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
일본 총리는 관저 드나들 때 근접 취재 허용
수시로 기자들 취재 응하며 여론 파악하려 해
日언론, “총리 걸음 2초 느려졌다”고 보도하기도
尹, 기자들과 접촉 끊고 편향적 유튜브에 몰두
박근혜처럼 폐쇄적 생활하다가 시대착오적 계엄
2018년 6월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했을 때 일본 정치에서 부러운 게 하나 있었습니다. 일본 총리가 관저(官邸)에 드나들 때 기자들이 로비에서 그에게 최대한 가까이 가서 취재를 하는 장면이 매일 TV에 나왔습니다. [일본 총리 관저는 한국 대통령의 청와대 관저, 한남동 관저와는 달리 사무공간을 의미합니다. 일본 총리 부부가 생활하는 곳은 공저(公邸)라고 합니다.]
일본 정부로부터 외신기자증을 받자마자 총리 관저에 가보니, 미국 백악관처럼 총리와 기자들이 같은 건물을 사용하는데 훨씬 더 개방적이었습니다. 총리는 이곳의 5층에서, 기자들은 1층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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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0일 취임한 윤석열 대통령이 다음날인 1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 출근하며 첫 약식 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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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관저에 등록된 언론사 기자들은 현관과 연결된 3층 로비까지는 자유롭게 올라가 갈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밖을 오가는 총리에게 질문하고 방문객을 주시합니다. 우리나라의 청와대와는 달리 기자들이 총리를 근접 취재하는 시스템이 정착돼 있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일본 총리는 언론이 매일 자신의 동정을 파악해 보도할 수 있도록 협조합니다. 총리가 외출할 때는 풀(pool) 기자 역할을 하는 통신사 차량이 반드시 경호 차량과 함께 다니는 것이 관례로 자리잡았습니다. 우리처럼 대통령이 보여주고 싶은 행사에만 풀 기자를 허용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에 따라 일본의 중앙 일간지에 매일 총리의 전날 일정이 분(分) 단위로 실리고 있습니다. 지난 23일 요미우리 신문에 실린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동정을 일부 살펴보겠습니다.
언론은 이를 바탕으로 총리가 누구를 자주 만나는지, 어떤 성향을 보이는지를 분석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도쿄에서 근무할 때 아사히 신문이 2020년 11월 2000년 이후 일본 총리 9명을 대상으로 취임 후 1개월간의 ‘수상(首相) 동정’을 분석해 발표했습니다. 그 결과 2020년 9월 취임한 스가 요시히데 총리가 659회로 면담을 가장 많이 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기록으로만 보면 지난 20년간 총리 중 가장 부지런한 총리라는 평가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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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요미우리 신문 2025년 1월 24일자 2면에 실린 이시바 총리의 23일 동정. 23일 오전 8시40분에 출근해서 오후 7시 45분에 퇴근할 때 까지의 일정이 분 단위로 파악돼 있다. 총리 동정은 매일 일본의 중앙 일간지에 게재된다. 이를 통해 일본 국민은 총리가 매일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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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이 2000년 취임한 모리 요시로 총리로 521회를 기록했습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는 각각 489회, 438회로 3, 4위를 차지했습니다. 후쿠다 야스오 총리는 237회로 면담을 가장 적게 했습니다.
스가 총리의 동정 중 민간인이나 언론 관계자와의 면담은 112회로 전임자들보다 월등히 많았습니다. 취임 후 한 달간 스가의 1일 평균 활동 시간은 12시간 6분. 이른 아침에 관저에서의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한 후 호텔 등에서 면회나 회의에 들어가는 ‘조활(朝活)’형이었습니다.
스가가 한 달간 가장 빈번하게 만난 인물은 기타무라 시게루 국가안전보장국장(29회)으로 매일 한 차례꼴로 만났습니다. 그 다음은 국정원장 역할을 하는 다키자와 히로아키 내각정보관(26회)이었습니다. 아베 전 총리에 비해 외교·안보 경험이 부족한 그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두 사람을 자주 만난 것으로 보인다고 아사히신문은 분석했습니다.
◇청와대에 은둔했던 박근혜 대통령
제가 일본 총리의 개방적이고 언론 친화적인 관저 운영에 주목한 것은 2017년 3월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과 소통하지 않고, 청와대 생활에 안주하다가 탄핵당했다는 판단때문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임기 후반으로 가면서 청와대 깊숙이 자리잡은 관저(여기서는 대통령이 먹고 자는 생활공간을 의미합니다. 집무실까지는 도보로 10분 가까이 걸립니다.)에 틀어박혀 지내는 때가 많았습니다. 비서실장, 수석비서관도 잘 만나지 않았으니, 언론과 자주 접촉하며 민심 파악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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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9년 10월 31일 총리 관저에서 열린 약식 기자회견에서 발언 도중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일본 총리들은 출퇴근시 기자들의 근접취재를 허용하며 이같은 약식 회견을 수시로 갖는다./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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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청와대 비서실장 5명 중 가장 실세였다는 김기춘씨는 1주일에 한 번도 박근혜 대통령을 못 보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집무실에 나오지 않고, 관저에 머무는 경우가 많아 행정관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서 보고서를 전달한 적이 있다는 사실도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근접 취재 일본 언론, “아베 총리 걸음 2초 느려졌다” 보도
일본의 총리 관저 시스템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기자들이 관저 로비에서 상주하며 밀접 감시하니, 평일에는 단 하루라도 공저에 틀어박혀 쉴 수가 없습니다.
현행 일본의 총리 관저 취재 시스템에서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2020년 8월 아베 총리의 사임 원인이 된 건강 이상을 가장 먼저 눈치 챈 이들은 그를 매일 지켜보던 젊은 기자들이었습니다. 일본의 한 방송사는 관저 로비에서 아베의 걸음이 4월 평균 18.24초에서 8월 20.83초로 2초 이상 느려졌다고 보도했습니다. 매일 총리의 걸음걸이를 살피며 시간을 재고, 이를 통계화해 기사화한 데서 탄복했습니다.
2020년 9월 한국 정치가 일본 관저 시스템을 벤치마킹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칼럼을 써서 송고했습니다. 오피니언면을 담당하던 박종세 조선일보 여론독자부장(현 경영기획본부장)은 제 칼럼에 ‘어항 속 日 총리 관저 vs 구중심처 청와대’라는 제목을 붙여줬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이전 공약 파기
도쿄 근무를 마치고 2021년 5월 1월 본사로 복귀했는데, 문재인 대통령도 전임자와 비슷한 불통 논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문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처럼 되지 않겠다며 청와대를 나와 ‘광화문 시대’를 여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약했는데, 이는 거짓말이 됐습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12분짜리 대통령 취임사에서 4분이 지날 때부터 청와대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권위적인 대통령 문화를 청산하겠다”며 “준비를 마치는 대로 지금의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뿐이었습니다. 그의 청와대 집무실 이전 언급은 2012년 대통령 선거에 처음으로 나왔을 때부터 시작됐는데,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달라졌습니다.
문 대통령은 2019년 1월 22일 자신의 광화문 시대 공약을 파기했습니다. 공약을 무효화하는 이유로 리모델링 비용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청와대 관저와 헬기장, 의전 공간은 그대로 사용하며 광화문 정부중앙청사로 출퇴근하면 되는데 무슨 비용이 그렇게 많이 든다는 것인지....사실은 외부와 단절돼 편안한 청와대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에둘러 말한 것에 불과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그도 역시 언론 접촉을 꺼리고 청와대에 칩거하는 시간이 많아 언론과 국민은 그가 매일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문 대통령의 실패는 광화문 시대 공약을 파기한 2019년 1월 22일부터 본격화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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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건물이 일본에서 사무공간을 뜻하는 총리 관저로 옥상에 헬리콥터가 이착륙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2002년 완공됐다. 왼쪽은 이전에 총리 관저로 쓰였던 건물로 지금은 총리 부부가 생활하는 공저로 단장됐다./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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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 의식하에 제 20대 대통령 선거가 시작될 때인 2021년 11월 ‘광화문으로 출퇴근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는 칼럼을 썼습니다. 대통령이 청와대에 거주하되, 한 낮에 일하는 집무공간을 정부종합청사로 옮겨서 출퇴근길에 기자도 만나면서 소통을 해 보라는 취지였습니다. 말미엔 구체적으로 이렇게 제언했습니다.
“(대통령 집무공간을 광화문으로 옮기면) 정부청사와 경복궁 사이엔 일반인이 잘 모르는 지하도가 개설돼 있어 유사시 이동하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광활하기 이를 데 없는 청와대는 미국의 블레어 하우스처럼 국빈이 투숙할 수 있는 시설로 일부 개조하는 것도 방법이다.
내년(2022년) 3월 대통령 선거까지는 앞으로 4개월가량 남아 있다. 문재인 정권의 적폐(積弊) 청산을 위해서도 청와대 집무실 이전 문제가 여야 대통령 후보들 사이에 깊이 있게 논의되기를 바란다.”
◇대통령실, 일본식 약식기자회견 도입했다가 중단
1999년에 정치부 기자가 돼 여당, 야당을 번갈아가며 출입하고 TV 조선 정치부장을 지내면서 정치권 인사들을 자주 만나왔습니다. 20대 대통령 선거 중에도 여야의 중견 정치인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습니다. 이 때 일본 총리 관저 이야기를 하며 청와대 업무공간의 이전과 언론과의 소통을 강조했습니다.
청와대 이전을 매개로 한 국민과의 소통은 2007년 정동영 민주당 대선 후보, 2012년 유력한 대선 주자였던 안철수 의원 등이 제기해왔기에 이에 반대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일부 정치인들은 제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가며 메모하기도 했습니다.
그랬기에 2022년 3월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가 당선된 후, 청와대를 용산으로 옮기는 것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기자들과 출근길 약식 회견을 시작한 것에 대해서는 다행으로 생각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취임 다음날부터 시작한 출근길 약식 회견은 많은 화제가 됐습니다. 대한민국의 최고 지도자가 출근하면서 기자들을 만나는 장면은 신선감을 줬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처음 시행되다보니,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실은 이 제도가 정착될 때까지 ‘거친 질문’을 하지 않는 ‘그레이스 피리어드(유예기간)’를 희망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실의 각 부서가 출근길 약식 회견에 대응하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다”는 얘기도 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평소 알고 지내던 대통령실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저의 도쿄 특파원 경력을 잘 알고 있는 그가 “일본의 관저 시스템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2019년에 제가 쓴 칼럼을 바탕으로 상세한 설명을 해줬습니다. 대통령이 특정 현안에 대해서 언쟁하기보다는, 기자들의 관심사에 귀 기울여가며 자신의 생각을 국민에게 잘 전달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해줬습니다. 아울러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이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미국 방문 중 비속어 논란 등 특정 방송사와 갈등이 커지고 대통령실 내부에서 출근길 회견 무용론이 나오면서 시작한지 반 년만인 2022년 11월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출근길 회견은 복원되지 않은 채 언론과의 관계는 계속 악화됐습니다.
저는 윤 대통령의 시대착오적인 비상 계엄이 잉태되기 시작한 지점을 바로 이즈음으로 봅니다. 언론과의 소통을 귀찮아하고, 극단으로 쏠리는 유튜브에 빠져들면서 2020년대 중반의 한국 대통령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국민은 무엇을 바라는 지에 대한 감각을 잃어가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윤 대통령이 기자들의 레이더에서 벗어나면서 자신이 생활하는 한남동 관저에 머무는 시간이 늘고, 성실하게 출근하지 않았다는 관측도 계속 커져왔습니다.
윤 대통령이 출근길 약식 기자회견을 매일같이 진행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귀 기울였더라면, 이렇게 어이없는 자폭 계엄을 할 생각은 못 했을 겁니다. 때로는 거칠고, 자신이 보기엔 억울한 질문도 있었겠지만, 이를 민심으로 받아들이고 고민했다면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수의를 입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하원 외교안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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