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6 (수)

이슈 오늘의 사건·사고

[단독] 주민등록 말소 80대 男… 복지 사각 속 화재 참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홍제동 개미마을 가건물 화재

라면 끓이다 부탄가스 폭발 추정

소방당국, 1시간여 만에 완진

거동 불편해 미처 대피 못한 듯

이웃조차 이름·직업 등 몰라

“열악한 주거환경이 사고 원인”

서울 ‘마지막 판자촌’으로 알려진 개미마을에 살던 80대 남성이 11일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이 남성은 라면을 끓이던 중 변을 당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는 주민등록 기록이 말소된 상태라서 아무런 복지 혜택도 받지 못하며 생활한 것으로 전해졌다.

세계일보

11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판자촌인 ‘개미마을’에서 80대 남성이 라면을 끓이던 중 불이 나 숨진 현장을 소방 합동감식반이 조사하고 있다. 장민주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소방 당국에 따르면 이날 오후 2시29분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 가건물에서 불이 나 80대 남성 A씨가 숨졌다. 옆 가건물에 살던 90대 여성도 화상을 입었다.

취재진이 찾은 현장은 화재로 인해 새까맣게 타버린 모습이었다. 불길을 이기지 못해 천장과 벽면은 무너졌고, 바닥은 진흙과 타고 남은 재로 얼룩져 있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햇반과 라면 용기, 통조림, 비타민, 선풍기 뚜껑 등이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말해줬다.

주민들 말을 종합하면 화재는 부탄가스 폭발로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A씨가 옆 건물에 살던 황모(93)씨와 라면을 끓여 먹으려고 휴대용 버너에 불을 붙이다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사고 이후 119에 처음 신고한 60대 김모씨는 “그때 가스가 좀 샜는지, 불이 붙으면서 ‘펑’ 했다고 들었다”며 “처음엔 불길이 작았는데 순식간에 커져서 불이 A씨를 덮쳤다”고 전했다. 김씨는 “황씨가 바가지에 물을 퍼 불을 끄려고 했으나 불길이 점점 커져 내게 맨발로 허겁지겁 달려와서 도움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평소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A씨는 거동이 불편해 미처 대피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주민등록 기록이 말소된 상태로 복지 사각지대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개미마을에 사는 노모(58)씨는 “이웃이지만 이름도, 뭐 하던 사람인지도 아무것도 모른다”며 “A씨는 노숙자로 살다가 마을 교회 목사가 마을에 데려온 뒤 약 6년간 판잣집에 살았다”고 했다. 그는 이어 “주민등록 복구를 위해 주민센터에 데려가려고 하면 기겁하고 싫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주민들은 열악한 주거가 이번 사고를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이성헌 서대문구청장은 “개미마을은 화재에 취약하다”며 주거환경개선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서대문구청 관계자는 “올해 겨울 개미마을 내 화재 예방 활동은 없었다”고 밝혔다. 서대문구가 지난해 ‘찾아가는 보건복지서비스’ 제공으로 우수상을 받았다지만 주민 백모(72)씨는 “구청 직원이 올해 겨울에 한 번도 찾아온 적 없었다”고 말했다.

소방은 차량 15대와 인력 50명을 투입해 진화했다. 오후 2시56분쯤 초진된 불은 발생 1시간여만인 오후 3시35분쯤 완전히 꺼졌다. 정확한 화재 발생 경위 등은 조사 중이다.

변세현·장민주·정세진·소진영·임성균·최경림 기자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