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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금)

전쟁은 우크라가 하는데, 종전 협상은 미국이 도맡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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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 대표단 사우디 회동에 우크라는 제외

젤렌스키 “어떤 결정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

체코 빼고 체코 운명 정한 뮌헨회의 보는 듯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릴 미국과 러시아 간의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에 정작 당사자인 우크라이나는 초청을 받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1938년 유럽 강대국들이 체코를 배제한 채 체코 운명을 결정한 뮌헨 회의가 21세기에 고스란히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크다.

세계일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간) 플로리다주 데이토나 비치의 데이토나 인터내셔널 스피드웨이에서 열리는 자동차 경주 대회 ‘데이토나 500’ 관람에 앞서 국민의례 도중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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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현지시간) 영국 BBC 방송이 우크라이나 정부 고위 관리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17일 사우디에서 열릴 미국·러시아 회담에 우크라이나 정부 대표단은 참석하지 않는다. 미국으로부터 초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 측에선 마코 루비오 국무부 장관, 마이크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스티브 위트코프 백악관 중동 담당 특사 3명이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

이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위트코프 특사가 이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3시간가량 긴 대화를 나눴다고 밝혔다. 위트코프 특사는 지난 2021년 ‘마약을 유통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러시아 당국에 붙잡혀 억류돼 온 미국인 마크 포겔의 석방을 위해 최근 러시아를 방문했다.

앞서 위트코프 특사는 미국 행정부 관리들이 우크라이나 측과 대화 중이라며 “이 또한 종전 협상의 일부”라고 말했다. 겉으로 보기엔 미국·러시아 양자 회담 같지만 실은 미국·우크라이나·러시아 3자 협상에 해당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어떤 형태로든 종전 협상에 참여할 예정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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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방문한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부 장관과의 공동 기자회견 도중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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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크라이나는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미국 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의 참여 없는 평화 협정의 수락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관한 미국과 러시아 간의 어떤 결정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간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연합(EU)도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미국은 러시아와 종전 협상을 개시하면서 이를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주요 동맹국들에 알리지도 않았다. 현재로선 EU는 종전 협상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미국의 확고한 견해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당황한 유럽 지도자들은 17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주최로 파리에 모여 긴급 대책회의를 연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물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마르크 뤼터 사무총장도 참석할 전망이다.

유럽에선 미국 행정부의 독단적 행동을 두고 87년 전의 뮌헨 회의가 떠오른다는 반응이 많다. 1938년 아돌프 히틀러 총통이 이끄는 나치 독일은 이웃나라 체코에 주데텐란트 땅을 내놓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 주데텐란트에 많이 거주하는 독일계 주민들이 부당한 차별을 받는다는 이유를 들었다. 체코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예비군에 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앞선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당시 독일과의 싸움에서 큰 피해를 본 영국·프랑스는 독일과 다시 전쟁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특히 영국은 네빌 체임벌린 총리가 나서 독일을 상대로 적극적인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을 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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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9월 독일 뮌헨에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왼쪽부터),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 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통,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총리 4개국 정상이 만나 회의를 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들은 체코가 독일에 주데텐란트 땅을 양도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정작 체코 대표단은 회의에 참석해 발언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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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해 9월 히틀러 총통,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총리 4명의 정상이 독일 뮌헨에 모여 회의를 열고 뮌헨 협정을 체결했다. 한마디로 ‘세계 평화를 위해 체코가 독일에 주데텐란트를 양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강대국들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의 영토 주권을 희생시킨 역사상 최악의 협정으로 꼽힌다. 이렇게 해서 주데텐란트를 강탈한 독일은 이듬해인 1939년에는 체코 영토 전체를 병합했다. 그제서야 영국·프랑스는 대(對)독일 강경정책으로 선회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독일은 1939년 9월 이번에는 폴란드를 침략했고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의 격랑에 휘말리게 된다. 이후 뮌헨 회의는 평화를 우선시하는 유화정책으로는 전쟁 발발을 막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 실패 사례로 거론된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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