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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노동자'에서 여당 사무총장까지…'승부사' 이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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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과 관심사, 경력을 입체적으로 분석해 드립니다 . 의원의 경쟁력과 정치적 미래, 뿐만 아니라 국민의 '심부름꾼'을 어떻게 '사용'해야 우리 사회가 한걸음 나아가고 우리의 삶이 업그레이드 될 수 있을지, 분야별 '파워분석'을 통해 보여드립니다.

[[the300][의원사용설명서]이군현 새누리당 사무총장]

머니투데이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나랑 한판 붙어"

1년 늦깎이 고등학생이 전국체전 권투 챔피언 출신인 같은반 학생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쉬는 시간은 물론 공부시간에도 시끄럽게 해 주위 학생들에 피해를 주는 '1진'에게 겁없이 덤빈 것이다.

늦깎이 고등학생의 '오기'와 챔피언 학생은 '자존심' 대결 결과는 무승부. 교무실에 함께 끌려간 늦깎이 고등학생은, '문제아' 학생을 벌 주려는 선생님에게 "싸움은 내가 먼저 걸었다"고 자백한다. 이들은 이후 '40년 지기'로 남게 됐다.

'불의를 못참는 의리남' 고등학생은 새누리당 이군현 의원이다.

사람들은 3선 중진의 이 의원을 '집권여당 사무총장' '교육자 출신 엘리트'로 보지만 오늘날 그의 모습은 쉽지 않았던 인생에서 겪은 도전과 응전의 결과물이다.

경상남도 통영 출신인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 5학년때 상경해 청계천 피복 공장에서 소년노동자 생활을 했다.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불광동에 위치한 어린이보호시설에서 터를 잡아 집단 생활을 했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함께 살다보니 나이가 어릴수록 불이익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어린 나이에 밥벌이의 고단함을 맛봐야 했지만 공부에 대한 끈은 놓지 않았다. 돈이 없어 중학교에 입학을 하진 못했지만 검정고시를 거쳐 남들보다 1년 늦게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등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그는 어린시절부터 뚝심과 오기, 인내심에 단련돼 있었고 이는 교사를 넘어 3선 의원이 되는 자양분이 됐다. 대학교에 들어간 뒤에는 가정교사로, 과외지도로 공부할 시간을 쪼개고 쪼개 치열하게 학비를 벌었다.

중앙대학교 사범대를 나와 교사의 길을 걸었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빈 손으로 상경했을 때처럼 30살에 그는 돈 한푼 없이 유학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가 유학을 결심하게 된 것은 선진국 교육정책을 배워 한국의 모든 학생들을 올곧게 이끌고픈 바람이 있어서였다. 그나마 높은 경쟁률을 뚫고 국가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위로였다.

유학생활에 있어 가장 큰 버팀목은 부인 김영희씨다. 유학길에 오르기 바로 전 이 의원은 지금의 부인에게 "8월에 미국으로 공부하러 간다. 석박사 마치려면 적어도 5년이 걸린다. 나는 망할래야 망할 수 없는 사람이다. 가진 없이 없으니 이제 일어서기만 하면된다. 성공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라고 프로포즈를 했다.

미국의 유학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간호사 출신인 아내가 간호사 일을 하며 번 돈으로 생활을 꾸려나갔다. 첫 아이가 생기자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때 도움을 받은 사람이 지금의 이한구 새누리당 의원이다. 같은 시기에 미국 캔자스 주립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던 이한구 의원이 이군현 의원의 옆집에 살았던 것. 이한구 의원 부인이 이군현 의원의 첫 아이를 1년간 거의 공짜로 길러줬다. 이때 맺은 인연으로 두 사람은 지금껏 '끌고 밀어주는'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이 의원은 4년 만에 미국서 석·박사 학위를 따낸 입지전적 인물이 됐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선진국 교육을 전파하면서 한국교총 회장 자리에 올랐다. 교총 회장 시절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제17대 국회에 입성, 18대 재선에 성공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지만 뜻밖의 시련이 그를 또 찾아왔다.

2년 전 19대 총선을 목전에 두고 뇌혈관이 막히면서 쓰러져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오게 된 것이다. 통영의 600개가 훌쩍 넘는 자연부락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찾아가는 의정보고 활동을 강행한 탓이 컸다. 이후 그는 남은 인생은 덤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매사 감사한 마음으로 정치에 임하게 됐다.

총선을 앞두고 표밭을 일구러 다닌 시간보다 몸져누워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그동안 지역에서 쌓아온 신뢰가 그를 당선으로 이끌었다. 압도적인 표 차이로 3선 의원이 됐고 올해 8월에는 사무총장직을 맡게 됐다.

[프로필]

△경남 통영(52년) △대경상고 △중앙대 사범대 △미국 캔자스 주립대 대학원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수 △한국 교총 회장 △한나라당 원내수석부대표 △한나라당 중앙위원회 의장 △17, 18, 19대 국회의원 △현 새누리당 사무총장

[키워드→ 통영]

가난한 생활 탓에 떠나야했던 통영은 그의 텃밭이 됐다.

2008년. 이 의원은 통영, 고성 지역구로 내려가기 직전에 이명박 전 대통령의 연락을 받고 청와대에 갔다. 그곳에서 교육부장관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교육행정학을 공부할때부터 기회가 되면 교육정책을 책임 맡아 직접 집행하는 일도 해 보리라 마음먹고 있던 그였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기회를 지나치면 다시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나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장관직을 고사한 후 지역구로 내려간 그는 통영 고성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됐다.

18대 4년동안 마치 시내를 다니듯 300여 차례나 비행기로 서울서 통영을 다녔고 일주일 중 5일은 통영으로 출퇴근을 했다. 그런 노력의 결실로 숙원사업이었던 67호선, 77호선, 국립해상관리보호법 57개 지역해제, 수산자원보호구역 육지부 해제 등에 국비까지 얹어 조기 착공했다. 그 중 수산자원보호구역 육지부 해제 문제는 강산이 네 번 바뀌도록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을 정도로 해결하기 어려운 사업이었다. 산양스포츠파크 건립, 국도 14호선 확·포장 등의 문제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갔다.

지난 16일에는 환경부 산하 국립공원관리공단이 건립 추진 중인 '한려해상국립공원 생태탐방연수원'의 통영시 유치를 성공시켰다.

2011년 여름에는 통영 앞바다에 흩뿌려진 작은 섬마을을 비롯해 통영, 고성의 모든 마을을 일일이 방문했다. 600개가 훌쩍 넘는 자연부락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들렀다. 초선, 재선 시절 8년을 휴가 한번 제대로 가 보지 못하고 통영에 올인했다. 노력 끝에 내리 3선 의원에 당선됐다.

[그의 대표 법안은]

교육자 출신인 이 의원은 전공을 살려 교육환경을 개선시키기 위한 법안들을 고루 내놨다.

2006년 7월 대표발의한 한국교직원공제회법과 사립학교 교직원연금법 개정안이 대표법안이다. 이 개정안으로 열악한 근무환경에 있던 학력인정평생교육기관의 교사들이 교원공제회나 사학연금가입 등 일반 학교 교직원과 동등한 혜택을 누리게 됐다.

2009년에는 '유치원'이라는 용어를 '유아학교'로 변경하는 내용을 담은 '유아교육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유아 대상 교육기관을 학교로 규정한 교육기본법의 취지를 살리고 초·중·고 및 대학교와 교육 체제를 맞추는 한편,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KAIST 교수로 재직한 경험이 있는 이 의원은 과학기술인 사기 진작과 처우개선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 과학기술이 국가경쟁력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서다.

같은해 이 의원은 2009년 우수 과학기술인의 정년을 61세에서 65세로 연장하는 것을 골자로 한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육성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이 의원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당시 정부출연연구기관 소속 과학기술인들의 정년이 65세에서 61세로 대폭 감축됐다"면서 "정년감축이 과학기술인의 사기저하 등을 초래하고 이것이 결국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장애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며 법안발의 배경을 설명했다.

[연관 검색어→교육, 한국교총 회장]

이 의원의 인생을 얘기할때 '교육'은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미국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준비하던 기간에는 수중에 단돈 50달러가 전부였던 때가 있었다. 지렁이잡이를 하면 수입이 꽤 괜찮다는 말에 캐나다 토론토로 향했고 억척스럽게 일하는 그의 모습에 성공한 교포로부터 사업제안을 받게 된다. 달마다 수익의 절반을 주고 절반은 자기가 가져가는 파격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자서전 '동행'에서 그는 "재산을 쌓아 두고 떵떵거리며 산다할지라도 꿈을 일궈가는 보람을 대신해 주지 못할 것 같았다. 돈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 수 있는 인재를 키우는 일이 내게는 훨씬 더 중요했다"고 거절에 대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또 "삼십년이 족히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교육은 미래요 희망이다. 교육은 우리를 꿈꾸게하고 그 꿈을 성취할 수 있게 한다. 교육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밝혔다.

이 의원은 귀국후 한국교육개발원을 거쳐 카이스트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2001년 49살 젊은 나이에 제30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장으로 선출됐다. 교총 회장직은 60대 중반의 어르신들이 맡아 온 자리였다.

그는 유아교육법 제정과 영유아보육법 개정에 교총 회장으로서 힘을 보탠 일이 지금 생각해도 가슴 뿌듯하다고 한다.

[그의 주변엔 누가?]

이군현 의원은 친이계(친이명박)로 분류된다. MB 시절 정치에 입문한 그는 청와대로부터 교육부 장관을 제안받기도 했다. 이에 이 의원이 거절하자 이 전 대통령은 "그렇게 꼭 국회의원이 돼야만 하냐"고 서운해하셨다는 후문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는 2010~2011년 김무성 원내대표시절 원내수석부대표로 호흡을 맞췄다. 당시 이 의원은 원내 전략도 잘 짜고, 대야 협상도 치밀히 하는 등 각종 사안에 있어서 조정역할을 원만히 했다는 평을 이끌어냈다. 김 대표는 8월 새누리당 사무총장에 이 의원을 임명했다.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과는 중앙대 선후배 사이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이 의원은 지난 7월14일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김무성 대표를 지지했다. 김무성 대표가 원내대표시절 함께 일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다. 이 의원은 서 최고위원을 직접 찾아가 양해를 구했다.

미국 유학 시절 옆집에 살면서 인연을 맺은 이한구 새누리당 의원은 이군현 의원을 정치로 이끈 인물이다. 그들은 한국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골 캔자스에서 서로 의지하면서 더 끈끈한 사이를 이어갈 수 있었다. 둘다 훗날 정치인이 돼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당시 김성진 전 해양수산부 장관도 이웃에 살면서 같이 유학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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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이군현 의원실


대경상고 학생회장 시절의 회의사진이다. 중앙에 일어서서 연설하고 있는 학생이 이군현 의원이다. 그는 어린시절 청계천 피복 공장에서 일을하는 신산의 시간을 보냈지만 검정고시를 거쳐 고등학교에 입학, 교내 회장직을 맡게 됐다. 이 의원의 정치적 끼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요! 주의]

3선을 하고 당내 주요 보직을 거친 중진 의원이지만 대중적 인지도는 '무게'에 못미친다. 내부 조정기능은 잘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개헌이나 당 혁신 등 굵직한 정치현안에 뚜렷한 입장을 각인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도 정치인으로서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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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구경민 기자 kmkoo@mt.co.k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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