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순천부읍성 남문터광장
옛 군청, 공간의 연속성을 끊다
군청 존치따라 시야 가리고 동선 단절
옥천·지하상가와 아무런 관계 못 이뤄
광장, 쉼터보다 고립 택해
복잡한 거리와 소음 차단된 푸른 숲 광장
나무대신 판석 대체되며 녹색 공간 축소
잘못된 설계 변경에 발 돌린 시민
최초 공모전 당선안, 연결·빈 공간 강조
변경안, 길과 높이차 둬 보행자 유입 ‘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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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順天)’이라는 지명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하늘의 뜻에 따른다”라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순천은 백성들이 통치자의 뜻에 순응하기를 바라는 어떤 권력자의 마음이 담긴 지명 같다. 작년 6월 출간된 ‘순천시사(順天市史)’에 따르면 ‘순천’이라는 지명은 고려 말(1310년)에 처음 등장했다. 그전까지는 ‘승주’나 ‘승평’으로 불렸는데, ‘승주’라는 지명은 지금도 승주읍에 남아 있다. 1949년 순천읍이 부(府)를 거쳐 시(市)로 연달아 승격되면서 이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이 승주군으로 편입됐다. 두 행정구역은 1995년 순천시로 통합되기 전까지 유지됐다.
승주군청사는 1979년부터 4년간 승주군이 아닌 순천 시내에 있었다. 당시 옥천을 가운데 두고 승주군청사는 과거 순천부읍성 안쪽에 있었다. 그리고 순천시청사는 읍성 바깥에 계획적으로 조성된 시가지에 지금도 자리 잡고 있다. 길이 1.58㎞의 순천부읍성은 1909년부터 훼철되기 시작해 20년이 지나 남문이었던 연자루(燕子樓)가 헐리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은 영동, 행동, 중앙동, 남내동의 행정구역 형태로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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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도시재생의 거점시설이자 순천부읍성 관광자원으로 추진된 광장은 국제아이디어공모전에서 제안됐던 개념과 달리 박석이 깔린 바닥에 이팝나무가 심어진 45개 플랜터로 조성됐다. 광장이 그저 크고 빈 공간으로 남아 있지 않으려면 도시의 길이 광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고 나가는 세밀한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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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른 지방 도시와 마찬가지로 순천시 원도심도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순천 원도심이 국토부의 도시재생선도사업과 새뜰마을조성사업, 문체부의 문화거리조성사업과 순천부읍성관광자원화사업, 중기청의 원도심상권활성화사업에 연달아 선정되면서 순천시는 여러 재원을 바탕으로 도심을 되살리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사업이 옛 승주군청과 옥천 사이에 도시재생 거점시설로 조성된 ‘순천예술광장’, 일명 ‘순천 아트 플랫폼’이다.
2016년 순천시는 전 세계 건축가들로부터 참신하고 획기적인 계획안을 모집하기 위해 국제건축가연맹(UIA)이 주최하는 국제아이디어건축공모전을 개최했다. 순천시의 이런 선택이 새로운 건 아니다. 광주광역시에 건립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세종시의 중심행정타운, 용인시의 백남준 미술관이 이런 방식으로 설계안을 확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국내 사정을 잘 모르는 해외 건축가가 당선자로 선정되면 당선안의 개념을 실제 구현하는 기본 및 실시설계 과정이 중요한데, 그래서 대부분 국내 건축가가 이 단계를 맡아 당선자와 의뢰인의 조건을 조율하고 개념을 실현한다.
공모전에 접수된 작품 수는 303개였다. 그중 185개 작품이 42개국의 해외 설계팀이 제출했다. 순천시가 의도한 국제적인 흥행은 일단 달성한 셈이다. 당선작은 인도 국적의 건축사무소 ‘스튜디오 메이드(Studio MADe)’가 제안한 ‘Hidden Cloister’가 선정됐다. 당선작에 대해 심사위원장이었던 프란시스코 사닌은 “순천 원도심을 재생하기 위한 촉매제이자 랜드마크 역할에 적용될 역사와 도시 맥락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했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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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뜰 가장자리에 있는 복도를 일컫는 ‘Cloister(회랑; 回廊)’는 ‘갇혀 있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Claudere’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클로이스터는 세속으로부터 분리된 ‘수도원의 생활’을 뜻하기도 한다. 스튜디오 메이드가 계획안에서 정적이고 고립된 특성의 클로이스터를 숨긴 이유는 광장이 조성될 순천 원도심이 높은 밀도에 복잡한 공간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스튜디오 메이드는 주변의 거리와 소음으로부터 광장을 가리는 울창한 공원을 조성하고 그 한가운데에 오직 하늘로만 뚫린 광장을 배치했다. 광장은 원도심의 불규칙한 도시환경과 달리 순수하고 반듯한 사각형이고 건물로 꽉 채워진 고밀도의 주변과 대조되는 ‘심리적으로 빈 공간(psychological void)’이었다. 광장을 지하에 배치함으로써 지하에 새롭게 조성되는 미술관과 주차장 그리고 이미 있는 옥천과 순천지하상가를 연결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순천시의 제안으로 광장의 기본 및 실시설계는 공모전에서 3등으로 선정되었던 이소우(eSou)건축사사무소가 맡게 되었다. 설계조건도 변경되었는데, 가장 큰 변화는 공모 당시 철거하기로한 옛 승주군청사(現 생활문화센터 영동1번지)를 존치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스튜디오 메이드가 기존에 광장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배치하려던 두 개의 파빌리온(pavilion)이 남서로 조정되면서 중앙로에서 바라볼 때 주변 마을과 난봉산을 조망하는 시야가 가려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무엇보다 남겨진 옛 승주군청사와 새롭게 조성된 광장은 어떤 연결이나 관계도 이루고 있지 않다.
스튜디오 메이드가 제안했던 지하 광장과 대비되는 지상의 공원은 45개의 수목 플랜터(planter)와 판석으로 대체됐다. 역사관, 기획전시실 등 다양한 시설이 지하에 배치되어 나무가 충분히 자랄 수 있는 토심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상에 수북한 수목들이 조성되지 않자 지상 공원과 지하 광장 간의 명확한 대비도 이루어지지 않게 됐다.
새롭게 조성된 공간이 광장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가장 아쉬운 변화는 광장과 그 동쪽을 지나는 중앙로 사이에 생긴 높이차다. 스튜디오 메이드의 계획안에는 지상의 공원과 그 동쪽을 지나는 중앙로가 거의 같은 높이로 설계되었다. 그래서 중앙로를 따라 걷는 보행자들은 공원과 길을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고 그 안에서 설계자가 의도한 순수하고 반듯한 광장을 갑자기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앙로를 따라 이동하는 보행자가 광장이나 지상 공간으로 진입하려면 반층을 내려가거나 올라가야 한다. 이는 광장과 주변 길 사이의 연결성을 떨어뜨리고 공간의 연속성을 저해하는 원인이다.
상당수의 지자체가 쇠퇴하는 원도심을 활성화하는 방안으로 광장 조성을 택한다. 왠지 멋들어진 광장을 만들고 그 주변에 그간 필요했던 공공시설들을 배치하면 유럽의 광장에서 볼 수 있는 활기찬 풍경이 펼쳐질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 안에서 광장은 생각보다 훨씬 영악하게 작동한다. 그래서 그 자체로 도시를 활기차게 만들지 못한다. 심지어 공공이 운영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역사관보다 훨씬 기민한 판매시설로 둘러싸여 있을 때 비로소 그 활력에 기생하며 작동한다.
사람들이 붐비고 다양한 행위가 일어나는 광장이 되려면 비어있는 큰 공간만큼이나 그 공간으로 도시의 길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세밀함이 필요하다. 의뢰인과 설계자에게는 비어있는 큰 공간이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결과물이니 광장 자체에 더 신경을 쓸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행자들이 경계를 의식하지 않고 주변에서 광장으로 매끄럽게 흘러들어오고 나갈 수 없다면 그 광장은 공허한 이상만 남은 빈 공간이 될 뿐이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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