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2 (토)

베네치아 전시한 작품을 고향서 태웠다, 그래야 새로 시작하니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북 청도 3000평 섬, 작품으로 덮어 태운 ‘숯의 화가’ 이배

조선일보

경북 청도군 청도천 하중도(河中島)의 3000평 대지 위를 이배 작가의 거대한 작품이 뒤덮었다. 길이 200m, 폭 35m에 달하는 하얀 천 위에 작가의 작품 ‘붓질’ 이미지를 인쇄해 섬을 덮은 모습을 하늘에서 담았다. /조현화랑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하천변에 불길이 치솟았다. 타다 남은 숯으로 거대한 획을 그은 작품이 다시 불길에 휩싸여 재로 돌아갔다.

‘숯의 화가’ 이배(69)의 개인전 ‘달집태우기’ 피날레가 작가의 고향인 청도에서 열렸다. 정월대보름인 12일 오후 5시 경북 청도군 청도천. 하천 가운데 퇴적물이 쌓여 섬을 이룬 하중도(河中島) 앞에 100여 명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3000평 규모의 대지가 작가의 작품이 인쇄된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 작가가 점화 버튼을 누르자, 화약 터지는 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새해 각지에서 보내온 소원 쪽지도 작품과 함께 재가 되어 흩날렸다.

조선일보

점화 버튼을 누르자 작품이 불에 타고 있다. 하얀 천 작품 아래에 넣은 새해 소원 쪽지도 함께 탔다. /허윤희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날 행사는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공식 병행 전시로 지난해 11월 폐막한 개인전의 마무리였다. 1년 전 정월대보름 이곳에서 달집태우기로 시작해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향했던 전시는 1년 만에 다시 청도로 돌아와 순환의 여정을 완성했다. 전시 제목이 ‘달집태우기’. 청도에서 나고 자란 작가는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모여 행하는 고향의 민속 행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보름달이 떠오를 때 솔가지와 볏짚 등을 쌓아 만든 달집에 불을 질러 주위를 밝히는 놀이로, 액을 쫓고 가족과 이웃의 안녕과 화합을 염원한다.

조선일보

정월대보름인 12일 오후 경북 청도군 청도천에서 이배 작가의 '달집태우기'가 진행되는 모습. /조현화랑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제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가 순환입니다. 베네치아에서 했던 작품을 가져와 정월대보름에 태운다는 것은 순환의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을 뜻하지요. 과거의 지나간 모든 시간을 태워 다시 시작하는 계기로 삼자는 의미입니다.”

청도에서 만난 작가는 베네치아 전시 제목을 ‘달집태우기’로 정한 데 대해 “한국의 민속 의식을 현대미술로 재해석하고자 하는 제 나름의 의미를 담은 것”이라며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뜨거운 시대에 한국 작가로서 우리의 전통이나 역사, 문화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전시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조선일보

베네치아 빌모트 파운데이션에서 열린 이배 작가의 개인전 '달집태우기' 전시장 전경. /허윤희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베네치아 운하로 이어지는 전시장 출구. 청도의 달빛을 연상케 하는 노란 통로 공간을 만들었다. /허윤희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해 정월대보름에 대장정이 시작됐다. 달집에 불이 붙는 순간부터 활활 타오르다 숯만 남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영상은 비디오 설치작 ‘버닝(Burning)’이 돼 베네치아 빌모트 파운데이션 전시장 입구에서 상영됐다. 청도 달집에서 타다 남은 숯을 도료 삼아 일필휘지로 획을 그은 ‘붓질’ 3점은 전시장 벽면에서 바닥을 가로질러 다시 벽으로 굽이쳤다. 벽에 그냥 그린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파브리아노의 친환경 제지를 전통 배첩 기법으로 공간의 바닥과 벽에 도배한 후 그렸다. 베네치아 운하로 이어지는 출구에는 청도의 달빛을 연상케 하는 노란 통로 공간을 만들었다.

폐막 후 작가는 전시장에 설치됐던 ‘붓질’ 작품과 도배지를 모두 뜯어 청도로 보냈고, 다시 1년 전과 같은 장소에서 달집태우기 행사를 열었다. 길이 200m, 폭 35m에 달하는 하얀 천 위에 ‘붓질’ 이미지를 인쇄해 ‘섬’ 전체를 덮었고, 그 밑에 나뭇가지와 다양한 이들의 새해 소망을 담은 쪽지, 베네치아 전시를 채웠던 도배지를 넣어 함께 태웠다. 작가는 “지난해엔 달집을 수직으로 쌓아 올렸지만, 올해는 수평으로 넓게 펼쳤다”며 “베네치아와 한국을 잇는 하나의 긴 여정을 표현함과 동시에 뱀의 해를 맞아 뱀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이배 작가의 개인전 '달집태우기' 전시장 전경. 대리석의 고장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라에서 검은 화강석을 채취해 동양의 문방사우를 상징하는 ‘먹’을 만들어 설치했다. /조현화랑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베네치아 전시는 작가로서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1년 전 청도에서 볏짚을 태우며 염원했던 걸 모두 이뤘다. 대형 영상 작업을 처음 시도했고, 대리석의 고장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라에서 검은 화강석을 채취해 동양의 문방사우를 상징하는 ‘먹’을 만들어 설치했다. 양국의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공동 작업으로 전시를 꾸민 것도 처음 경험한 일이었다.”

서구 관람객들의 호응도 컸다. 전시를 보고 감동받아 우는 사람도 많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밤새 차를 몰고 온 여성이 감동하던 모습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는 “청도는 제 작품의 어머니 같은 곳”이라며 “여덟 살 때 전기가 처음 들어왔다. TV도 라디오도 없던 시골 마을, 봄이 되면 냉이를 캐먹던 이곳에서 숱하게 봐온 전통 의식을 현대미술 작가로서 베네치아에서 선보였다는 게 무엇보다 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배(69)

1956년 경북 청도 출생. 홍익대 서양화과 졸업 후 1990년 도불(渡佛)해 프랑스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한다. 30여년간 ‘숯’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드로잉, 캔버스, 설치 등으로 확장해왔다. 파리에서 작업하던 초기, 물감 살 돈이 없어 대신 헐값에 숯 한 포대를 산 게 시작이었다. 2023년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 채널가든 광장에 한국 작가 최초로 6.5m 높이의 대형 숯덩어리 조각을 설치해 주목받았다.

[청도=허윤희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