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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 주민 이규봉(59)씨가 해안가에 줄지어 선 한울 원전 단지를 가리키고 있다. 윤석열 정부 들어 건설을 재개한 신한울 3·4호기가 완공되면 울진 지역에만 총 10기의 원전이 가동된다. 옥기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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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과 부산 기장, 울산 울주는 전세계에서 원전 밀집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새로 짓는 신한울 3·4호기, 새울 3·4호기까지 추가되면 울진은 10기, 기장·울주는 9기로 세계 1~2위의 초대형 원전 단지 자리를 굳히게 된다. 다음으로 밀집도가 높은 지역은 한반도보다 영토가 45배나 넓은 캐나다의 브루스 단지(7기)다. 이달 중 국회 본회의에 상정될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특별법’(고준위법)이 통과돼 원전 부지 내 ‘방사성폐기물 처리시설’(방폐장)까지 들어서는 경우, 국내 원전 단지들은 핵폐기물까지 품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 된다.
18일 울진 주민 이규봉(59)씨는 1999년 4월 작성된 정부 공문을 보여주며 고준위법은 “이 지역에 원전 관련 시설을 더는 짓지 않겠다던 약속을 깬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해당 공문은 울진에 방폐장 건설을 검토한다는 소식에 주민 반발이 거세지자 당시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가 “현재 건설·운영 중인 원전 6기에 더해 4기 원전을 추가로 건설할 경우, 관내에 더는 방폐장 부지 등 원전 시설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울진군에 약속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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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4월 경북 울진에 방폐장 건설을 검토한다는 소식에 주민 반발이 거세지자 당시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가 “현재 건설·운영 중인 원전 6기에 더해 4기 추가 원전을 건설할 경우 관내에 더는 방폐장 부지 등 원전 시설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공문. 울진 주민 이규봉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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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원전 업계나 정부는 핵발전소 문제에 매번 거짓말만 한다”며 울분을 토했다. “정부는 울진에 핵폐기물 부담까지 지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원전은 (설계수명) 40년만 참으면 되는데, 방폐장은 (핵폐기물 반감기가) 수만년 동안 유지되잖아요. 우리 손주 세대엔 위험이 줄어들 거라 믿고 있었는데… 기대가 모두 무너졌습니다.”
울진 주민들이 가장 우려하는 점은 고준위법에 명시된 ‘사용후핵연료 부지 내 저장시설 건설’ 관련 조항이다. 고준위방폐장은 40년 넘게 후보지조차 정하지 못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원전 부지 내에 저장시설을 건설할 수 있다’는 내용의 법이 통과되면 발전소가 곧 핵폐기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씨는 “원전 가동으로 수십년간 고통받은 주민들에게 핵폐기물 처리까지 떠넘기는 건 너무 가혹하다”며 “원전 부흥책을 내건 윤석열 정부뿐 아니라 핵발전소 유지를 위해 고준위법에 찬성한 민주당 역시 모두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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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군·울산 울주군에 있는 고리원자력발전소 1~4호기 모습. 건설 중인 새울 원전 3·4호기가 들어서면 이 지역엔 총 9기의 원전이 운영된다.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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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원전에서 11㎞ 떨어진 부산 기장군 기장읍에 사는 김용호(50)씨는 통과가 임박한 고준위법을 “고양이(한국수력원자력)에게 생선(방폐물 관리)을 맡긴 악법 중의 악법”이라고 비판했다. 2028년 사용후핵연료 임시 저장시설이 가장 먼저 포화하는 고리원자력본부는 국내에서 가장 먼저 핵폐기물 저장시설이 필요한 지역으로 꼽힌다. 고준위법이 통과돼 원전 부지 내에 핵폐기물 저장시설을 짓게 되면 이 건설·관리 주체는 법에 따라 한수원이 된다. 이 경우 안정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게 주민들의 주장이다.
“정식 방폐장을 지으면 핵폐기물 관리 주체가 원자력환경공단이 되는데, 부지 내에 짓게 되면 한수원이 맡게 됩니다. 한수원은 폐기물의 안전한 관리보단 원전 운영이 더 중요한 조직이라 부실하게 관리될 수밖에 없어요. 안전관리 규제 수준을 정식 방폐장 수준으로 높여야 합니다.”
이와 함께 그는 저장시설을 짓는 과정에서 주민 의견이 배제될 여지가 크다고 지적했다. “고준위법상 부지 내 저장시설을 건설할 때 사전에 ‘설명회’를 하게 돼 있지만, 주민투표처럼 의무가 아니라 요식행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며 “또 그 대상 주민조차 방사선 비상구역인 ‘원전 주변 30㎞ 내’가 아닌, ‘5㎞ 내’로 완화돼 있다. 한수원 편한 대로 방폐장을 지으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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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전세계가 핵폐기물 처리에 뚜렷한 방법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원전을 계속 늘리는 건 ‘화장실 없는 고층건물을 계속 짓는 꼴’이라 비유한다. 한병섭 원자력안전연구소장은 “원전을 운영하는 국가들은 모두 영구 처분장을 짓지 못해 임시 저장시설에 사용후핵연료를 보관 중이다.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처분장을 지은 핀란드는 발전용량이 작은 4기의 원전만을 가동 중이라 대용량 원전 20여기가 가동 중인 한국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다”며 “고준위법으로 핵폐기물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원전을 가동할수록 미래 위험이 가중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옥기원 기자 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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