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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1 (금)

'미키 17' 봉준호 철학·위트 집대성…용감하고 매혹적인 SF 우화 [봤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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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유니버스 새 걸작…로맨스·SF·풍자까지

로버트 패틴슨, 1인 2역 美친 열연…봉준호와 시너지

첫 악역 마크 러팔로 존재감…토니 콜렛과 환장케미

봉준호 전작의 잔상…맥빠지는 중반부가 숙제

[이데일리 스타in 김보영 기자] 봉준호의 위트·철학·뚝심을 가득 채운 매혹적이고 용감한 SF 영웅 우화. ‘봉준호 유니버스’의 계보를 잇는 새로운 걸작이 탄생했다. 6년의 기다림이 아깝지 않은 영화 ‘미키 17’(감독 봉준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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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은 위험한 일에 투입되는 소모품(익스펜더블)으로, 죽으면 다시 프린트되는 ‘미키’(로버트 패틴슨 분)가 17번째 죽음의 위기를 겪던 중, 그가 죽은 줄 알고 ‘미키 18’이 프린트되면서 벌어지는 예측불허의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다. 미국 작가 에드워드 애슈턴이 집필한 SF 소설 ‘미키 7’을 각색했다. 아카데미와 칸국제영화제 수상을 휩쓴 ‘기생충’ 이후 봉준호 감독이 6년 만에 내놓는 신작이다. 배우 로버트 패틴슨, 나오미 애키, 스티븐 연, 마크 러팔로, 토니 콜렛 등 할리우드 스타, 제작진과 협업했다.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이 처음 도전한 우주 SF 장르물이지만,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해온 특유의 철학과 인간적 정서가 곳곳에 녹아있다. 집요한 디테일로 구현한 서스펜스와 시청각적 쾌감, 날카로운 사회 풍자, 해학과 연민에 녹아든 인류애의 정서로 가장 현실적이고 짠한, 그래서 인간적인 SF 우화를 완성했다.

원작 소설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미키’가 죽은 횟수다. 원작 소설에선 미키가 7번 죽어 ‘미키 7’이지만, 봉준호 감독은 죽는 게 일상이고 직업인 주인공 미키의 상황을 더욱 극명히 드러내고자 ‘미키 17’로 제목을 변경했다. ‘미키 17’의 초반부는 방사능 피폭에, 바이러스와 각종 실험에 노출돼 피를 토하는 등 여러 위험한 미션에 투입돼 셀 수 없이 죽어 나가는 ‘미키’의 고군분투를 리드미컬하게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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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펜더블’은 미지의 행성에 인간이 삶을 꾸릴 새로운 개척지를 만들겠단 목적으로 생긴 우주 제도다. 인간의 육체는 물론 기억 데이터까지 전부 서류 뽑듯 프린트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됐고, 덕분에 사람이 아무리 죽어도 육체와 기억을 모두 보존한 채 20시간 만에 다시 태어나는 게 가능해진 것. 지구에선 각종 범죄 악용 우려와 생명 윤리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이 기술의 사용이 금지돼있다. 다만 각종 위험이 산재한 우주에서 인간의 희생을 최대한 줄이고자 ‘실험체’의 명목으로 각종 위험한 미션 및 실험에 투입하는 ‘익스펜더블’에 이 프린트 기술의 사용을 윤허했다. 끊임없이 죽는 게 일인 ‘극한직업’인 만큼 익스펜더블에 지원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미키는 익스펜더블이 되길 자원한다. 미키가 지구 밖을 떠나게 된 과정도 원작에 비해 훨씬 짠하고 현실적으로 각색됐다. 미키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가족, 형제 없이 보육원에서 자란 흙수저 청년이다. 제대로 된 자격, 기술은 없고 친구는 보육원 동기인 티모(스티븐 연 분) 뿐이다. 티모의 꼬드김에 사채까지 써서 ‘마카롱 샵’을 차리지만 쫄딱 망해 지구 끝까지 추격을 받는 빚쟁이가 된다. 벼랑 끝 희망을 찾고자 택한 우주에서마저 최하층 노동자의 신세를 면치 못한 상황, 그럼에도 자기연민 없이 자기의 일상을 묵묵히 견뎌내는 미키의 사정은 이 작품의 장르가 SF임에도 우리의 팍팍한 현실과 멀지 않게 느껴진다.

익스펜더블은 평범한 인간들이 보장받는 제도의 영역에서도 소외된 존재다. 보험 가입이 불가하고, ‘프린트’ 된 복제물이란 이유로 제대로 된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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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간적 설정보다 더 기괴한 건 미키의 죽음들을 바라보는 우주선 사람들의 태도다. 수없이 다시 태어나는 불사에 가까운 몸이라 해도, 미키에게 모든 죽음의 순간은 똑같이 무섭고 낯설다. 반면 우주선 사람들은 미키의 고군분투와 희생을 직업인의 애환 정도로만 바라본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피를 토하며 생명이 꺼져가는 참혹한 순간을 일말의 죄책감 없이 무미건조하게 지켜본다.

로버트 패틴슨의 열연과 변신이 봉준호 유니버스와 만나 최대치의 시너지를 발휘했다. 로버트 패틴슨은 ‘미키 17’의 짠하고 찌질한 매력부터, ‘미키 18’의 무모한 광기와 카리스마까지 극과 극의 얼굴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같은 몸에서 나왔지만, 성격은 전혀 달라 하나의 존재라고 보기 어려운 ‘멀티플’(한 몸에서 프린트 된 복제 인간이 둘 이상이 되어버린 상황)을 설득력있게 그려냈다. ‘미키 17’과 ‘미키 18’이 힘을 합쳐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독재자 케네스 마샬&일파 마샬(마크 러팔로, 토니 콜렛 분) 부부의 횡포, 우주 전쟁과 인간 멸종의 위기에서 자신과 세상을 구하는 성장형 영웅의 서사가 뭉클한 감동과 여운을 안긴다. 나아가 비인간적인 존재로 손가락질받던 ‘미키’들이 자신이 겪어본 죽음의 공포에 비춰 다른 생명의 존엄성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성을 발휘하는 지점은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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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미키’를 유일하게 인간으로 바라봐주는 존재도 있다. 그가 우주선에서 만난 여자친구 ‘나샤’(나오미 애키 분)다. ‘미키’의 모험 서사와 함께 ‘미키’와 ‘나샤’의 사랑을 작품 전반의 테마로 내세운 점도 인상적이다. 두 명이 되어버린 ‘미키’조차 오롯이 인정하고 소중히 여기는 ‘나샤’의 숭고한 사랑과 용기는 ‘미키’를 성장케 하는 촉발제이자, 이야기를 클라이맥스로 이끄는 커다란 한 축으로 활약한다. ‘미키’, 그리고 세상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샤의 사랑은 새롭고 강인한 모성애를 재현한다.

개성 강한 빌런들의 존재감이 몰입도를 높였다. 독재자인 우주사령관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 분)과 일파 마샬(토니 콜렛 분) 부부 캐릭터가 그 주인공이다. 관종 선동가의 기질과 아내 일파를 엄마처럼 따르며 의지하는 유약함을 겸비한 ‘케네스 마샬’로 처음 악역에 도전한 마크 러팔로의 변신은 로버트 패틴슨의 캐스팅과 함께 봉준호가 이 작품에서 일군 뜻깊은 성과다. 일파 마샬로 분해 마크 러팔로와 환장의 닭살 부부 케미를 빛낸 토니 콜렛의 열연도 톡톡한 관전 포인트다. 그러나 계급주의, 근본주의를 바탕으로 두 빌런이 드러낸 섬뜩한 리더십은 ‘설국열차’ 윌포드와 메이슨 총리, ‘옥자’ 루시 미란도 등 봉 감독 전작 속 빌런들의 잔상을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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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플하임 행성의 원주민인 ‘크리퍼’들도 후반부로 갈수록 뜻밖의 활약을 펼친다. 기괴함과 귀여움(?)을 넘나드는 ‘크리퍼’들의 비주얼도 눈길을 잡아 끈다.

여러 관계성, 서사가 얽혀 다소 맥이 빠지는 중반부를 견뎌내는 게 이 영화의 숙제다. 대신 후반부의 스케일과 액션, 감동이 그만큼 끝까지 참고 감상할 보람을 선사한다. 등장인물들이 많지만 미키와 나샤, 마샬 부부, 크리퍼들 외 나머지 캐릭터들의 비중이 다소 생략되고 소모된 경향도 없지 않다. 스티븐 연이 연기한 ‘티모’ 캐릭터의 활약상이 초중반부 그가 드러냈던 존재감에 비해 다소 싱거운 편이다. 15세 이용가지만 수위가 생각보다 높다는 점, ‘크리퍼’들의 이질적 비주얼도 호불호로 작용할 수 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건조하고 차갑지만, 메시지와 여운은 뜨거운 작품이다. SF의 외피에 사랑, 풍자, 액션, 성장물 여러 장르적 매력이 조화롭게 녹아든다. ‘기생충’, ‘설국열차’, ‘옥자’ 등 봉준호 감독 주요 전작들의 정취와 잔상, 철학이 집대성된 다채로운 매력의 작품이다.

러닝타임 137분. 15세 이상 관람가. 2월 28일 국내 최초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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