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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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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서 ‘K배구 감독’ 자존심 지켜 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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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규, 몽골리그 우승 후 ‘금의환향’

韓 V리그 7팀 중 외인 사령탑만 5명

국내파 위상 떨어져 해외무대 도전장

리그 개막 보름 앞두고 제의받아 수락

“화려함 대신 기본기 강조해 팀 탈바꿈

시스템 열악… 휴대폰으로 찍어 피드백

이제 4∼5팀이 제 영상분석 따라하죠”

지난해 10월, 이선규(44) 감독은 에이전시를 통해 몽골 남자 프로배구 하쑤 메가스타스의 사령탑 자리를 제의받았다. 고민 끝에 수락한 이 감독은 부랴부랴 몽골로 떠났다. 리그 개막을 불과 보름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팀원들을 파악하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지만 이 감독은 하쑤를 챔피언으로 이끄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것도 정규리그 17승1패, 플레이오프 2전 전승, 챔피언결정전 3전 전승까지. 무려 22승1패, 압도적인 승률(95.6%)로 이뤄낸 쾌거였다. 몽골 프로리그를 제패하고 ‘금의환향’한 이 감독을 최근 수원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이 감독이 새로운 도전에 나선 이유 중 하나는 최근 V리그 남자부에서 국내 지도자들의 위상이 크게 떨어진 게 컸다. 현재 남자부 7개 구단 중 삼성화재(김상우), 한국전력(권영민)을 제외한 5개팀이 외국인 감독들에게 지휘봉을 맡기고 있다. “몽골리그가 생소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도전할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게다가 국내 지도자들이 외국 지도자들에 비해 실력이 그렇게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최근 위상이 많이 떨어졌어요. 외국리그에서 제 실력을 보여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세계일보

V리그를 대표하는 미들 블로커로 활약했던 이선규 감독이 몽골 남자 프로배구 하쑤 메가스타스를 정상으로 이끌고 ‘금의환향’했다. 사진은 하쑤의 챔프전 우승 당시 이 감독의 모습. 이선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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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범한 지 10여년 정도 된 몽골 프로리그는 현재 남자 7개팀, 여자 9개팀일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다만 아직 홈-원정 개념은 없고, 수도인 울란바토르의 2개 체육관에서 모든 일정을 소화한다. 엄밀히 따지면 세미 프로다. 그래도 외국인 선수를 4명이나 보유할 수 있는 등 해가 갈수록 발전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결정한 몽골행. 문화가 달라 처음엔 고생을 많이 했다. 이 감독을 가장 힘들게 한 건 선수들의 자세였다. 그는 “선수들이 시간 약속도 잘 지키지 않는 등 프로 마인드가 전혀 없었다”며 “시간 약속 등 생활적인 부분부터 바로 잡고, 훈련 스케줄도 좀 힘들게 잡았는데 다 따라와줬다”고 말했다.

이 감독의 하쑤는 최근 3년간 2위-2위-3위를 차지한 강호다. 하지만 마지막 우승을 한 게 5년 전이라 우승에 굶주린 팀이었다. 이 감독은 기본기부터 다시 다졌다. “단기간에 성적을 내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게 무엇일까 고민을 했죠. 몽골 리그 분위기부터 우리 팀 선수들을 보니까 화려한 플레이만 치중하더라고요. 수비나 연결 등 기본기나 궂은 일은 대충하려는 모습이어서 이 부분에 (기본기를 지키라는) 강조를 많이 했죠.”

이미 V리그에는 모든 팀이 갖추고 있는 영상분석 시스템도 몽골리그엔 전무했다. 이 감독은 바로 이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는 “한국은 동작 분석 시스템인 ‘다트피시’를 통해 선수들이 자신의 플레이 하나하나를 분석할 수 있는데, 몽골엔 그런 게 전혀 없었다”며 “비디오 카메라도 없어서 급하게 휴대폰으로 찍고, 선수들에게 일일이 보여주면서 피드백을 해줬다”고 했다. 이 감독은 “그게 큰 도움이 된 것 같다”며 “리그가 끝날 때쯤 되니 4~5개 팀이 저희를 따라하더라”고 덧붙였다.

이 감독의 지도 속에 하쑤는 무적의 팀으로 변모했다. 1라운드에 5승1패를 한 뒤 2, 3라운드는 6전 전승을 거두며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이 감독은 “플레이오프나 챔프전 때는 선수들이 제가 구현하고자 했던 배구를 잘 해줬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배구에 대해 묻자 이 감독은 “저만의 배구 색깔을 만들고 싶지 않다”고 예상 외의 답변을 했다. “제가 미들 블로커 출신이라고 해서 무조건 ‘높이의 팀’을 만들 수는 없어요. 제가 맡은 팀에 신장이 큰 선수가 없으면 할 수 없으니까요. 팀 구성원의 속성을 파악해 이에 맞는 배구를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감독은 배구인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했다. 한양대 3학년이던 2003년 현대캐피탈에 입단해 2019년까지 뛰며 V리그 통산 1056개 블로킹을 기록했다. 은퇴 당시 통산 블로킹 1위였을 만큼 현역 시절 최고의 미들 블로커로 군림했다. 그는 이후 3년간의 해설위원 생활을 거쳐 한국전력에서 두 시즌 코치를 맡았다. 몽골 리그 도전도 언젠가 다시 V리그로 돌아올 때를 위한 수련 과정이다.

“제가 선수 생활을 할 때 만났던 많은 감독님과 해설·코치 경험 하나하나가 도움이 되더라고요. 외국 리그에서 외국 선수들을 지도한 경험도 언젠가 V리그에서 감독이 됐을 때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원=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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