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발동·탄핵·예산 삭감 등
독선이 초래한 사회적 혼란
열린사고로 미래해법 마련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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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한파가 봄을 가로막고 있다. 북극에서 내려오는 찬바람이 아니라 탄핵정국의 매서운 냉기로 칼날에 베인 듯 온몸이 에이고 우리 사회는 서리가 내려앉았다. 나라는 극우와 극좌의 대립으로 두동강 나고 암흑 속에서도 나갈 길을 보여줄 나침판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계엄발동은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으로 국정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전엔 야당의 독주를 불러온 총선이 있고, 그러한 총선 결과를 가져온 배경으로 의대 증원 파동이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독선이 보인다. 일방적인 의대 정원 밀어붙이기도 독선이고 거듭된 탄핵과 예산 삭감도 독선이며, 이에 대한 대응책이었다는 계엄발동도 독선의 결과이다. 확고한 믿음과 가치관을 의미하는 신념은 중요하다. 그러나 자신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다른 의견은 배척하는 독선은 ‘독(毒)’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주변의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간파할 수 있고 또 무엇이 좋고 나쁜지, 옳은지 그른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이가 있다면 독선이고 참으로 위험한 자라고 하겠다. 유럽의 정복자 나폴레옹은 자기 확신에 찬 나머지 러시아 침공을 감행하였고 60만 대군의 대부분이 전멸하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결과는 나폴레옹 제국의 몰락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신속한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무조건 일사천리로 추진하라는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은 약 3000만명의 아사와 중국 경제의 수십 년 후퇴라는 비참한 결과를 낳았다. 오만과 독선은 현실과 유리되어 몰락을 불러올 따름이다. “지혜로운 자는 항상 의심하고, 어리석은 자는 항상 확신한다.” 새겨들어야 할 명언이다.
독선은 단기적으로 강한 리더십처럼 보일 수 있으나 조직이나 사회는 폐쇄적으로 변한다. 나만 그리고 우리 집단만 옳다고 믿는다면 타협의 정치는 사라지고 갈등과 분열이 커지면서 흑과 백만 남을 뿐이다. 독선적인 지도자나 지도부가 객관적인 데이터를 무시하고 파생될 위험이나 부작용에 대한 충분한 의견교환 없이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면 십중팔구 정책 실패나 국가적 위기가 초래된다. 바로 작금의 사태가 그러하지 않은가?
신념과 독선의 차이는 사고의 열림과 닫힘이다. 비판과 타협 그리고 변화에 대한 열린 자세가 없다면 그것이 독선이라 하겠다.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 중에도 정치적 반대자들도 내각에 포함(Team of Rivals)한 열린 신념의 지도자로 표본이 되었다. 그는 "나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 내 생각이 틀렸다면 기꺼이 바꿀 것이다.“라고 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자세야말로 우리 사회가 긴히 구해야 할 덕목이지 않겠는가.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는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I know that I know nothing)라 했다.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델포이 신탁을 받은 소크라테스도 자신의 무지를 인정했는데 하물며 어찌 보통의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자신이 아는 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무모함을 드러낼 수가 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식을 주장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기존의 믿음이 허구가 아닐지를 의심해 보는 지혜를 수천 년 전 현자에게서 배워야겠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경청하면서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양 진영이 각자 나만이 옳다고 믿고 단단한 갑옷을 입고 우긴다면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다. “진리는 누구의 독점물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서로의 의견을 존중함으로써 진리에 가까워 질 수 있다”-알버트 아인슈타인
박은하 전 주영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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