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
작곡가 진은숙(왼쪽 사진부터), 신동훈, 김택수. 통영국제음악재단·신동훈 제공·ⓒEstro Studio Haksoo K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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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사회를 반영하고 사회를 일깨우며 말로서 다하지 못한 의사소통을 이뤄 왔다. 그중에서도 음악은 나와 다른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연결해주며 사회적 연대와 통합을 만들어낸다. 영국 사회학자 데이비드 헤즈먼드 핼시는 저서 '음악은 왜 중요할까'에서 음악은 종종 집단적이고 공적인 경험의 기초가 된다고 했다. 슬픔과 기쁨, 사랑을 함께 나누고 싶은 순간뿐 아니라 최근 시위 현장에서도 음악은 혐오가 지배적인 환경에서 화합과 희망을 함께 외치게 했다.
20세기 작곡가들은 전통에서 벗어나 실험적 도전과 혁신적 스타일, 지역색과 사회적 배경을 담는 음악을 다수 썼다. 특히 국가와 민족의 개념이 중요해지는 시기로부터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시민과 개인, 인류애를 향한 목소리가 음악 안으로 녹아들었다. 베르디, 버르토크, 메시앙, 라벨, 프로코피예프, 하르트만, 애덤스, 브리튼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작품은 전쟁의 아픔을 일깨우고 변화를 끌어냈다. 특히 스탈린 치하 러시아에서 내적 고뇌와 항변을 담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20세기의 시대정신을 대변했다.
기술 발전과 함께 음악이 영화를 비롯한 각종 미디어와 결합되면서 작곡가들은 음악에 서사를 전달하는 스토리텔러로서의 역할을 부여했다. 21세기 작곡가들은 지역색을 벗어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의 다양성을 반영한 여러 주제의 음악을 쓰고 있다. 미디어, 공간, 시간을 다각적으로 활용해 환경 보호와 평화, 인권 등 현대 사회의 범세계적 이슈를 드러낸다.
사회적 연대와 통합 이끄는 동시대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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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리히터의 '슬립' 음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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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리히터는 현대인의 수면 부족 문제를 예술적 시각으로 접근해 '잠(sleep)'이라는 작품을 썼다. 러닝타임은 CD 한 장에 다 담지 못할 8시간에 이른다.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과 수면 패턴을 연구해 협업한 것으로 특정 공간에서 실제 잠드는 시간에 연주를 시작해 잠에서 깰 때까지 8시간을 연주한다. 현대인을 위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평가받은 이 곡은 20억 회 이상의 스트리밍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탈리아 작곡가 루도비코 에이나우디는 2016년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의 빙하 위에서 '북극을 위한 비가(Elegy for the Arctic)'를 연주했다. 기후 변화로 녹아내리는 북극 빙하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48시간의 특별 연주를 감행했다. 연주 중 실제 빙하가 무너져내리고 거대한 파도가 발생하는 등 극적인 현장이 담긴 영상은 전 세계 800만 명 이상이 시청했다. 북극 보호를 위한 서명 운동이 일어나는 등 인식 변화를 위한 메시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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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브뤼셀 필하모닉과 첼리스트 카미유 토마가 파질 세이의 첼로 협주곡 '절대 포기하지 마라'를 연주하고 있다. 유튜브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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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출신의 세계적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파질 사이의 첼로 협주곡 Op.73 '절대 포기하지 마라(never give up)'(2017)는, 2012년 튀르키예 정부의 시위대 폭력 진압과 2015년 파리 테러를 비판하며 자유와 평화 염원의 메시지를 담은 곡이다. 2021년 통영국제음악제에서 크리스티안 바스케스 지휘,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작품 초연자인 첼리스트 카미유 토마의 연주로 들을 수 있었는데 당시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격렬한 타악기의 진동과 목관악기의 글리산도로 비명과 테러의 상황이 눈앞에 그려졌고, 홀로 앉아 처연하게 연주하는 첼로 선율에서는 현장의 흐느낌과 통곡, 절망의 아픔이 전해졌다. 3악장에 이르러 튀르키예 전통 리듬과 새소리, 파도 소리로 희망을 담아 끝낸다. 혐오적 현실 문제를 일깨우고 아픔에 공감하며 진정성과 고요함을 갈망하게 하는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이 각별하고 소중해지는 이유다.
쇼스타코비치의 제자인 소피아 구바이둘리나는 소련 태생이었지만 보편적 인간의 괴로움과 실존에 대한 고민을 종교적 형태를 빌려 풀어내고 있다. 진은숙, 신동훈, 김택수 등 윤이상의 21세기 후예들인 한국 작곡가들 역시 현재를 사는 보편적 인간의 정신을 이야기한다. 진은숙은 혁신적 사운드와 구조, 악기의 한계를 넘어선 연주 기법과 다양한 문화 영역을 넘나드는 독창성으로 현존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다. 김택수는 농구공, 술잔 부딪히는 소리 등 일상의 순간 포착은 물론 화학과 출신의 과학적 개념을 융합한 음악으로 소리와 함께 흥미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소설가가 꿈이었던 신동훈은 문학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다. 이들이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 극장과 연주 단체로부터 점점 더 많이 사랑받는 이유도 '오늘의 삶'을 음악으로 기록하는 뛰어난 창조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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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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