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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6 (일)

남한산성에 고립되면 절대 안 된다 [아침햇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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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6일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에 도착한 뒤 기자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웨스트팜비치/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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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 | 논설위원



지난 10여년 동안 읽은 책 가운데 가장 공포스러웠던 한 권을 꼽으라면,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가 2019년에 펴낸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까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청이 남긴 만주어 1차 사료 등을 꼼꼼히 검토한 뒤 저자가 내리는 결론은 병자호란은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려던 홍타이지(1592~1643)가 일방적으로 일으킨 전쟁으로, 명·청의 패권 교체 흐름을 읽지 못한 조선의 ‘외교 무능’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 것은 1636년(병자년·이하 날짜는 양력) 홍타이지가 5월15일 거행한 황제 즉위식 때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이날 그가 내세운 칭제(稱帝)의 명분은 △몽고 통일 △옥새 획득 △조선 정복 세 가지였다. 얄궂게도 이 무렵 청의 수도 심양엔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이 머무르고 있었다. 홍타이지는 ‘정복된’ 조선의 사신들에게 새로 황제에 오른 자신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세번 무릎 꿇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린다)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했다.



안타깝게도 이는 응할 수 없는 요구였다. 조선이 정묘호란(1627) 때 청과 약속한 것은 ‘형제 관계’였지, 삼궤구고두를 행해야 하는 ‘군신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복된 게 아니었으니 절을 할 순 없었다. 두 사신은 목숨을 걸고 홍타이지의 요구를 거부하게 된다.



자신이 내건 칭제의 명분이 무너지는 광경을 지켜본 홍타이지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8개월 뒤인 1637년 1월3일, 압록강을 건넌 청의 기병은 바람 같은 기세로 불과 엿새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조선은 이 속도전에 속수무책이었다. 인조(1595~1649)는 눈 깜짝할 사이에 남한산성에 갇히게 된다.



이 책을 읽고 오싹함을 느낀 것은 인조 정권이 망국의 위기에 빠진 게 어떤 심각한 ‘외교 실책’을 저지른 탓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의 불행이 내 잘못으로 인한 것이라면, 인간은 이를 받아들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병자호란은 그런 전쟁이 아니었다.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홍타이지가 벌인 ‘홍타이지의 전쟁’이었다. 다행히도 전쟁의 목적은 약탈이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인조를 무릎 꿇려 항복을 받은 뒤 신속히 군대를 뺐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뒤 한달 만에 쏟아내는 수많은 발표를 보며, 당시 조선인들이 느꼈을 공포와 무기력함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취임 전부터 덴마크령인 그린란드와 파나마 운하에 대한 영토 야욕을 드러내더니, 취임 날인 지난달 20일엔 캐나다·멕시코에 25%의 고율 관세(1일 정식 발표 뒤 3일 한달 유예)를 부과하겠다고 했다. 이달 들어선 1년5개월째에 이르는 전쟁으로 시름하는 가자지구 주민들을 삶의 터전에서 사실상 내몰겠다고 했고(4일), 한국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철강·알루미늄 25% 관세(10일)와 상호 관세(13일), 자동차 관세(14일) 계획을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선 미·러가 종전 대화에 나선다(12일)는 사실도 공개했다. 이 과정에서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우크라이나가 “비현실적 목표”를 좇고 있다고 몰아세웠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 입장에선 이 모든 게 유리한 협상을 위해 빼든 ‘카드’일지 모르지만, 당하는 국가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엄청난 공포를 느껴야 한다. 380여년 전 병자호란 때 그랬듯 이해 당사국인 우크라이나, 덴마크, 캐나다·멕시코, 혹은 한국이 미국한테 어떤 결정적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지난달 30일 미국 언론인 메긴 켈리와 한 인터뷰에서 “냉전이 끝난 뒤 우리가 세계의 유일한 강대국이 되면서 많은 일들에서 세계 정부가 되는 것 같은 종류의 책임을 떠안고 모든 문제를 풀려 했다”며 “그로 인해 국익에 끔찍한 영향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세계가 단일 패권(unipolar power)을 갖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라며 “우리는 결국 다극적인 세계로 돌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국은 지난 대선을 통해 세계 질서를 지키고 유지해온 ‘자비로운 패권국’의 지위를 내려놓고, 중국·러시아와 같은 이기적인 강대국이 되겠다는 선택을 내렸다. 그리고 이제 막강한 국력을 무기로 상대를 약탈하는 ‘경제 전쟁’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트럼프의 전쟁’에 서둘러 무릎을 꿇어야 할까, 강하게 항전해야 할까. 어찌 됐든, 편을 늘려야 한다. 남한산성에 고립되면 절대 안 된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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