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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라벤스브뤼크 라핀스(토끼들)'의 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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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59년 미국을 방문해 성형-정형수술을 받고 새 삶을 얻은 나치 생체실험 생존 여성들. connecticuthistory.org

1958~59년 미국을 방문해 성형-정형수술을 받고 새 삶을 얻은 나치 생체실험 생존 여성들. connecticuthistory.org


(이어서) 미국 뉴욕 출신인 페러데이는 프랑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프랑스를 동경하며 성장했다. 젊은 시절 연극에 심취해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 등의 배우로 활동하던 그는 1930년대 중반부터 뉴욕 프랑스 영사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했고 전시 샤를 드골이 주창한 ‘자유 프랑스 저항운동’에 동참해 미국 내 프랑스 지원조직인 ‘France Forever’의 원년 회원으로 활동했다.

전후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 수용소 생존 여성들이 주축이 돼 설립한 ‘전미 추방자및 레지스탕스 수감자 협회(ADIR)’에도 가입해 라벤스브뤼크 생존자인 드골의 조카 제느비에브 드골 등과 교류했고, 그 과정에서 생체실험 생존자들을 알게 됐다.

그는 1958년 이후 여러 차례 적성국인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해 피해 여성들을 만났고, ‘히로시마 처녀들’의 성형수술을 집도한 의사를 대동해 의료적 자문을 구했다. 미국 정부와 폴란드 당국을 설득한 것도 그였다.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기까지 라벤스브뤼크에는 각국 여성 약 14만 명이 수용됐다. 80여%가 정치범이었고 유대인은 15%였다. 알려진 바 희생자는 5만여 명이고, 가스실에서 희생된 이는 약 2,200명이었다.

페러데이는 1958년 12월부터 만 1년간 '라벤스브뤼크 라핀스(라벤스브뤼크의 토끼들)' 즉 생체실험 피해 여성들을 미국으로 초청해 성형수술 등을 주선하며 일부 여성들과 함께 미국 전역을 돌며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이라는 통념적 등식이 편의적으로 배제한 희생자와 피해자들의 사연을 알렸다. 그와 여성들은 1959년 여름 워싱턴DC의 상하원 의원 다수와 특별 오찬을 갖기도 했다.
페러데이는 유년 시절의 여름 별장이던 코네티컷주 베들레햄의 집으로 여성들을 초청해 어울리는 등 평생 가족처럼 그들의 안부를 챙겼다. 생존 여성들의 편지 속 페러데이는 그들의 ‘나의 어머니’나 ‘언니’ ‘대모’였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