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19 (수)

[김별아의 문화산책] 공무원 ‘홍 누나’의 조용한 죽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향년 66세… 모신 장관만 31명

학벌은 없지만 문화부 꿰뚫으며

빛 안 나는 조력자로 공무원 43년

사소하지만 참으로 흔치 않은 일

조선일보

2019년 박물관신문과 인터뷰한 문화체육관광부 홍보담당관 홍선옥 사무관./국립중앙박물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오랜 인연이라 해도 그 시작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고 끝까지 그러하리라 믿었다고 했다. 언론에 짧은 부고가 실렸다. ‘홍선옥(문화체육관광부 사무관)씨 본인상, 향년 66세’. 개인적인 친분이 없다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죽음이었다. 그런데 SNS에 그를 기리는 추억담이 잇달아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람을 가리기로 정평 난 까칠한 기자들의 글이 특히 눈에 띄었다. 일을 놓을 수 없던 천성, 자기주장 대신 언제나 듣는 데 열중했던 누나…. 그들이 평소와 달리 넘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슬픔과 회한으로 추억하는 ‘홍 누나’가 어떤 이였는지 궁금했다.

몇몇에게 사연을 물었다. 국가공무원 공채시험 출신은 아닌 듯한데, 수십 년간 교유하고도 공무직인지 몇 급인지 그의 신분과 지위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한목소리로 홍선옥이야말로 문체부 홍보 행정에서 전에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레전드’라고 했다. 그는 문체부와 언론을 연결하고 지원하는 메신저였다. 대통령 9명, 장관만 31명을 거쳤고 1만여 기자의 연락처를 보유하고 있었다. 보도 자료 전달부터 민감한 정치적 문제에 대처하는 장차관의 인터뷰까지, 기자 T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일개 사무관으로서 ‘장관급 대응’을 했다.

홍선옥씨 개인에 대한 자료는 ‘박물관신문’ 제578호의 인터뷰뿐이다. 그것을 통해 1982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입사해 공직 생활을 시작했고, 홍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 17년 동안 매달 ‘박물관신문’을 홀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공자가 아니고 학벌도 없었던 그는 오로지 발로 뛰어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와 의미를 증명했다. 올해로 창간 55주년을 맞는 ‘박물관신문’은 국립중앙박물관과 박물관사의 사료로 기능하고 있다.

하지만 홍선옥씨의 특이점은 성과나 역할에 있지 않다. 그는 철저한 그림자이자 조력자였다. 그러면서도 긴요하고 대체 불가능했다. 기자 P는 인간적인 친밀감을 바탕으로 어느 누구도 적으로 두지 않는 인간관계를 그의 장점으로 꼽았다. 만날 때마다 “밥 먹었냐?”고 물어보았고, 먹었다고 대충 답하면 “뭘 먹었냐?”고 꼭 물었다. 공무원 대 기자, 공무원 대 민원인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었다. T가 해직 기자 시절 우환으로 고생할 때 대기업 재단에서 공모하는 논문 프로젝트를 소개해 숨통을 틔워 준 것도 그였다. 한편 여행사 운영에 어려움을 겪던 H씨가 사전 통보 없이 협회비 미납으로 관광업 허가가 취소되는 날벼락을 맞았을 때, 유일하게 관심을 갖고 사업자 등록증으로 영업이 가능한 방도를 일러준 사람도 그이, 홍선옥이었다.

그러하기에 그의 일자리가 위태로워졌을 때 기자들이 발 벗고 나서 정식 채용을 요구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하루에 카카오톡 메시지만 수백 개를 받아 응답하고, 끝없이 반복되는 일을 성심껏 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그래서 암 수술 후에도 후임을 구하지 못해 복직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일했고, 종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특별한’ 공무원으로 세상을 떠났다.

공무원 사회의 ‘무능과 무기력, 헛짓거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공무원들에게 정당한 보상과 공공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을 주지 못하는 풍토는 개선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아픔을 느낄 때 모두가 비명을 지르지는 않는다. 비명을 듣고 놀랄 사람들을 염려해 고통을 삼키는 사람도 있다. 난세에는 흔들리지 않는 것도 작지 않은 일이다. 흔들리지 않아야 흔들리는 사람들의 의지가 될 수 있다. 빛나지 않는 곳에서 그 자리의 소임을 끝까지 지켰던 홍선옥씨가 그런 사람이었다. 사소하지만 참으로 흔치 않기에, 그를 잃고 나서 많은 이들이 이토록 애통해하는 것이리라.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1170

[김별아 소설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