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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대출모집업체 명의도용 사기 피해, 금융사 책임"

이데일리 성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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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대출모집업체 명의도용 사기 피해, 금융사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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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대출 사기, 금융사 관리·감독 의무 소홀
"위탁업무로 이익 얻었다면 그 위험도 부담"
표현대리 법리 새 해석…피해자 보호 강화
[이데일리 성주원 기자] 대법원이 대출모집업체의 사기행위로 발생한 피해를 금융회사가 부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금융회사가 대출모집업무를 위탁해 이익을 얻었다면 그에 따른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는 취지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사진= 방인권 기자)

서울 서초구 대법원. (사진= 방인권 기자)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오릭스캐피탈코리아 주식회사가 김모씨를 상대로 낸 대여금 청구소송에서 “표현대리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6일 밝혔다.

대법원은 “오릭스캐피탈코리아가 대출모집업무를 위탁함으로써 이익을 본다면, 동시에 그에 따른 불이익이나 위험도 부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오릭스캐피탈코리아에 대출 실행 과정의 관리·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대출모집법인 주식회사 휴먼트리가 오릭스캐피탈코리아를 상대로 저지른 수백억대 대출사기의 파생 사건이다. 오릭스캐피탈코리아는 휴먼트리에 대출모집업무를 위탁했다.

김씨는 2019년 8월 경기도 소재 아파트를 임대차보증금 2억2000만원으로 임차하면서 휴먼트리에 다른 금융기관으로부터 임대차보증금 담보대출을 받는 데 필요한 서류 작성을 위임했다. 이때 인감증명서, 주민등록등본, 예금통장 사본, 본인 명의 휴대전화 등을 교부했다.

휴먼트리 운영자들은 다른 금융기관으로부터 선행 임대차보증금 담보대출을 받은 후 김씨 명의의 대출서류를 위조해 오릭스캐피탈코리아로부터 2억900만원을 이중 대출받았다. 이들은 이런 수법으로 16회에 걸쳐 총 34억5777만원을 대출받았다.


오릭스캐피탈코리아는 김씨가 민법 제126조의 표현대리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출원리금 2억925만원의 지급을 청구했다.

1심은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1심 재판부는 “김씨에게 표현대리 책임이 있다”며 “휴먼트리 직원들이 대출계약 체결 및 본인확인에 필요한 서류를 모두 갖추고 있었고, 오릭스캐피탈코리아가 이를 믿은 데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이어 “오릭스캐피탈코리아가 업무협약에 따라 통상적인 방식으로 대출거래를 진행했다”고 봤다.

특히 “휴먼트리 직원이 피고 명의의 휴대전화를 소지하고 허위로 대출 의사를 확인해준 상황까지 예상할 수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금융회사의 책임을 제한적으로 봤다.


2심은 1심을 뒤집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2심 재판부는 “표현대리 법리가 적용될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오릭스캐피탈코리아가 휴먼트리를 통해 접수한 대출신청서를 피고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인식했다”며 “대리행위 이론을 적용할 수 없다”고 봤다.

또한 “금융기관으로서 본인 확인의무와 관리·감독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며 “형식적인 전화 확인만으로 본인 확인 절차를 마쳤고, 매우 이례적인 대출 형태임에도 추가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채 서류심사만으로 대출을 승인했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원심의 결론을 유지했지만 법리 해석에서는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먼저 “휴먼트리 직원들의 행위는 피고 성명을 모용해 마치 본인인 것처럼 기망한 것과 마찬가지”라며 “표현대리 법리가 유추적용될 수 있다”고 봤다. 원심이 표현대리 법리 적용을 부정한 것은 잘못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오릭스캐피탈코리아에게 휴먼트리 직원들이 피고 자신으로서 권한을 행사한 것이라고 믿을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표현대리 책임을 부정했다.

대법원은 “금융회사가 핵심적인 대출업무를 위탁하면서 분업의 이익을 누렸다면, 그로 인한 불이익이나 위험도 부담해야 한다”며 오릭스캐피탈코리아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또한 “대출모집인 제도 모범규준에 따라 사전 교육과 관리·감독을 철저히 해야 하고, 고객 본인 확인과 대출계약 중요사항 확인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인 관리·감독 소홀 사례들도 지적했다. 대법원은 “휴먼트리가 16회에 걸쳐 34억여원 규모의 이중대출을 받았고, 대출 특성상 이례적인 정황이 있었다”며 “임대인을 상대로 선순위 담보 설정 여부를 확인했더라면 이중대출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신용정보조회 시스템의 취약점을 고려해 사후적으로 이중대출 여부를 점검했어야 하는데 이를 하지 않아 반복적인 이중대출을 허용했다”고 비판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금융회사의 대출모집업체 관리·감독 책임을 명확히 했을 뿐만 아니라 표현대리 법리 적용에서도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명의모용 사안에서도 일정한 요건 하에 표현대리 법리를 유추적용할 수 있다고 봤지만, 금융회사의 과실이 있는 경우 정당한 사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기준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