 새벽 5시30분부터 밤 12시까지 강행군을 이어간다. 한 가정교사는 학생이 공부 중 졸지 않게 하려고 “졸다가 머리가 앞으로 숙여지면 국민학생 심군의 목에 노끈이 걸려 목을 졸라 잠을 깨는 방법”까지 고안했다(경향신문 1966년 12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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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금지 조치 1988년 비밀 과외를 하다 적발된 학원 강사들이 경찰서로 연행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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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을 향한 경쟁

전후 폐허만 남은 한국 사회에서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믿을 것은 ‘교육’이었다. 빈곤층부터 중상층까지 온 국민이 교육에 열을 올렸다. 언론은 연일 개천에서 용이 된 학생들의 사연을 앞다퉈 알렸고, 어린 학생들의 ‘4시간 수면’은 미덕이 됐다. 학부모들의 ‘치맛바람’이란 단어도 1960년대에 등장했다. 부모들은 아이의 성적과 진학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내할 수 있는 ‘전사’가 됐다. 1964년 ‘무즙 파동’, 1967년 ‘창칼 파동’은 당시 학부모들의 열성적인 치맛바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좋은 학군을 위해선 ‘삼천지교(三遷之敎)’나 위장전입도 불사했다. 1968년 9월에는 학부모 3명이 자녀의 서울 전입이 제대로 안되자 문교부 장관실 앞에서 농성을 벌이다 이를 막은 경찰과 멱살잡이를 해 종로서에 구속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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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무시험 진학제’ 도입 1968년 학생들이 중학교 배정을 받기 위해 수동식 추첨기로 직접 추첨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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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평준화로 대입에 ‘올인’

이런 교육열에 국가가 처음 제동을 건 것이 1968년 7월 발표한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도’였다. 권오병 당시 문교부 장관은 “종래 일반 국민들이 국민학교 어린이들에게 너무 과도한 입시교육, 과외공부를 시킨 결과 소위 일류병과 입시준비교육이 우리 사회에 가장 큰 병폐가 돼왔다”고 말했다.

1974년 박정희 정권은 “일류학교의 폐풍과 과외 등 입시준비교육으로 정상적인 학교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고교평준화 정책을 시행했다.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의 평준화가 실시되면서 명문중에 입학하려 초등학생이, 명문고에 입학하려 중학생이 피를 말리는 경쟁을 하는 폐단은 사라졌다. 그러나 아이들이 받는 ‘경쟁 압박’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았다. ‘어느 대학을 가느냐’가 인생의 성패를 결정하는 사회구조는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입시전쟁이 고스란히 3년, 6년 뒤로 미뤄졌을 뿐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은 ‘과외금지 조치’를 실시했는데, 일부 학부모들은 단속을 피하려고 산속의 사찰이나 암자를 빌려 아이들을 과외시켰다. 명문대를 많이 보낸다는 강남 8학군으로 향하는 학부모의 행렬도 그치지 않았다. ‘참교육’을 내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1989년 출범했을 때 학생과 학부모의 호응을 받은 데는 비인간적 입시교육에 대한 반작용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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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능력시험 첫 시행 1993년 대입 수학능력시험 지원자들이 교육청에서 응시원서를 제출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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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과 특목고의 등장

1993년 대학입시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처음 도입됐다. 교과서 암기 위주의 학력고사에 비해 논리적 사고와 독서를 강조한 수능은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의 교육 내용을 종전보다 유연하고 풍부하게 한 면이 없지 않지만, 대학의 서열화가 요지부동인 상태에서 수능식 교육은 대학입시용 교육의 한계를 피할 수 없었다. 입시교육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개인의 소양과 꾸준한 노력의 영역으로 치부됐던, 그래서 종전 입시교육의 해독제가 될 것으로 기대했던 ‘논리’와 ‘독서’는 좋은 대학에 가려면 반드시 이수해야 할 필수 ‘입시과목’이 됐고, 그 전도된 틈새를 사교육이 파고들었다. 논리와 독서 등의 과외수업이 유행했고, 사회탐구과목 등의 유명 강사가 생겨났다. 학원을 비롯한 사교육이 필수가 되면서 사교육을 많이 받는 학생과 적게 받는 학생의 성적차는 커졌고, 부모의 경제력에 따른 입시교육의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들어 급격히 늘어난 특목고는 사실상 고교평준화의 붕괴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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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다양화 정책 2010년 서울지역 자율형사립고 교장들이 신입생 추첨을 하기에 앞서 추첨 순서를 뽑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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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반복된다, 더욱 나쁘게

고교서열화는 2000년대 들어 더욱 불이 붙었다. 이명박 정부의 고교 다양화 정책으로 인해 마이스터고, 자사고 등이 대폭 늘어나면서 ‘일반고 슬럼화’라는 단어까지 생겨났다.

특목고·자사고·국제중 등의 등장으로 입시경쟁은 고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초등학교에서 유치원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지만 교육을 둘러싼 풍경은 예전 그대로다. 잠 안 오는 약을 먹으며 명문 중학교 입시를 준비한 1960년대 ‘국민학생’처럼 2015년의 ‘초등학생’은 국제중, 특목고에 들어가기 위해 새벽까지 책을 붙들고 있다. 그나마 과거에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 또 과거에 비해 아이들 학습량이 어마어마하게 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과거는 반복되고 있다. 더욱 나쁘게.

<박용필·김지원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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