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조선일보 언론사 이미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노예 사진 주인공 ‘파파 렌티’ 6년 소송 끝난 사연

조선일보 뉴욕=윤주헌 특파원
원문보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노예 사진 주인공 ‘파파 렌티’ 6년 소송 끝난 사연

서울맑음 / 11.1 °
'파파 렌티'(오른쪽)와 그의 딸 델리아의 사진을 둘러싼 법적 분쟁이 마무리 됐다./CNN

'파파 렌티'(오른쪽)와 그의 딸 델리아의 사진을 둘러싼 법적 분쟁이 마무리 됐다./CNN


“17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사건은 미국에서 노예로 살았던 사람들의 후손들에게는 ‘전례 없는’ 승리입니다.”

지난달 29일 코네티컷에 사는 타마라 라니어씨는 변호인을 통해 AP에 이같이 밝히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 여성은 미국 하버드 대학교와 4장의 사진을 둘러싸고 6년간 소송을 벌여왔다. 하버드대는 이날 합의로 소송을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학교 측은 “피보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7명의 사진 15장을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있는 ‘국제 아프리카계 미국인 박물관’으로 이전하겠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사진이기에 라니어는 미 최고 명문대인 하버드대와 장기간 소송을 이어 왔을까.

이번에 옮겨지는 사진 15장 중 4장은 ‘렌티’라는 흑인 남성과 그의 딸인 ‘델리아’의 것이다. 이 사진은 175년 전인 1850년 하버드대에서 자연사를 가르치던 루이스 아가시즈 교수가 사진사에게 의뢰해 찍었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아가시즈는 ‘흑인과 백인이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진 종’이라는 ‘다기원설(polygenesis)’을 주장했다. ‘흑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인종차별적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된 이 이론은 나중에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당시 노예였던 흑인들의 사진을 초창기 사진 기술인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으로 찍었다.

렌티와 델리아의 사진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럼비아에 위치한 한 스튜디오에서 아가시즈 교수 의뢰로 사진사 J.T. 제일리씨가 찍었다고 한다. 사진에서 렌티와 델리아는 무표정하게 상반신을 노출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노예 사진”이라고 했다. 잊혔던 사진은 1976년 하버드대 피보디 박물관 지하실의 사용되지 않은 보관함에서 발견됐다. 사진과 함께 발견된 메모에는 이름, 플랜테이션(농장), 부족 등 노예 신원에 대한 작은 단서도 있었는데, 렌티에게 붙어 있던 라벨에 따르면 그는 콩고에서 태어났다.

'파파 렌티'가 자신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며 하버드 대학교와 소송을 이어 온 타마라 라니어./로이터 연합뉴스

'파파 렌티'가 자신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며 하버드 대학교와 소송을 이어 온 타마라 라니어./로이터 연합뉴스


소송 당사자인 라니어는 2010년부터 가족의 뿌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조상이 ‘파파 렌티(Papa Renty)’라고 들었다. 이 과정에서 콜럼비아에 있는 한 플랜테이션에서 작성된 노예 목록에서 ‘빅 렌티’ ‘렌티’ ‘델리아’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라니어는 ‘빅 렌티’가 어머니가 말해 온 자신의 조상 ‘파파 렌티’이며, 렌티와 델리아의 아버지라고 믿었다. 그러나 빅 렌티와 파파 렌티가 가족이며 자신이 그 후손이라는 점을 증명할 구체적 증거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라니어는 하버드대가 ‘렌티’라는 인물의 사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2011년 하버드대에 편지를 보내 자신이 그의 후손일 수 있다는 점을 밝혔지만 하버드대는 응답이 없었다고 한다. 라니어가 본격적으로 소송에 나선 계기는 2017년이다. 당시 하버드대는 노예제와 관련된 콘퍼런스를 열었는데 학교는 렌티의 사진을 사용했다. 또 40달러짜리 인류학 책 표지에도 사진을 실었다. 라니어는 2019년 “하버드대가 조상 사진을 허락도 없이 사용해 돈벌이한다”며 소송을 냈다. 사진의 소유권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주장도 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파파 렌티'의 사진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노예 사진이다./X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파파 렌티'의 사진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노예 사진이다./X


소송은 라니어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2021년 매사추세츠주 법원은 “라니어와 렌티의 관계가 입증되지 않는다”며 소송을 기각했다. 그런데 이듬해 주 대법원에서는 “라니어에게 사진 소유권은 없지만 하버드대가 정신적 피해를 줬다는 주장은 할 수 있다”고 했다. 소송은 이어졌고 하버드대는 결국 합의로 재판을 종결했다.

하버드대가 라니어에게 합의금을 지급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하버드대가 노예제가 유지되는 데 어떤 방식으로든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하버드대는 사진이 계속해서 논란을 빚자 ‘제3지대’에 속하는 다른 미술관을 찾았고, 사진이 찍힌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미술관을 선택했다.

조선일보 국제부가 픽한 글로벌 이슈!

뉴스레터 구독하기

[뉴욕=윤주헌 특파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