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인선 등 2척 표류, 울릉도 접안 요청
소련과 미수교에도...국제법 따라 지원
'미수교국 중국' 어선 피항 전례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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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985년 8월 10일 울릉도 인근에서 악천후로 조난된 소련 선박이 한국에 지원을 요청했던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했다. /임영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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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소형 선박 1척을 예인 중인데 폭풍우로 인해 울릉도에 접안하고자 한다. 허가해 줄 수 있겠는가?"
1985년 8월 10일 울릉도 전신전화국은 소련 선박으로부터 이같은 내용의 무전을 접수했다. 당시 울릉도 너머 해역은 악천후로 요동치던 상황이었다. 울릉도 전신전화국은 즉시 안전기획부(안기부)와 보안수사대 등 관계 기관에 소련 선박의 피난 요청 사실을 전달했다.
당시 한국은 소련과 정식으로 수교를 맺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한국 전쟁으로 인한 반공 정서가 만연해 정부로서도 즉각 조처하기 난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조난 선박을 모른 척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국제법이나 국제관례에 따라서도 선박 소속 국가의 우호 여부를 떠나 긴급 피난 요청은 수용해야 했다.
우선 정부는 기상 악화라는 상황의 시급성을 고려, 소련 선박과 접촉해 보기로 했다. 이에 울릉도 전신전화국은 소련 선박에 정확한 위치와 배의 크기, 탑승 인원 등을 알려달라는 무전을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회신은 없었다. 쌍안경으로는 울릉도 북면 5마일 해상에 해당 선박을 식별할 수 있었지만 무작정 접근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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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선박의 울릉도 접안 요청과 관련한 상황 일지. 정부는 안기부, 치안본부, 외무부(외교부) 등을 중심으로 논의한 끝에 국제법에 따라 소련 선박의 긴급 피난을 최종 허용하기로 했다. /외교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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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정부는 안기부, 치안본부, 외무부(외교부) 등을 중심으로 국제법을 뒤져가며 논의에 착수했다. 이후 소련 선박의 긴급 피난을 최종 허용하자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해양법협약에 따르면 △모든 선박은 공해상에서 자유로운 항행을 할 수 있고 △영해 진입 이후에도 '무해 통항'의 권리를 갖게 되며 △연안국의 평화, 안전을 해하지 않는 한 항행의 제한은 없었다. 특히 '조난에 의해 필요한 경우 정선(배를 멈춤)하거나 투묘(닻을 내림)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고 적시돼 있었다.
이에 정부는 주한 미국대사관에 사건 경위를 통보하고 미국 측이 소련 측에 이러한 사실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측은 즉시 유엔(UN)군사령부와 연결해 상황 파악에 나섰고, 주일 미국대사관을 통해 소련 측과 접촉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는 동안 울릉도에서는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경계 태세를 강화했다. 6개 어선 통제소 경찰 18명과 16개 초소 전경 128명, 4개 파출소 경찰 16명 등 총 162명이 동원됐다.
울릉도 전신전화국은 소련 선박에 재차 무선 접촉을 시도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이튿날 오전 6시 4분, 울릉도 북방 8마일 부근에 해군 구축함 부산함이 도착했다. 부산함은 소련 선박에 "What can I do for you?"라는 전문을 보내며 피항을 허가한다고 일러줬다. 약 2시간 뒤 드디어 소련 선박으로부터 회신이 왔다.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왔다. 싱가포르에 입항할 예정이었다. 피항 조치를 허용해 줘서 고맙다. 환자나 부족한 물자는 없다. 기상이 호전되면 3~4시간 뒤 싱가포르로 다시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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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선박은 1985년 8월 11일 오전 9시 30분 날씨가 잠잠해지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련 선박은 오전 11시 30분경 울릉도 해상을 통과한 뒤 한국 영해를 완전히 이탈하며 자취를 감췄다. /외교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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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소련 선박의 긴급 무전 내용대로 배는 2척이 맞았다. 621톤 예인선 GORDELIVY호와 270톤 어선 AMAEPMAK호에는 각각 25명과 10명의 인원이 있었다. 정부는 주한 미국대사관에 소련 선박과 교신한 내용을 전달하며 상황 공유를 지속했다.
오전 9시 30분경 날씨가 잠잠해지자 소련 선박에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천천히 항해를 시작한 소련 선박은 오전 11시 30분경 울릉도 남방 13마일 해상을 통과했다. 이윽고 한국 영해를 완전히 이탈하며 수평선 아래로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우리 정부가 소련 선박을 지원했던 배경에는 국제법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울러 이와 비슷한 전례가 있었다는 점도 한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소련 선박의 아국 영해상 긴급 피난과 관련한 법적 사항 검토' 문건을 살펴보면 "아국의 관행상 미수교국의 선박이 조난했을 경우 항구 밖의 영해상에 정박해 긴급 피난하도록 인정한 사례가 있다"며 중국 어선의 제주도 남방 영해 피항 사례가 명시돼 있다.
문건은 "기상 관계 호전에 따라 울릉도 연안에 접근하지 않고 싱가포르로 항진해 아국 영해를 벗어나 연안 접안에 따른 양 측의 의무는 발생하지 않았다"며 "따라서 양 측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긴급 피난을 시행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맺었다. 사건 발생일로부터 약 5년 뒤인 1990년 9월 30일 한국과 소련은 수교를 맺었다. 중국과의 수교일은 1992년 8월 24일이다.
js8814@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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