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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6 (수)

먼 우주 기억 품은 ‘유령입자’… 역대급 고에너지 중성미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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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공동연구팀, ‘네이처’ 공개

이전 검출 중성미자 에너지의 20배… 먼 우주서 지구까지 직선으로 도달

블랙홀-거대 우주현상 역추론 가능… 에너지 수준 따른 입자 이론 검증도

동아일보

지중해 해저에 설치된 ‘큐빅킬로비터 중성미자검출기(KM3NeT)’를 묘사한 그림. 광학 센서를 모은 구(球) 형태의 모듈이 긴 줄에 일정 간격으로 매달려 있다. 중성미자가 매우 낮은 확률로 물 분자와 충돌해 이차입자를 만들면 이차입자에서 발생하는 빛을 센서가 감지해 중성미자를 간접적으로 확인한다. KM3NeT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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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물질과 상호작용이 거의 없어 ‘유령 입자’라는 별명을 가진 중성미자(Neutrino)는 아직 정체가 완벽히 규명되지 않은 우주의 기본입자다. 올해 관측 사상 가장 에너지가 높은 중성미자가 보고되면서 천체물리학자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유럽 주도의 국제 공동연구팀인 ‘큐빅킬로비터 중성미자검출기(KM3NeT)’ 연구팀은 지금까지 발견된 어떤 중성미자보다 에너지가 높은 중성미자를 발견하고 연구 결과를 12일(현지 시간)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공개했다. 이번 연구는 2023년 2월 13일 검출된 중성미자에 대한 분석 결과다. 계산된 에너지는 220페타전자볼트(PeV·에너지의 단위로 1PeV는 1000조 eV)로 직전 최고 기록인 10PeV의 20배 이상에 달한다.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입자가속기인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는 양성자를 충돌시켜 최고 13.6테라전자볼트(TeV·1조 eV)의 에너지를 낸다. 중성미자 연구자인 하창현 중앙대 물리학과 교수는 “LHC 실험이 인류가 입자를 충돌시켜 만들 수 있는 가장 높은 에너지라고 한다면 이번에 검출된 중성미자의 에너지는 그보다 1만 배 이상 강하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지중해 해저 3450m에 놓인 ‘중성미자 그물’

중성미자는 거의 빛의 속도에 가깝게 이동하며 지금도 우리 몸을 뚫고 지나가고 있다. 질량이 거의 없고 전하도 띠지 않아 다른 물질과의 상호 작용이 거의 없다. 성질을 밝혀내기 이전에 존재를 확인하는 것조차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과학자들은 중성미자를 간접적인 방법으로 연구한다. 중성미자가 매우 낮은 확률로 물 입자 등과 부딪쳐 상호 작용할 때 발생하는 이차입자(secondary particle)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충돌 이후 이차입자의 속도가 충분히 빨라서 물을 통과하는 빛의 속도보다 빠르면 빛을 내뿜는 체렌코프 현상이 일어난다. 이를 광학 센서로 감지하면 중성미자의 에너지와 날아온 방향을 역추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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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ARCA를 구성하는 중성미자 검출기를 지중해 해저로 내리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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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성미자를 검출할 확률을 높이고 이차입자의 움직임을 충분히 확인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 때문에 중성미자 검출기는 보통 바다나 호수 아래, 심지어 남극의 얼음 아래에 넓은 범위로 설치된다. KM3NeT 프로젝트는 각각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해안과 프랑스 인근 지중해 아래에 있는 검출기 ‘ARCA’와 ‘ORCA’ 2개로 구성됐다. ARCA는 해저 3450m, ORCA는 해저 2450m 수심에 설치됐다. 이번에 고에너지 중성미자가 발견된 검출기는 ARCA다.

ORCA는 검출기가 상대적으로 촘촘하게 배치돼 좁은 범위를 정밀하게 감지하고 ARCA는 검출기가 듬성듬성 있는 대신 넓은 범위를 감지한다. 하 교수는 “ORCA가 저에너지 중성미자를 검출하기 용이한 멸치잡이 그물이라면 ARCA는 그물코가 훨씬 큰 고래잡이 그물로 고에너지 중성미자를 검출하기 적합하다”며 “이번에 가장 큰 고래가 잡혔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 고에너지 중성미자, 먼 우주 현상 실마리 제공

중성미자는 아주 멀리 떨어진 우주 현상에 대한 정보를 그대로 담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고에너지 중성미자가 발생해 지구에 도달한 과정을 추론하면 아주 먼 우주공간에서 벌어진 일을 알아낼 수 있다.

학계에서 유력한 고에너지 중성미자 생성 이론은 블랙홀 등 거대 우주 현상에서 매우 빠르게 가속된 양성자가 광자(빛의 입자)와 충돌하면서 고에너지 중성미자가 생성된다는 이론이다.

블랙홀이 은하를 집어삼킬 때 내뿜는 방사선과 물질인 강력한 ‘제트’를 분출하면 운동에너지가 매우 큰 양성자가 발생한다. 양성자는 전하를 띠고 있어 날아오는 도중 방향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지구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반면 양성자로부터 생겨난 중성미자는 전하를 띠지 않고 지구까지 거의 직선으로 날아온다. 지구에 도달한 고에너지 중성미자를 통해 양성자 가속이 발생한 우주 현상을 역으로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하 교수는 “이번 연구 결과로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해석에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먼저 이번에 검출된 고에너지 중성미자의 에너지인 220PeV는 중간값이다. 오차 범위는 110∼790PeV로 상당히 큰 편이다. 또 연구팀은 이번에 검출된 중성미자가 날아온 방향에 있는 우주 현상 후보를 12개 선정해 조사했지만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하 교수는 “KM3NeT 운영 기간이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검출기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지 않다는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이며 “하지만 검출기가 확대되고 수십 년 동안 데이터가 쌓인다면 중성미자 데이터가 우주의 한쪽 방향을 가리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고 말했다.

고에너지 중성미자 발견은 중성미자 자체의 특성을 확인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중성미자가 에너지 수준과 관계없이 이론적 틀에 잘 들어맞는지 실험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중성미자는 총 3종류로 아직 질량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1988년, 1995년, 2002년, 2015년까지 총 4번의 노벨 물리학상이 중성미자 연구자에게 돌아갔다. 하 교수는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중성미자는 밝혀낼 것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노벨상이 더 나올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본다”며 “이번 발견으로 전 세계 중성미자 검출기 건설 계획이 추진력을 얻길 바란다”고 전했다.

중성미자(Neutrino)
우주의 기본입자로 아직 질량 등 밝혀내지 못한 부분이 많아 입자·천체물리학 분야의 주요 연구 대상. 다른 물질과 상호 작용이 거의 없어 ‘유령 입자’라는 별명이 있으며 노벨 물리학상을 4번이나 안겼다.


이병구 동아사이언스 기자 2bottle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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