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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에서 바라본 효창공원 [서울연구원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서울=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새들의 지저귐도 얼어붙을 것 같은 겨울 아침. 털모자, 목도리에 두툼한 외투로 꽁꽁 싸매고 운동 나온 어르신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한겨울의 용산 효창공원. '효창'이라는 이름은 익숙하다. 모르는 시민이 없다.
하지만 이곳이 단순한 서울의 한 공원이 아니라는 사실, 군데군데 끊어지고 헤어져 더 이어가야 할 우리 민족의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곳이라는 사실은 잘 모른다.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 위치했으면서도 늘 한발짝 빗겨나 있는 곳. 어쩌면 우리 역사의 가장 큰 '공백'일지도 모르겠다.
에너지가 빈 곳으로 이동하듯 비어있음은 채움을 불러온다. 언제부터였을까. 23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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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 산책로 [사진/백승렬 기자] |
◇ 왕실 묘역 효창원
1786년(정조 10년) 5월 11일. 정조의 큰아들 문효세자가 창경궁 별당에서 5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묘호(왕이 죽은 뒤 신위를 모실 때 붙이는 호)가 효창(孝昌)으로 정해졌고, 당시 고양(高陽) 율목동이던 현재 효창공원에 묘를 썼다.
당시 용산은 한강포구에서 한양도성을 최단 거리로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묘의 입지 선정은 풍수지리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지관을 데리고 수차례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다.
동쪽에 남산, 북쪽에 안산을 두고 남쪽으로 한강을 바라보니 배산임수의 최고 명당자리임은 분명하다.
서오릉과 동구릉도 후보에 올랐지만, 임금이 행차하기 편리하다는 점이 작용했다.
4개월 뒤 아들을 잃은 충격을 이기지 못했는지 어머니 의빈성씨도 세상과 이별하고는 아들 묘 옆에 묻혔다.
1829년 4월에는 순조와 후궁 숙의박씨 사이에서 낳은 영온옹주가 13세 나이로 요절해 효창묘에 묻혔고, 1854년에는 숙의박씨도 이곳에 안장됐다.
효창묘는 1870년 효창원(孝昌園)으로 승격했다.
효창원은 개항 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겪으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1894년 서울 도성 밖에 진주한 일본군은 만리재에 주둔하며 숙영지를 만들었다. 또 러일전쟁 때는 1906년 효창원 남쪽에 유곽과 철도 관사를 만들어 묘역을 잠식했다.
이때부터 효창원은 '효창공원'이라고도, '효창원 공원'이라고도 불리게 된다. 왕실 묘역이 공원으로 격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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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효창숲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 세자 묘와 골프장의 공존
1921년 6월 일본인들은 급기야 효창원 숲을 파헤쳐 골프장을 만들었다. 2천300야드, 9홀 규모로,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이다.
당시 흑백 사진을 보면 한국 소년들로 보이는 캐디도 등장한다.
효창원 골프 코스는 왕실 묘역을 그대로 존치한 채 조성됐다. 당시 골프장을 소개한 엽서를 보면 2번 홀 그린 옆에 문효세자 묘로 추정되는 고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 체류 중인 러시아계 영국인인 댄트(H.E.Dannt)가 골프장 건설을 추진했는데, 그는 '은자 왕국에서의 골프'라는 저서에서 "송림이 울창하고 잡초가 무성한 효창원 일대를 손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중략) 9홀을 넣기에도 넓지 못한 용지에 묘까지 산재해 있는 등 코스 조성에 여러 애로가 겹쳤다"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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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개설된 효창원 골프장. 국내 최초의 골프장이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효창원 골프장은 1924년 폐쇄됐다. 더 많은 홀이 필요해지면서 현 청량리 근처에 18홀 골프장이 생겼기 때문이다.
일제는 1930년대 말 효창원을 유원지로 만들어 아동용 놀이시설을 세웠고 1940년에는 효창원을 공원으로 고시했다.
공원 뒤편에는 주택단지가 조성됐는데, 당시 일간지 주택 분양 광고에도 효창공원이 등장한다.
해방 한 해 전인 1944년 4월에 일제는 침략전쟁의 희생자 충령탑을 세운다며 효창공원 내 무덤을 전부 경기도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버렸다.
◇ 순국선열 묘역과 효창 운동장
해방 후 효창공원은 다시 정체성의 변화를 겪는다.
1946년 귀국한 김구의 주도로 일본에 있던 이봉창·윤봉길·백정길 삼의사의 유골이 국내로 봉환됐고, 효창공원에 독립운동가 묘역이 조성됐다.
7월 6일 문효세자가 묻혔던 자리에 국민장으로 삼의사가 안장됐고, 왼쪽에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도 마련됐다. 안중근 유해를 찾아내겠다는 김구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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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 삼의사 묘 [사진/백승렬 기자] |
이후 1948년 임정 요인이었던 이동녕·차이석·조성환의 유해가 차례로 효창원 동편 문효세자의 어머니 의빈성씨가 묻혔던 묫자리에 안장됐다.
이듬해인 1949년 6월엔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진 김구도 유언에 따라 효창원 서편 삼의사 묘역 옆에 묻혔다.
왕실 묘역이 공원과 골프장을 거쳐 선열 묘역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1954년 효창공원은 뜬금없이 국민체육관 건립 후보지로 선정된다.
반대여론이 커지면서 선열묘역은 그대로 뒀지만, 연못과 소나무 15만 그루를 뽑아내고 1960년 효창운동장이 개장했다. 김구와 삼의사 묘역 옆에 체육시설이 들어섰다.
정치적으로 대결 구도였던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의 관계가 운동장 조성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운동장 개장 후 찍은 항공사진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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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0월 효창운동장 개장식 [연합뉴스 자료사진] |
◇ 반공투사위령탑에서 원효대사 동상까지
1960년대 이후 효창공원에는 각종 시설이나 기념물들이 일관된 기준 없이 하나둘씩 들어선다.
1962년 스케이트장, 1966년 테니스장, 1969년 어린이 놀이터가 생겼다.
그 해엔 김구 묘소 윗부분에 북한반공투사위령탑이, 임정 묘역 북쪽에는 원효대사 동상이 각각 세워졌다. 원효대사와 효창공원은 '효'자만 같을 뿐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1972년엔 김구 묘역 서쪽에 대한노인회 건물이 들어섰다.
이질적 요소들이 애국선열 묘역을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다.
1970년대 들어 효창공원은 근린공원으로 정비되기 시작했다. 10개년 계획으로 묘지 진입로와 돌계단 설치, 묘역 외곽주변 정비, 수림 조성 등이 이뤄졌다.
1977년 효창공원은 도시계획법에 의해 공원으로 고시됐다.
그러나 효창공원이 공원이기에 앞서 선열묘역이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1989년 효창공원은 사적 제330호가 된다.
2000년 서울시는 효창공원을 도시공원으로 지정했고 2002년엔 생태 습지와 자연학습장을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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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 원효대사 동상 [사진/백승렬 기자] |
지금 이곳은 선열묘역이자, 생태공원이자, 주민 체육단련시설이자, 어린이 놀이터다. 독립운동에서 반공, 노인, 어린이, 생태,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복잡다단한 요소들이 밀집한 공간이다.
황성미 효창공원 자원봉사해설사는 "효창공원은 240년 전 정조의 슬픈 가족사에 그 뿌리가 닿아있다"며 조선시대 왕실 무덤에서 일제강점기 공원으로, 해방 이후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성지로 거듭난 이곳은 그래서 지금은 죽은자와 산자가 함께 있는 특이한 공원"이라고 말했다.
효창공원의 정체성은 뭘까. 무엇이어야 하는 걸까.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해석이 변하면 앞으로도 그 정체성은 계속 바뀌게 될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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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의 정문인 창열문 [사진/백승렬 기자] |
◇ 숲은 고요하지 않다
효창공원은 지금 어엿한 숲이다. 양버즘나무, 물오리나무, 덜꿩나무, 국수나무, 낙우송, 화백나무, 서어나무, 자귀나무, 때죽나무… 이름만으로는 그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운 나무들이 숨 쉬고 있다.
수백종의 나무와 꽃들이 반기지만 무엇보다 효창공원의 대표 수종은 소나무다. 조선시대 울창한 소나무 숲이었고, 왕실 묘역이었기 더더욱 그렇다.
우리나라 묘지 부근에는 유난히 소나무가 많다. 수직으로 곧은 숲이 있어야만 영혼이 그 숲을 통해 천상계와 지상계를 오르내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소나무가 뱀과 벌레를 막아준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공원의 정문은 창열문이다. 담장 옆에 세 칸으로 세운 외삼문(外三門)으로 제사 지낼 때는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고 왼쪽 문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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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 묘 앞 팽나무 [사진/백승렬 기자] |
공원을 뺑 둘러 1천500m가량의 둘레길이 있다. 왼쪽에서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돌아본다.
백범기념관 오른쪽에 김구 선생 묘역이 있다. 뒤편에 소나무 숲이 있고 묘 앞에 수백 년 수령을 뽐내는 웅장한 팽나무가 우뚝 서 있다.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백범의 위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순국선열 8인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 앞 양쪽에는 배롱나무 두 그루가 호위병처럼 지키고 있다. 배롱나무 꽃은 7월부터 늦가을까지 피고 지고를 반복한다. 독립을 향한 선열들의 끈기와 의지를 상징한다.
의열사 옆에는 삼의사 묘가 있다. 안중근 의사의 가묘까지 묘는 4기다. 1946년 이봉창 의사 묫자리를 조성할 때 그 밑에서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장난감 상자가 나왔다는 기록도 있다.
삼의사묘의 묘단 밑에는 유방백세(遺芳百世: 꽃다운 향기가 백세에 전한다)라는 글귀가 선명하다. 김구 선생의 친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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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 의열사 내부 [사진/백승렬 기자] |
삼의사묘를 내려오면 삼의사와 김구, 안중근을 상징하는 무궁화가 차례로 심어진 무궁화길이 있고, 하늘과 땅이 만난다는 뜻을 가진 푸른색의 조형물을 지나면 길은 키 큰 은행나무들이 둘러선 임정 요인 묘역으로 이어진다.
한걸음 한걸음 내디디며 겨울 도심 숲의 얼음 같은 공기를 마셔본다.
'추워지고 나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也)는 논어의 구절이 떠올랐다.
"효창공원은 여름이 좋지만, 겨울에 잎이 떨어지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황성미 해설사의 말도 같은 의미로 들렸다.
신산한 한국 근현대사가 압축된 이곳, 효창숲의 스토리텔링은 아직 미완성이다. 안중근 의사의 가묘처럼 어딘가 비어있는 이곳은 무언가로 채워지길 기다리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은 '구용산고지'(舊龍山高地)라고 불렸다. 공원은 용산의 북서쪽 높은 곳(高地)에서 용산 전체를 내려다본다.
수난의 한국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고 지켜본 숲은 말이 없다. 하지만 말이 없다고 모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숲은 살아있고, 고요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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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숲에 있는 조형물 '점지'. 하늘과 땅이 만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진/백승렬 기자] |
Tip
효창공원이 더 알고 싶다면 용산역사문화사회적협동조합이 매달 둘째 주와 넷째 주 토요일 오전 11시(하절기 7·8월, 동절기 12·1월 제외)에 진행하는 효창공원 자원봉사해설을 들어보길 권한다. 문의는 이메일(goldagnes@naver.com)로 하면 된다.
※ 참고 자료
1.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논문 '효창공원이 장소성 형성과 변화 해석'(김해경, 2010)
2. '효창공원의 역사적 중층성과 상징성을 이용한 스토리텔링'(강혜경, 2019)
3. 서울시 간행물 '효창공원의 역사 및 도시공간변천사 조사'(서울시청, 2021)
4. 단행본 '효창숲에 가면 그 나무가 있다'(김지석 함희숙 김수정, 2016, 나남)
5. 효창독립100년 메모리얼프로젝트 사이트 https://www.hyochangpark.com/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이트 https://encykorea.aks.ac.kr/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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