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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성 마켓보로 대표 ⓒ플래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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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저녁, 한 식당의 주방에서 식재료를 정리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양파 한 망, 고춧가루 한 봉, 배추 한 포기... 주방장의 손끝에서 오늘의 장부가 완성되어 간다. 21세기의 대한민국, 인공지능과 우주여행이 현실이 된 시대에도 여전히 많은 주방에서는 이렇게 수기로 발주서를 작성하고 있다. 55조 원 규모의 거대한 식자재 유통 시장이 아날로그 시대에 멈춰 있는 듯했다.
임사성 마켓보로 대표의 창업 여정은 병역특례 개발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근무하던 회사의 거래처에서 제안이 왔어요. '우리가 투자해줄 테니 창업할 생각 없냐'고 하더군요." 그렇게 시작된 첫 창업 블루제타는 1년 반 만에 성공적인 매각으로 이어졌다. 젊은 개발자의 시작은 순조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 후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모바일 소셜 동영상 서비스, 뮤직톡 등 여러 도전이 실패로 끝났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만 했어요. 시장이 원하지 않았고, 고객도 원하지 않았는데..." 페이스북보다, 트위터보다 더 좋은 기능을 만들면 성공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기술자의 오판이었다.
이 실패는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기술적 접근만으로는 부족했어요. 좋은 제품이 잘될 거야, 라는 막연한 생각이었죠." 그가 깨달은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닌, 시장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이었다.
2015년, 임사성 대표는 자신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한참을 생각했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가 쌓아온 IT 경험은 분명 의미가 있었지만, 네이버와 카카오 같은 거대 기업들이 이미 모바일 비즈니스를 장악해가는 현실 앞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VC들을 만나면 늘 같은 질문을 받았어요. '그거 네이버가 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카카오가 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그때 그의 기억 속에서 오래된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주방 보조로 일하며 보았던 식자재 발주 현장, 그리고 그로부터 이십 년이 지난 후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풍경.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우리가 페이스북과 트위터만 바라보며 놓치고 있던 것, 기술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여전히 아날로그 시대에 멈춰있는 거대한 시장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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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4일 오후 11시 경, 한 통의 보도자료가 언론사들의 메일함에 도착했다. 마켓보로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많은 분들이 B2C의 문법으로 접근했어요. 생산자와 구매자를 직접 연결하면 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현장은 달랐습니다."
식자재 유통의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파레트 단위로만 거래하는 생산자, CS 경험이 전무한 도매상, 당일 새벽 배송을 필요로 하는 식당들... 단순한 직거래 플랫폼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임사성 대표는 시장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새벽 가락시장에서 라디오 광고를 하고, 유통사 트럭에 랩핑 광고를 붙이고, 때로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를 반복했다.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플랫폼을 꿈꿨지만, 임 대표는 시장의 중심에서 답을 찾았다. "라스트마일 딜리버리를 하는 유통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들이 바로 이 생태계의 핵심이죠." 그의 통찰은 생태학자를 떠올리게 했다. 복잡한 생태계에서 핵심 종을 보호함으로써 전체의 균형을 맞추려는 것처럼, 그는 유통사들의 디지털 전환에서 혁신의 실마리를 찾았다.
"신라면 한 박스를 주문할 때도, 어떤 유통사는 한자로 '辛'자를 쓰고, 어떤 곳은 한글로 쓰고..." 9조 원에 달하는 거래 데이터를 표준화하는 작업은 3년이라는 시간을 삼켰다. 그것은 마치 수천 개의 방언을 하나의 표준어로 정리하는 작업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 지난한 작업이 없이는 진정한 혁신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2024년, 마켓보로는 연간 거래액 3조 원을 돌파했다. 숫자만 보면 인상적인 성장이지만, 임사성 대표의 시선은 이미 더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많은 사장님들이 가락시장에 가면 무조건 싸다고 생각하시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그의 설명에는 시장을 바라보는 깊은 통찰이 담겨 있었다. 월 100박스의 식자재를 사용하는 식당과 1박스를 사용하는 식당은 전혀 다른 구매 전략이 필요하다. 배송 조건, 결제 조건, 식당의 위치, 계절적 요인까지. 이 모든 변수들이 최적의 구매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물류 혁신의 기준을 세운 쿠팡은 그들에게 중요한 벤치마크였다. "쿠팡이 만든 혁신적인 물류 시스템을 보며 많이 배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어요. 식당 사장님들에게는 더 정확한 배송, 더 전문적인 품목이 필요하니까요." 현재 마켓보로가 보유한 22만 개의 식자재 상품은 이런 전문성을 잘 보여준다. 쿠팡이 일반 소비자를 위한 'B2C' 플랫폼이라면, 마켓보로는 전문 식당을 위한 'B2B' 플랫폼으로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다.
"새벽배송을 넘어섰다고 판단합니다. 식자재는 정시에 도착해야 하고, 심지어 냉장고까지 넣어드려야 해요. 한 번의 실수가 식당 하루 영업을 망칠 수 있으니까요." 그의 말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빠른 배송, 다양한 상품,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쿠팡의 장점을 모두 갖추면서도, 거기에 전문성이라는 무기를 더했다.
마켓보로의 다음 도전은 야심차다. "궁극적으로는 식자재 선물 거래소를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수요 예측을 통한 계약 생산, 계약 유통... 그가 그리는 청사진은 식자재 시장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꿀 만했다. 여기에 AI 기술을 더해 '맞춤형 추천 서비스'까지 구상 중이다. "백종원 대표보다 더 잘 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각 식당의 특성과 시장 상황을 분석해 최적의 구매를 제안할 수 있습니다."
2025년 4조 원, 2027년 10조 원이라는 목표는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다. 그것은 가락시장의 연간 거래액 6조 원을 뛰어넘는 규모다. 하지만 마켓보로의 시선은 이미 한국을 넘어서 있었다. "미국이나 유럽은 이미 대기업들이 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동남아는 우리나라처럼 중소 유통사들이 시장의 중심에 있죠." 임 대표의 도전은 이제 글로벌 무대를 향하고 있다.
마켓보로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2027년 IPO를 향한 여정, 동남아 시장 진출이라는 새로운 도전, 그리고 AI 기반의 맞춤형 서비스 구축까지. 한 창업가의 주방에서 시작된 작은 관찰이, 이제 식자재 유통 시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의 꿈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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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간의 여정이 가르쳐준 가장 큰 교훈은 사람이었다. "좋은 동료를 찾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임 대표의 목소리가 깊어졌다. "채용 공고로는 안 됩니다. 성심을 다해 모셔와야 합니다. 삼고초려를 하고, 정성을 다해 설득하고… 결국 사람이 혁신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여러 번의 실패를 거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그가 깨달은 것은 결국 '사람'이었다. "스타트업의 크기는 창업자들의 성장의 크기만큼밖에 못 갑니다. 우리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을 모시고, 그분들과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예비 창업자들에게 그가 건네는 조언은 다소 의외다. "창업하지 마세요." 역설적인 이 말 뒤에는 깊은 통찰이 숨어있다. "매일매일 지루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10년, 20년을 싸울 수 있는 사명감이 있습니까?" 그의 질문은 창업의 본질을 정확하게 찌른다. 스트레스 관리법을 묻자 그는 솔직하게 답했다. "술 마시고 등산 갔다가, 내려와서 또 술 마셨죠." 웃으며 하는 말이지만, 그 속에는 창업가들의 고독한 싸움이 묻어있다.
해 질 녘 마켓보로의 사무실을 나서며, 문득 분주한 식당가가 떠올랐다. 여전히 많은 주방에서는 장부를 정리하고, 발주서를 쓰고, 식자재를 점검하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상의 켜켜이 쌓인 굳은살 사이로, 디지털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글 : 김문선(english@platum.kr), 손요한(russia@platu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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