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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
뉴욕 자연사박물관 2층 원형 홀에 설치된 포츠머스 조약 관련 벽화. |
오래전 미국 뉴욕시 자연사박물관에 들어서면서 느꼈던 씁쓸함이 다시 떠오른다. 매표소가 있는 원형 홀 전면에 포츠머스 조약을 다룬 대형 벽화가 입장객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일전쟁 강화를 주선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26대 미 대통령의 업적(?)을 그린 것이다. 이 조약은 그를 미국인 최초 노벨상 수상자로 만들었고, 조선이 일본에 병탄되는 초석이 됐다. 벽화에는 욱일기, 일왕, 일본군이 다른 벽화에는 루스벨트가 러일 관료에게 지시하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포츠머스 조약으로부터 120년이 흐른 후 비슷한 상황이 재등장했다. 조약 관련국 중 일본이 우크라이나로 바뀐 정도다. 어쩌면 우크라이나는 120년 전 일본이 아니라 조약의 대가였던 조선과 더 가까운 처지인지도 모르겠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2일(이하 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 후 “양측이 협상을 즉각 개시하는 데 합의했다”고 발표했는데, “협상에서 우크라이나는 동등한 일원인가?”라는 질문에 “평화를 이뤄야 한다”고 직답을 피했다.
□이 장면이 “우크라이나는 협상 테이블에 포함되지 않을 것 같다”는 뉴스와 함께 세계로 퍼지며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여러 나라들이 큰 충격에 빠졌다. 다행히 14일 독일 뮌헨안보회의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JD 밴스 미 부통령이 종전 방안을 논의하며, 우크라이나 배제 우려가 가라앉았다. 이 회의에 러시아는 초대받지 못했다. 하지만 수일 내 사우디에서 미·러·우크라 3자 회동이 열릴 예정이어서, 종전협상은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이번 종전협상에서 우크라이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것이란 우려는 여전하다. 전쟁 이전 국경 복귀나 항구적 평화 보장 방안 같은 우크라이나의 요구 수용 대가로 트럼프 정부는 우크라이나 매장 희토류의 50% 지분을 요구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우크라이나는 일단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미군 주둔이 보장되면 양보할 가능성도 작지 않다. 러일전쟁에 개입해 약소국 조선을 일본에 넘기는 대신 필리핀을 확보했던 120년 전 미국 제국주의 부활을 보는 듯하다.
정영오 논설위원 young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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