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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8 (화)

불타는 망루 “여기 사람이 있다”…용산 참사의 진실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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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당 건물 망루 농성하던 철거민
경찰특공대 진압 맞서다 화재 발생
철거민 5명·경찰 1명 숨진 ‘용산 참사’

순천향병원 주검 밤중에야 신원확인
철거민 유족들 울부짖던 처참한 밤
“이명박 정권 무리한 진압에 참사”

검찰·여당, 철거민·용역만 책임 묻고
경찰엔 면죄부…철거민 ‘테러범’ 몰아
용산범대위 구성…참사책임 규명 나서
참사 6개월째 장례도 못 치르고 투쟁





한겨레

경찰특공대가 2009년 1월20일 오전 철거민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 회원들이 농성하던 서울 용산구 한강로 남일당 건물 옥상 위에서 크레인에 매달린 컨테이너를 탄 채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당시 불이 난 망루가 쓰러지자 철거민들이 열기를 피해 옥상 난간을 붙잡은 채 서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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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20일, 대한이었다. 며칠 전부터 한파가 몰아치고 있었다. 하루 전날인 1월19일, 서울 용산역 건너편 한강대로변 남일당 건물 옥상에 전국철거민연합(이하 전철연) 철거민들이 망루를 짓고 농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이 망루를 세우고 농성에 들어간 지 하루 만에 경찰이 강제진압에 나섰다. 경찰특공대는 새벽 3시 반쯤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전 7시 전에 경찰특공대가 망루에 진입했다. 옆 건물에서 물대포가 파란색 양철로 만든 4층짜리 망루를 향해서 물줄기를 쏘아대고 있었다. 그리고 크레인에 매달아 올린 컨테이너 박스로 망루를 치고 있었다. 컨테이너 박스가 망루를 칠 때마다 망루가 쓰러질 듯 휘청했고, 그런 위태한 상황에서도 컨테이너 박스 안에 탑승한 특공대원들은 망루 안으로 최루액 호스를 집어넣고, 쇠갈퀴 같은 것으로도 망루를 공격했다. 너무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오전 7시6분께. 1차 화재가 났다. 망루 안으로 들어와서 마지막 층으로 올라오던 특공대원들이 갑자기 망루 밖으로 빠져나간 이유였다. 다행히 화재는 쉽게 꺼졌다. 이미 망루 안은 유증기(휘발유나 신나 등이 엎어지면서 수증기 상태가 되어 있었고, 언제고 불꽃 하나만으로도 폭발할 가능성이 있는 상태였다)가 가득 들어찬 상태였다. 그들이 잠시 쉬고 있을 때 무전기에서는 “진압”을 독촉하고 있었다.





철거민 농성 강제진압…대규모 참사로



오전 7시20분께, 망루 틈새로 한줄기 불빛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꽂히더니, 갑자기 불길이 확 올라왔고, 불길은 망루 전체를 덮쳤다. 망루 안에서 농성자들이 신나 등이 든 것으로 보이는 통을 밖으로 내던졌고, 사람들이 망루 창으로 뛰어내렸다. 불길이 거세게 타오를 때 현장을 생중계하던 인터넷 방송 리포터가 다급하게 외쳤다.



“망루 안에 사람이 있어요. 저기 사람이 있어요.”



불길에 휩싸인 망루는 쓰러지고, 망루에서 탈출한 두명이 건물 위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망루에서 빠져나온 철거민 지석준씨는 불길을 피해 건물 4층 난간에 매달려 있다가 팔에 힘이 빠져 그대로 추락했다. 바닥은 매트리스 하나도 깔려 있지 않은 맨바닥이었고, 크게 다쳤다.



나는 다급한 일들을 처리한 다음, 저녁 참사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의 모습은 처참했다. 불탄 망루가 쓰러져 건물 위에 걸쳐져 있었다. 저 망루 안에서 사람이 6명(철거민 5명·경찰 1명)이나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한 피켓은 이렇게 적고 있었다. “만약 진압이 아니라 구조였다면 살릴 수 있었다.” 처참한 폐허의 현장에 저녁 시간에 천명가량의 사람들이 모여서 분노의 말들을 쏟아냈다. 시민들은 명동까지 행진해가면서 이명박 정권의 ‘살인 진압’을 규탄했다.



그때 한 언론사 기자에게서 제보가 왔다. 한남동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주검들이 있는데, 곧 다른 병원 장례식장으로 분산시키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원에서도 연락이 왔다. 경찰이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을 예약해놨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제보 내용은 사실이었다. 부검을 마친 철거민들 5명의 주검이 그곳 영안실에 있었다. 시민들이 달려와서 영안실을 막았다. 밤중까지도 주검의 신원 확인이 안 되면서 정확하게 사망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검찰의 허락이 떨어진 게 자정 무렵이었다. 실종자 가족들과 의사 우석균 등 몇사람이 영안실에 들어가 주검을 확인했다.



영안실에 들어갔던 가족들이 울부짖었다. 실종자 가족에서 유가족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철거민들의 아내와 아들, 딸들이 울부짖었다. 사망 철거민들은 이상림, 양회성, 이성수, 한대성, 윤용헌씨였다. 70살 이상림씨와 양회성씨는 용산의 세입자였다. 동네에서는 사장님으로 불리던 분들이었고, 이들은 은행 대출을 받아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철거민이 되어 버렸다. 비슷한 처지의 전철연 회원들이었던 이성수, 한대성, 윤용헌씨는 용산4구역 투쟁에 연대하러 온 다른 지역 철거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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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민 농성 강제진압 과정에서 ‘용산 참사’가 발생한 서울 용산 국제빌딩 4구역 내 남일당 건물 앞 도로에서 2009년 1월20일 저녁 추모대회가 열리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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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참사’ 무리한 진압 진실 찾기



다음날 오전에 용산역 인근 철도회관에서 시민단체들이 모여서 대책회의를 했다. 회의 사회를 보게 된 나는 마이크를 잡는 순간 구속이 될 수도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날 ‘이명박정권용산철거민살인진압범국민대책위원회’(용산범대위)를 구성했고, 나는 대책위의 공동집행위원장을 진보네트워크 대표였던 이종회 선배와 함께 맡았다. 상황실장은 노동전선의 김태연이 맡았다.



검찰은 사건 당일부터 정병두 서울지검 차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대규모 수사본부를 설치했다. 검사만 20명이 넘었고, 수사관들까지 100명이 넘는 규모였다. 수사본부는 유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강제부검을 진행했다. 그들은 화재의 원인을 철거민들의 화염병으로 규정했고, 철거민들과 용역업체 직원 몇명만 구속했다.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경찰은 모두 무죄였다. 당시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경찰청장 내정자)이 특공대를 투입하는 무리한 진압을 지시했음에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다급하게 진압을 지시한 것으로 보이는 청와대에 대해서는 수사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집권여당인 한나라당 소속 신지호 의원 등은 철거민들을 도심 테러범으로 몰아갔다.



아무리 전철연이 폭력투쟁을 했더라도, 안전 대책을 마련한 뒤에 경찰이 진압에 나섰더라면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용산범대위는 “여기 사람이 있다”란 구호를 내걸고 싸웠다. 용산 참사가 광우병 촛불시위처럼 대규모 항의시위로 번질 것을 우려한 이명박 정권은 추모대회마저 가로막았다. 용산범대위는 2009년 2월 말까지 주말마다 도심에서 경찰과 싸우면서 추모대회를 강행했다. 그런 일로 나와 이종회 공동집행위원장에게는 수배령이 떨어졌다. 전철연 남경남 의장까지 우리 셋은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갇혔다. 경찰들은 1계급 특진이 붙은 우리 셋의 얼굴이 담긴 전단을 들고 24시간 장례식장을 감시했다.



3월 초 나는 문정현 신부님께 전화를 걸었다. “신부님, 도와주세요.” 전화를 받고 올라오신 신부님은 용산 남일당을 거쳐서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오셨다. 오셔서는 유가족들을 붙잡고 서럽게 우셨다. 문정현 신부님이 오시니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신부들과 수녀들이 같이 왔다. 그리고 사건 현장인 남일당에서 매일 저녁 미사를 올리고 문화행사가 진행되었다. 남일당이 투쟁의 거점이 되어갔다.



남일당이 포함된 용산4구역에서는 3월 들어서부터 철거를 진행하려는 철거업체와 그를 비호하는 경찰들, 이를 막으려는 용산범대위 간 싸움이 매일 벌어졌다. 그들은 천주교 신부라고 봐주지 않았다. 매일 폭력이 행사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장례도 치르지 못했고 시간은 초조하게 흘러갔다. 우리는 고립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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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정권용산철거민살인진압범국민대책위원회’ 회원들과 유족들이 2009년 7월20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에서 희생자 5명의 주검이 든 관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으로 옮기기 위해 영안실로 가려다 이를 막아선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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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범대위 이끌다 수배령에 고립



참사 6개월이 지난 2009년 7월20일, 용산범대위는 철거민들의 관을 만들어 서울시청으로 나가려고 했다. 시민들에게 용산 참사의 진실을 알리는 시위를 기획한 것이었다. 하지만, 경찰의 철통 같은 봉쇄로 병원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장례식장에는 하루 종일 유가족들의 통곡과 시위대의 분노에 찬 구호가 울렸다.



이튿날 새벽 4시께, 세명의 수배자는 탈출을 시도했다. 장례식장 옆 미군들의 관사가 있는 공터를 통해 탈출할 계획이었다. 완강기 밧줄을 몸에 걸친 내가 먼저 장례식장 4층 우리가 머물던 방의 창 옆으로 난 도시가스관을 타고 내려갔다. 장례식장과 옆 공터 담 사이에 설치된 비 가림막을 딛고, 공터 쪽 담 위의 철조망을 잘라낸 다음에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비 가림막을 디뎠을 때, 갑자기 뿌지직하면서 가림막이 내려앉았다. 그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그러자 경찰 두명이 뛰어왔다. 장례식장 담 옆, 어둠 속에 붙어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들도 당황했을까?



“아저씨, 저 위에서 내려오는 거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려는 거요?” 그들이 물어왔다. 반대편에서는 전경들이 뛰어왔다. 여기서 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공터 쪽 담을 박차고 올라왔다. 경찰이 나를 잡으려고 했으나 나는 겨우 벗어났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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