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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함에 겨워 아름다워진 피사체를 아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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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함에 겨워 아름다워진 피사체를 아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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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사진 거장이자 환경운동가 세바스치앙 살가두의 파란만장했던 생애

2005년 8월14일 세바스치앙 살가두가 아마존 하류 알투싱구 보호구역 내 와우라 마을에서 열린 ‘콰루프’ 망자의 축제를 지켜보고 있다. REUTERS

2005년 8월14일 세바스치앙 살가두가 아마존 하류 알투싱구 보호구역 내 와우라 마을에서 열린 ‘콰루프’ 망자의 축제를 지켜보고 있다. REUTERS


다큐멘터리 사진의 거장이자 환경운동가 세바스치앙 살가두(사우가두)가 2025년 5월23일 프랑스 파리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 렐리아 와니크와 함께 설립한 ‘인스티투토 테라’는 성명을 내어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다 공정하고, 인간적이며, 생태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싸웠다”며 고인을 기렸다. 향년 81.



살가두는 1944년 2월8일 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주의 아이모레스에서 태어났다. 열대우림이 무성한 곳이었다. 농장주였던 아버지는 8남매 중 유일한 아들을 법률가로 키우고 싶어 했다. 아들은 경제학을 선택했다. 대학에 진학한 살가두는 19살 때 건축을 전공하는 17살 여성 렐리아 와니크를 만났다. 젊은 살가두와 와니크는 브라질 군부독재(1964~1985년)에 맞서 싸운 혁명적 좌파조직의 열혈 활동가였다. 두 사람은 살가두가 상파울루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인 1969년 파리로 ‘자발적 망명’길에 올랐다.





배우자 카메라 빌린 뒤 돌려주지 않은 경제학자

1971년 파리대학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마친 살가두는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국제커피기구(ICO)에서 경제학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카메라를 처음 손에 쥔 것도 이 무렵이다. 뷰파인더를 통해 바라본 세상은 살가두에게 일종의 ‘계시’였다. 와니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건축을 전공하면서 과제를 하기 위해 카메라가 필요해 샀다. 어느 날 남편이 카메라를 빌려갔고, 다시는 돌려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남편은 사진의 세계로 발을 디뎠다. (…) 처음엔 남편의 재능을 알아채지 못했다. 함께 사진 전시회를 다니고 사진의 역사를 공부했다. 그렇게 사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싹텄다.” 1973년 세계은행이 일자리를 제안했다. 살가두는 와니크와 상의했다. 이미 마음이 멀리 가 있었다. 그해 살가두는 아내의 전폭적 지지 속에 프로 사진가의 길로 들어섰다.



2025년 5월30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세바스치앙 살가두의 ‘노동자’ 전시회를 알리는 입간판 앞을 한 사람이 지나가고 있다. 이 전시는 그의 삶과 작업을 기리는 유작 전시가 됐다. EPA 연합뉴스

2025년 5월30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세바스치앙 살가두의 ‘노동자’ 전시회를 알리는 입간판 앞을 한 사람이 지나가고 있다. 이 전시는 그의 삶과 작업을 기리는 유작 전시가 됐다. EPA 연합뉴스


이탈리아어로 ‘밝음’(키아로)과 ‘어둠’(오스쿠로)이 만나 ‘명암’(키아로스쿠로)을 이룬다. 흑백사진에도 빛이 있다. 그 빛이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살가두의 사진에는 그의 낙관이 선명하다. 당시 파리에선 ‘세계 3대 사진 에이전시’로 불린 시그마·감마·매그넘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살가두는 사진계에서 그야말로 혜성처럼 떠올랐다. 시그마와 감마를 거친 살가두는 1979년 매그넘에 가입했다. 매그넘은 전설적인 사진가 로버트 카파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등이 1947년 설립한 사진가 집단이다. 후에 와니크는 매그넘의 파리 갤러리 관장을 지냈다. 두 사람은 창작의 동반자였고, 동업자였다. “와니크 없는 살가두는 살가두가 아니다”란 말이 생겨난 이유다.



브라질이 군부독재의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뒤, 살가두는 고국 방문이 허용됐다. 그는 1986년 브라질 세라펠라다 금광 노동자 연작을 통해 세계 사진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1991년엔 쿠웨이트를 침공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군이 불을 지른 유전 화재 진압 작업에 투입된 노동자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재난 수준으로 번진 당시 유전 화재로 국제적 비난 여론이 빗발치면서, 후세인은 이라크군 철군을 명했다. 1993년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사진집 ‘노동자’를 선보였다. 농업·식량·광업·제조·원유·건설 등 6개 주제에 걸쳐 석기시대에서 산업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는 ‘손노동’에 대한 고고학적 탐색이었다. 당시 작가 아서 밀러는 “살가두는 모든 것이 만들어지는 노동의 세계가 안고 있는 고통과 아름다움, 잔혹함을 여실히 드러냈다”고 평했다. 살가두는 1994년 매그넘과 결별하고 아내와 함께 자신만을 위한 사진 에이전시 ‘아마조나스 이미지스’를 창립했다.





르완대 대학살 사진 작업 뒤 무너진 심신

매그넘과 결별 뒤 첫 작업은 ‘엑소더스’(대탈출)였다. 6년여에 걸쳐 35개국을 돌며 자기 땅에서 쫓겨난 이주민들의 삶을 취재했다. 미국이란 이상향을 향해 가는 라틴아메리카 주민들, 옛 소련 지역의 유대인, 르완다 대학살 당시 후투 난민들, 알바니아로 몰려드는 코소보 피란민, 지중해를 지나 유럽으로 향하는 아랍과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주민들의 참상을 사진 300장에 오롯이 담아냈다.



2017년 2월28일 독일 중부 에르푸르트의 쿤스트할레 미술관에서 열린 세바스치앙 살가두의 ‘엑소더스’ 전시회에서 한 관람객이 아동 초상화 시리즈 앞에 앉아 있다. AP 연합뉴스

2017년 2월28일 독일 중부 에르푸르트의 쿤스트할레 미술관에서 열린 세바스치앙 살가두의 ‘엑소더스’ 전시회에서 한 관람객이 아동 초상화 시리즈 앞에 앉아 있다. AP 연합뉴스


“총체적 야만을 목격했다. 매일 수천의 죽음을 지켜봤다. 내 종족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인류가 더는 생존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르완다 대학살의 상흔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장기 출장에 나선 살가두는 삶의 기로를 만났다. 인종학살이 불러온 인간의 고통과 참상을 지켜보면서 몸도 마음도 무너졌다. 파리로 복귀한 그는 병원을 찾았다. 미국 주간지 뉴요커는 2025년 5월31일 “당시 의료진은 살가두에게 ‘신체적으론 아무 문제가 없다. 다만 사진가 일을 계속하면 결국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살가두는 생전에 뉴요커와 한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인간이란 게 견딜 수 없었다. 우리 인간이 얼마큼이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봤기 때문이다. 우리는 끔찍한 종족이다. 사진을 포기했다. 다시는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세바스치앙 살가두가 2017년 10월20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미술관 메라비글리에서 ‘쿠웨이트: 불타고 있는 사막’ 전시회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세바스치앙 살가두가 2017년 10월20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미술관 메라비글리에서 ‘쿠웨이트: 불타고 있는 사막’ 전시회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카메라를 내려놓은 살가두는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치유의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고향 땅에선 생명이 느껴지지 않았다. 울창했던 열대우림이 민둥산으로 변해 있었다. 와니크가 숲가꾸기를 제안했다. 두 사람은 묘목을 키워 옮겨심기를 시작했다. 1998년 설립한 ‘인스티투토 테라’의 시작이었다. 두 사람은 그동안 2천㏊에 이르는 땅에 700만 그루 이상의 묘목을 심었다.



숲이 되살아나면서 사진가의 본능도 꿈틀거렸다. 살가두의 가슴이 다시 두근거렸다. 인간의 행위가 얼마나 자연을 망쳐놓을 수 있는지에 대한 깨달음이 그를 움직였다. 살가두는 “우리 행성을 둘러보고 싶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곳에 가보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제네시스’(천지창조·2013년)와 ‘아마조니아’(2021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살가두는 ‘제네시스’ 머리글에서 이렇게 썼다. “지구의 절반은 여전히 천지가 창조됐던 그때 모습 그대로였다. ‘제네시스’ 작업을 하면서 카메라로 자연이 내게 말을 걸도록 했다. 자연의 말을 듣는 건 내겐 과분한 특권이었다.”





노동자·이주민·학살 난민, 그리고 지구

작가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2003년)에서 살가두에 대해 “세상의 비참함이 전공인 사진가”라고 표현했다. 평생 그에겐 “시각적 미학에 집착해 인간의 고통과 환경 재난의 참상을 가렸다”는 비난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살가두는 80살 생일을 맞은 2024년 2월8일 영국 일간 가디언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불행을 탐닉하는 유미주의자’라고 비난한다. 가난한 세상에 아름다움을 강요한다고. 왜 가난한 세상은 부유한 세상보다 추해야 하나? 이곳의 빛도 저곳의 빛과 같은데. 이곳도 저곳만큼 존엄한데. (…)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가진 결점이 내겐 없다. 그건 죄책감이다. 나는 여기 유럽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제3세계에서 왔다. 내가 태어났을 때 브라질은 개발도상국이었다. 내가 찍는 사진은 내가 발 디디고 있는 쪽, 내 세계, 내가 온 곳에서 바라본 세상이다.”



2017년 12월18일 스페인 중부 아빌라의 성벽 옆에서 열린 ‘제네시스\' 전시회 모습. EPA 연합뉴스

2017년 12월18일 스페인 중부 아빌라의 성벽 옆에서 열린 ‘제네시스\' 전시회 모습. EPA 연합뉴스


평생 130여 나라를 돌며 가난하고 한계선상으로 내몰린 이들의 삶을 애정 어린 렌즈로 들여다봤다. 노동자와 이주민에 대한 관심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그의 작품세계다. 전쟁과 혁명, 쿠데타와 인도주의적 위기, 기근과 자연재난을 목격했다. 그는 “세계를 찍었다”고 표현하곤 했다. 가디언은 살가두에 대해 “로버트 카파, 유진 스미스, 마거릿 버크화이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제임스 낙트웨이, 스티브 매커리 등과 함께 사진저널리즘의 팡테옹(위인들의 안식처)에 들 것”이라고 평했다.



살가두는 1974년 모잠비크 독립전쟁 취재 도중 타고 있던 차량이 지뢰로 폭발해 척추를 다쳤다. 2010년 인도네시아령 뉴기니(서파푸아)에서 취재 도중 희귀 말라리아에 걸렸다. 당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골수 기능이 손상되면서 백혈병 발병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80살까지 취재 현장을 지켰다. 그는 가디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래 살 수 없을 것을 안다. 오래 살고 싶지도 않다. 아주 오래 살았고, 수많은 것을 봤다. (…) 우리 종족, 인간에 대한 내 전망은 비관적이다. 인간은 한 치도 진화하지 못했다. 우리 종족은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2024년 11월26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리세우 대극장에서 열린 세바스치앙 살가두의 ‘아마조니아’ 특별 콘서트에서 사진 영상을 배경으로 교향악이 연주되고 있다. EPA연합뉴스

2024년 11월26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리세우 대극장에서 열린 세바스치앙 살가두의 ‘아마조니아’ 특별 콘서트에서 사진 영상을 배경으로 교향악이 연주되고 있다. EPA연합뉴스


눈 가린 인류가 스스로를 해치고 있다. 비관의 이유다. 자연은 자기 길을 따라 진화를 계속한다. 살가두는 이를 갈라파고스에서 배웠다.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은 그곳에서 47일을 머물렀다. 살가두는 그곳에서 90일을 지냈다. 살가두의 서늘한 경고다. “인류에 대해선 비관적이지만, 우리 행성에 대해선 낙관적이다. 지구는 회복할 것이다. 지구가 인류를 몰아내기가 갈수록 쉬워지고 있으니까.”





영혼과 가슴까지 통째로 사용해 인류에 경종 울려

2025년 5월23일 살가두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주앙 로렌수 앙골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었다. 룰라 대통령은 회담 참석자들에게 살가두 추모를 위해 1분간 묵념을 제안했다. 그는 따로 성명을 내어 “살가두의 작품은 인류 모두의 의식에 경종을 울렸다. 그는 그저 눈과 카메라로만 사람을 담아내지 않았다. 자신의 영혼과 가슴까지 통째로 사용했다. 살가두는 세계가 우리에게 준 최고의 사진가”라고 애도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세바스치앙 살가두가 2014년 1월30일 이탈리아 베니스의 갤러리 ‘카사 데이 트레 오치’에서 ‘제네시스’의 거대한 포스터 앞에 서 있다. EPA 연합뉴스

세바스치앙 살가두가 2014년 1월30일 이탈리아 베니스의 갤러리 ‘카사 데이 트레 오치’에서 ‘제네시스’의 거대한 포스터 앞에 서 있다.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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