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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알바 천국’ 명동 노점… 그 뒤엔 다단계식 ‘불법 카르텔’

조선일보 조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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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알바 천국’ 명동 노점… 그 뒤엔 다단계식 ‘불법 카르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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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 실명제 뚫고 다단계 기업화
지난달 22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거리의 모습. 중국어 간판을 단 노점 앞에 관광객들이 모여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 없음. /장경식 기자

지난달 22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거리의 모습. 중국어 간판을 단 노점 앞에 관광객들이 모여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 없음. /장경식 기자


“탕후루 하오츠(好吃·맛있다).” “전하오칸(眞好看·정말 예뻐요)!”

지난 7일 오후 8시 서울 중구 명동 중심가인 명동길에 노점(露店) 220여 개가 500m 가까이 줄지어 있었다. 곳곳에서 중국어로 호객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 중국 야시장을 옮겨놓은 듯했다. 중국 알바생들이 한국 노래를 중국어로 개사해 부르거나, 손님들에게 다가가 중국어로 “싸요, 싸요!”라고 외쳤다. 이들 대부분은 “사장님이 따로 있지만 나오지 않는다” “내가 노점을 열고 닫는다”고 했다.

서울 중구는 지난 2016년부터 노점 실명제를 운영하고 있다. 1년에 약 90만원을 받고 도로 점용 허가증을 내주는 대신 ‘1인 1노점’ ‘본인 직접 운영’ ‘격일제 운영’ 등의 조건을 달았다. 수입이 많지 않은 생계형 노점상을 보호하고, 주인 한 명이 여러 개를 운영하는 기업형 노점은 없애겠다는 취지였다.

올해 기준으로 중구에 등록된 노점은 348곳이다. 격일제 운영 원칙에 따르면 하루에 영업 가능한 노점 수는 최대 174곳이다. 그러나 지난달 말부터 최근까지 명동을 찾았더니 영업 중인 노점이 223곳이었다. 이 중 30곳(13.4%)이 사장 없이 직원을 따로 고용해 운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곳은 한국인이 아닌 중국 등 외국인 알바생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본지는 이들 노점이 현금 계좌 이체를 받기 위해 적어 놓은 은행 계좌 번호와 예금주 이름을 수집·대조해봤다. 2개 이상 노점에서 동일한 예금주 이름을 내걸고 있는 곳이 41개(18.3%)에 달했다. 최대 4개 노점의 예금주가 동일한 곳도 있었다. 이들은 계좌 번호가 적힌 안내판을 평소엔 숨기다가 결제할 때만 손님에게 안내판을 슬쩍 보여주는 방식으로 예금주를 숨기고 있었다.

그래픽=이진영

그래픽=이진영


상인 10명에게 노점을 운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외부인은 불가능하다” “소개를 받지 않으면 못 들어온다”는 답이 돌아왔다. 노점 경력 10년 차 A씨는 “무턱대고 외부인에게 넘기진 않는다”며 “친인척이나 가족, 가까운 지인들에게 돈을 받고 운영을 맡긴다”고 했다. 명동 노점 상황을 잘 아는 주변 업주들이 입을 모아 “구에 도로 사용료로 1년에 90만원만 내면서 수십 배를 받아 챙기는 구조”라며 “억대 연봉이 넘는 일부 상인 중심의 ‘노점 카르텔’이 공고해졌다”고 하는 이유다.


서울 중구는 작년 명동 노점의 약 80%를 사업자로 등록하고 카드 단말기를 도입하도록 했다. 바가지요금과 현금 결제 강요, 불친절함 등으로 논란이 커지자 중구가 내놓은 대책이었다. 당시 중구는 “‘대한민국 관광 1번지’라는 명성을 되찾고 신뢰를 회복하려는 차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본지가 지난달 29일 저녁 명동길 노점 223곳에 카드 결제 가능 여부를 물은 결과, 약 25%(55곳)가 “현금 결제만 된다”고 했다. 카드 단말기가 설치돼 있는 노점들도 “1만원 이상 구매할 때만 카드 결제가 가능하다”고 했다. 이날 분식을 파는 노점에서 떡볶이와 어묵 꼬치 9000원어치를 주문한 남성 손님이 카드를 내밀자 주인이 “카드는 안 된다. 계좌 이체를 하라”며 계좌 번호판을 가리켰다.

등록 노점은 도로 점용 허가를 받은 뒤 본인이 직접 운영해야 한다. 그러나 본지가 상인들과 인근 부동산을 취재한 결과 1억~2억원 상당의 권리금을 받고 자리를 넘기거나, 월세 150만~300만원에 세를 놓는 ‘매대 임대업’도 이뤄지고 있었다. 사업자로 등록한 업주가 다른 세입자에게 노점을 임대하고, 이 세입자가 다시 외국인 알바를 고용해 운영을 맡기는 식으로 노점 하나에 ‘다단계’ 운영이 이뤄지는 것이다.

한 업주가 여러 노점을 운영하는 ‘기업형 노점’들이 명동에서 늘면서 주변 점포들도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명동의 한 부동산 업자는 “주변 식당 업주들이 ‘우린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데, 노점상들은 현금으로 장사하면서 세금을 회피하고, 1년에 도로 사용료 90만원만 내면 되니 이런 불공정 게임이 없다’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고 했다.


격일제 원칙을 어기면서 여러 노점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아지다 보니 보행권 침해도 심각하다. 중구의 단속 건수는 2023년 75건에서 올해는 5월까지 5건으로 해마다 줄고 있다. 구의 단속이 형식적이란 비판도 거세지고 있다. 명동의 한 부동산 관계자는 “작년 봄 야광봉을 든 단속반이 명동길을 순찰하자 평소엔 찾아보기 힘들었던 노점 주인들이 줄줄이 나와 ‘당신이 노점 주인이었나’라고 서로 묻기도 했다”고 했다.

노점 실명제를 2020년부터 운영한 서울 동대문구는 2022년부터 특별사법경찰관(특사경) 제도를 도입해 최근 3년간 지역 내 노점 572곳 중 233곳을 철거했다. 이 중 서울시나 구의 정식 허가를 받은 노점도 69곳(29.6%)이나 포함됐다. 허가를 받았더라도 대리 운영이나 다점포 방식 등으로 기업형으로 운영되면 허가를 취소하고 철거하는 방식이다.

당초 동대문구도 명동처럼 노점 운영권을 남에게 팔아넘기거나 한 사람이 여러 곳을 운영하는 등 ‘기업형 노점’을 단속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구 직원이 단속을 위해 신분증 제시를 요구해도 “권한이 없지 않느냐”며 노점 주인들이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에 동대문구는 직원 7명을 특사경으로 지정해 관할 구역별로 배치, 정기 단속과 수시 점검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이 직원들이 현장을 직접 조사해 노점 운영자 인적 사항과 운영 이력을 대조해 무단 임대·명의 변경 등 실명제 위반 사례를 적발하고 있다.


☞노점 실명제

생계형 노점 보호와 기업형 노점 차단을 위해 ‘1인 1노점’ ‘본인 직접 운영’ ‘격일제 영업’을 조건으로 도로점용 허가를 내주는 제도다. 서울 중구가 2016년부터 명동 일대 노점들을 대상으로 시행하고 있다. 실소유자와 운영자가 일치해야 하며 대리 영업, 다점포 운영 등은 금지된다.

[조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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